•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4장 부흥의 초석, 조선 후기의 무예와 무기
  • 1. 단병기와 단병 전술의 교훈
  • 전쟁에서 깨달은 단병 전술의 교훈
장필기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역사는 전쟁인데, 우리 옛 강토는 싸우지 않고 저절로 움츠러들었다.”고 하였다.226)박지원(朴趾源), 『열하일기(熱河日記)』, 도강록(渡江錄) 을해조. 박지원이 중국 사행(使行)을 가면서 보았던 만주 옛 땅을 두고 한 말이다. 여기에서 전쟁이란 역사를 기록하는 ‘붓’일 수도 있고, 또 실제의 ‘칼’일 수도 있다. 어떻든 전쟁이란 인류의 탄생 시기부터 줄곧 있어 왔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인류 역사 자체가 전쟁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전쟁에는 양면성이 있다. 남을 공격하기 위한 전쟁과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전쟁이 그것이다. 공격이든 방어든 간에 전쟁을 위한 필수 도구는 무기이다. 무기의 효용성이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것이 전근대 시기 전쟁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조선 사회의 성격을 크게 뒤바꾼 임진왜란은 조총이라는 왜군의 우수한 무기 체계를 입증한 전쟁이기도 하였다. 당시까지만 하여도 조선은 활과 화살을 주로 하는 전통적 무기 체계를 고수하고 있었다.

활과 화살은 먼 거리에서 적을 공격하는 무기이다. 우리 역사상의 전쟁 은 대부분 성곽을 거점으로 하는 전투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먼 거리에서 공격할 수 있는 활과 화살이 주 무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같은 먼 거리용 무기도 왜군의 우수한 조총은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더구나 조총과 결합된 장창과 왜검(倭劍) 등 단병기(短兵器)는 성곽이 함락되는 시점의 백병전(白兵戰)에서 대단한 효력을 발휘하였다. 그러한 모습은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와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에 잘 묘사되어 있다. 즉 조총과 장창, 왜검으로 무장한 왜병들이 이중삼중으로 성을 에워싸고 위협하며 돌입하고 있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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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순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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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왜군은 한 개 부대마다 5진(陣) 3첩진(疊陣)이라는 공격 대형의 진법을 이용한 전술을 구사하였다. 각 부대는 세 개의 행렬을 이루어 3첩진이라 하였으며, 첫 행렬은 기치를 가지고 있는 정병(正兵)이 주축이었고, 다음 행렬은 조총수로 두 개의 기병진(騎兵陣)이 되며, 제일 뒤의 행렬은 창검류 등 단병을 지닌 두 개의 진으로 기병이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한 부대는 1정병 4기병, 즉 5진 3첩진으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왜군의 조총 부대는 활과 화살의 지원을 받아서 상대를 화력으로 제압한 다음 장창과 왜검을 든 보병과 기병이 동시에 돌진하여 백병전을 전개함으로써 단병기를 이용한 단병 전술에 능하였다.227)강성문, 「조선시대 도검의 군사적 운용」, 『고문화』 60, 한국 대학 박물관 협회, 2002. 따라서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은 평지전(平地戰)에 강하였고, 활과 화살을 주무기로 한 조선군은 험한 지세를 이용한 복병전(伏兵戰)에 유리하였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문반 중심의 지배 질서가 강조된 사회였다.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무(武)에 대한 인식이 매우 미약하였다. 이러한 데에는 성리학적 질서의 확대와228)이병휴, 「현량과 연구-사류의 진퇴 및 그 배경과 관련하여-」, 『계명 사학』 1, 계명 대학교 사학회, 1967 : 『조선 전기 기호 사림파 연구』, 일조각, 1984 재수록. 함께 유자로서의 성격을229)필원(畢沅),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 권4, 송기(宋紀)4, 건덕(乾德) 4년 5월 을해조. 좀 더 중시한 데 그 요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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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순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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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이와 같은 숭문 정책의 결과 생긴 문폐(文弊)를 두고, “경상도는 풍습이 잘못된 지가 오래이다. 비록 친형제라도 천자문을 배우고 고상한 이야기를 하면 높은 자리에 앉혀 대우를 하지만, 활과 화살을 가지고 무술을 익히면 뜰에 내려가게 하여 천대한다. 그래서 변란을 당하기 전에 상주(尙州)에는 궁수가 세 명뿐이었다. 풍속이 이와 같아서야 어떻게 적병을 막겠는가.”230)『선조실록』 권54, 선조 27년 8월 경신.라고 하였고, 아울러 당시의 사회상을 두고, “조선의 유생들은 평일에 무사 보기를 이단과 같이 하고, 대접도 노비와 같이 한다.”231)『선조실록』 권39, 선조 26년 6월 경자. 고 지적하였다. 이런 무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편견 속에서 1592년(선조 25) 7월에 명나라 조승훈(祖承訓) 군대가 치른 제1차 평양성 전투는 왜군에게 대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232)조원래, 「명군의 출병과 임란 전국의 추이」, 『한국사론』 22, 국사 편찬 위원회, 1992, 116∼117쪽.

대개 임진왜란이 초반의 열세를 딛고 결국 승리한 전쟁으로 보고는 있지만,233)허선도, 「임진왜란론 ; 올바르고 새로운 인식」, 『동양학』 15, 단국 대학교 동양학 연구소, 1985. 곳곳의 국지전에서 입은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조선은 명나라 남병(南兵)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남병은 왜군을 쳐부수기에 유리한 무기 체계를 갖춘 절강병(浙江兵)234)절강병은 척계광이 절강현(浙江縣) 참장(參將)으로 있을 때 왜구(倭寇)를 소탕하기 위하여 조직한 절강 지역의 군사이다. 속오법(束伍法)에 의한 군사 편제를 채택하고, 조총(鳥銃)·등패(藤牌)·낭선(狼筅)·장창(長槍)·권법(拳法) 등 다양한 무기와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었다.으로 낭선(狼筅), 당파(鎲鈀), 화포(火砲)를 주축으로 하고 있었다. 1592년 8월에 이유징(李幼澄, 1562∼1593)이 선조에게 보고한 내용을 보면 남병은 모두 보병으로 소지한 무기가 편리하고, 왜의 총통과 화포 등을 지니고 있으며, 모습 또한 날렵하여 북병(北兵)과 같지 않다고 하였다.235)『선조실록』 권29, 선조 25년 8월 경자.

이러한 절강병의 맹활약으로 제2차 평양성 전투는 대승을 거두었다. 절강병의 승리 요건은 전법이었다. 대개 절강병은 한 대(隊)에 방패수 두 명, 낭선수 두 명, 창수 두 명, 당파수 두 명, 취사병 등 총 1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투할 때 방패수를 맨 앞에 배치하고 이어서 낭선수·창수·당파수를 두어 방패수·낭선수가 앞에서 적을 유인하면 창수가 공격하고, 당파수가 뒤를 엄호하다가 필요시 공격에 가담하는 전법이었다.236)정해은, 「임진왜란기 조선이 접한 단병기와 『무예제보』의 간행」, 『군사』 51, 국방부 군사 편찬 연구소, 2004, 160쪽.

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는 먼저 화공으로 기선을 제압한 뒤 낭선수와 방패수를 운용하여 적이 돌진해 오면 낭선수를 앞으로 내보내고, 적이 움직이지 않으면 방패수를 앞으로 내보내어 효과적으로 전법을 구사하였으며,237)『병학지남연의(兵學指南演義)』 서(序). 그 뒤에 창수를 두어 공격수로 배치하였다.238)척계광(戚繼光), 『기효신서(紀效新書)』 권2, 긴요조적호령간명조관편(緊要操敵號令簡明條款篇). 이같이 화기와 단병기의 긴밀한 협조는 왜군을 제압하는 데 큰 효과를 발휘하였다. 그 결과 평양성에서는 검술과 포술이 크게 유행하였고, 짧은 기간에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왜군은 먼 거리에서 장병기인 조총을 연속 사격하여 상대를 제압한 뒤에 근접전인 백병전에서 검술로 조선군을 압도하였다. 육전에서 왜군이 거 둔 연전연승은 전술과 무기 체계에서 우위를 차지한 결과였다. 이러한 왜군의 우수성도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자 절강병의 전법과 무기 체계를 당해 낼 수 없었다. 먼 거리에서는 화포로 왜군의 조총 부대를 압도하였고, 백병전에서는 다양한 무기 체계로 왜검을 능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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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효신서』
『기효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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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보고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장기적인 양병책을 국방의 우선 과제로 삼아 명나라식의 살수(殺手)239)훈련도감의 기간병인 삼수병(포수·사수·살수) 중의 하나로 칼·창 등 단병기를 들고 싸우는 군대 조직이다.를 훈련시키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명나라 척계광(戚繼光)240)척계광(戚繼光)은 등주(登州) 출신으로 절강도사(浙江都司) 재직 시에 3,000명의 군사를 모아 격자법(擊刺法)을 비롯한 장·단병술을 연마시켜 척가군(戚家軍)을 양성하였고, 절강 병법을 개발한 장수이다. 이후 중국 남방에 극성을 부리던 왜구의 토벌에 공을 세웠다. 저서로는 『기효신서(紀效新書)』 14권, 『연병실기(練兵實紀)』 9권, 잡집(雜集) 6권 등이 있다.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의 내용을 검토하게 하고, 한교(韓嶠, 1546∼1627)를 통하여 의문점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1598년(선조 31) 10월에 우리나라 최초의 단병기 무예서인 『무예제보(武藝諸譜)』가 편찬되었다. 『무예제보』는 『기효신서』의 내용 중에서 조선의 실정에 맞는 곤방(棍棒, 棒의 음은 방(傍)이다), 등패(藤牌), 낭선, 장창(長槍), 당파, 쌍수도(雙手刀)의 6기를 선택하여 편찬한 것이다.

그 실현 방안으로 삼수병(사수·살수·포수)을 주축으로 하는 훈련도감241)조선시대에 수도의 수비를 맡아보던 군영으로 훈국(訓局)이라고도 한다. 오군영(五軍營) 가운데 가장 먼저 설치된 것으로, 임진왜란을 계기로 그 이전의 오위제(五衛制)가 붕괴되고 새로운 군사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1593년(선조 26) 유성룡(柳成龍)의 주장과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의 권유에 따라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참고로 하고, 역시 절강병(浙江兵)의 훈련법을 습득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처음에는 낙상지의 지휘 아래 절강병에게서 창·검·낭선 등의 기술을 배우게 하다가 뒤에 훈련도감을 설치하였다. 이 군대는 병사를 포수·사수·살수의 삼수병으로 분류하여 전문 기술을 가진 특수 부대를 형성한 데에 특색이 있다. 인원은 약 4,500명인데, 이들은 초기의 군대와 달리 삼수량(三手糧)에 의하여 고용된 급료병(給料兵)으로, 장기 근속병이었다. 1882년(고종 19)까지 존속하였다. 을 창설하고 척계광의 삼수병제(三手兵制) 병법에 따른 훈련을 시작하였다. 삼수병 중에서도 특히 창검을 다루는 살수의 양성에 치중하였다. 사수(射手)는 활과 화살을 주로 쓰는 병사들로 조선의 전통적인 정병이었고, 포수(砲手)도 기존 병종이었으므로 결국 새로운 병종인 살수가 주 대상이었다. 따라서 조정에서 『기효신서』의 살수에 관한 기보(騎步)에 더욱 많은 관심을 두었다.242)정해은, 앞의 글, 165∼166쪽. 무과(武科)에서도 살수만은 초시를 치르지 않고 바로 전시를 볼 수 있게 하는 등 사수·포수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우대하였다. 그러다 보니 철저한 기초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살수의 무예 수준은 그만큼 낮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무예 시험에서 창검술은 자세를 잃지 않으면 입격(入格)시킬 정도로 그렇게 까다롭지 않았다. 따라서 살수의 기예에 대해서는 무신들과 항왜(降倭)들마저도 매우 부정적이었다.

본래 조선 무사의 장기가 사예(射藝)인만큼 검술을 익히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243)『선조실록』 권65, 선조 28년 7월 기축. 이에 대하여 선조는 “검술은 상고시대부터 서책과 동일하게 영웅들이 학습한 것”244)『선조실록』 권55, 선조 27년 9월 정축.이라고 하면서 무사들의 창검술 습득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창검술 시재(試才)에 국왕이 친림한 예가 많았다. 또한 선조는 검을 뽑을 때 함성을 질러서 사기를 진작시키는 방법과 적과 만날 때에 일시에 함성을 질러서 위협하는 방법을 제안하기도 하였다.245)『선조실록』 권55, 선조 27년 9월 경인. 또 선조는 살수가 오직 장창과 낭선 등의 기예만 익힐 뿐 검술을 연습하는 자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백병전을 대비하여 모든 군사들이 검술을 익히고, 시재할 때에도 검사(劍士)를 충분히 뽑도록 하였다. 당시 이러한 현실을 훈련도감에서도 인정하고 있었다.

결국 이런 현실은 『기효신서』의 제도를 도입해 놓고도 이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살수에 응모하는 지원자가 거의 없었고, 또한 살수를 비웃는 여론 때문에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살수 훈련을 시작한 지 3년 이상이 지났지만 성과는 미미하였다. 이에 따라 전세가 위급한 순간에 짧은 무기로 접전하는 데는 검술만한 것이 없음을 알고 포수와 사수에게도 검술 훈련을 하도록 하였다. 그 훈련 편제 방식은 속오법(束伍法)이었다.

속오법은 『기효신서』의 절강 병법을 토대로 한 속오분군법(束伍分軍法)에 따라 편성한 속오군의 편제 방법으로 임진왜란 때 지방에서 동원된 장정들을 그 지방에서 사(司)·초(哨)·기(旗)·대(隊)·오(伍)로 편성하고, 이를 각각 3∼5단위씩 묶어서 군대 편제에 편입시킨 동원 군사 체제이다.246)장필기, 「17세기 전반기 속오군의 성격과 위상」, 『사학 연구』 42, 한국 사학회, 1990.

속오법의 적용은 1593년(선조 26) 10월부터 조직되기 시작한 훈련도감 과 1594년(선조 27) 3월의 금군(禁軍) 편제를 시작으로 이후 모든 군대는 삼수(三手) 기예를 바탕으로 속오법에 의하여 재편 또는 설치되었다.

한편, 1595년(선조 28) 7월부터 임진왜란으로 여진족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해지자 이 틈을 타서 여진족들의 통합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여러 대책이 강구되면서 다양한 전투 경험은 물론 기존의 제승방략적(制勝方略的) 진법에 대한 반성과 함께 진관 체제(鎭管體制)의 복구론이 크게 부각되었다.247)허선도, 「진관 체제 복구론 연구-유성룡의 군정 개혁의 기본 시책-」, 『국민 대학 논문집』, 국민 대학, 1974, 4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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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학지남(兵學指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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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 체제의 복원과 『기효신서』에 대한 검토는 우리 실정에 맞는 병법 체계의 구축을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대안의 하나로 『연병실기(練兵實紀)』가 제시되었다. 그러나 산간의 좁은 지형이 많은 조선에서 평야 위주의 중국처럼 전차를 이용한 전술을 적용하기는 곤란하였다. 이에 최종적으로 진법 체제를 근간으로 하여 중국의 제도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정리하였다. 진법과 『기효신서』의 절충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대외적 변화에 대해 조선이 취할 수 있는 차선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248)강성문, 앞의 글.

한편, 왜군의 주력 무기인 조총과 단병기인 검은 조선의 무기 체계에 변화를 일으키는 주요인이 되었고, 17세기 이후 조선 조정이 조선식 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도록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무기 소지에 대한 통계치를 보면 조총은 창이나 검에 비해 숫자가 많지 않았다.249)사쯔마(薩摩島津)의 경우 왜군 1만 5000명 가운데 조총병은 1,500명으로 전체의 10%를(노영구, 『조선 후기 병서와 전법의 연구』, 서울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02, 43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한 조선 연안의 조총병은 전체 군사 대비 약 4∼5%를 유지하도록 한 것으로(舊參謀本部 編, 『朝鮮の役-日本の戰史 5-』, 德間書店, 1965, 95쪽) 나타나고 있다. 정탁(鄭琢, 1526∼1605)도 이를 두고, “조총은 검에 비하여 다소 적은 편으로 검을 가진 자가 천이나 백 단위라면 조총을 가진 자는 수십에 지나지 않는다.”250)정탁(鄭琢), 『용만견문록(龍灣見聞錄)』, 「여호상공서(與胡相公書)」, 『한국 사료 총서』 36, 국사 편찬 위원회, 1993, 361쪽.고 하 였다. 비록 조총을 소지한 비중이 이러하였으나 전쟁에서의 효력은 대단하여 오히려 왜군의 단병기인 창검이 보조적인 무기 같았다.

그러나 왜군의 창검이 가진 살상력은 이미 임진왜란 이전부터 명나라 군대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이에 대비하여 절강 병법이 개발되었던 것이다. 척계광은 『기효신서』에서 왜적은 “창검을 잘 갈고 닦아 햇빛에 번쩍거리게 함으로써 병사의 이목을 빼앗기 때문에 아군이 오래 기다리는 동안 쉽게 겁을 먹는다.”251)척계광, 『기효신서』, 총서(總敍).고 할 정도였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창검술은 조선군뿐만 아니라 명나라 군대에도 위협적이어서, 유성룡은 “적병(왜군)은 보병으로서 칼이 모두 서너 자나 되는 예리하기 비길 데 없는 것이었다. 이들과 충돌해 싸우는데 적병이 긴 칼을 좌우로 휘둘러 치니 사람과 말이 모두 쓰러져서 감히 그들의 날카로운 기세를 대적할 수 없었다.”252)유성룡, 『징비록(懲毖錄)』 권2.고 하여 이후 조선은 이러한 전쟁의 쓰라린 경험을 토대로 실전에 강한 무예와 무기 개발에 저극 나섰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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