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4장 부흥의 초석, 조선 후기의 무예와 무기
  • 2. 우리 무기는 우리식에 맞게
  • 잠자던 무기의 부활
  • 16∼17세기의 무기 개발
장필기

17세기는 총포를 비롯한 무기 제작이 눈에 띠게 발전하는 시기이다. 이때 무기 제작 기술이 발전하게 된 원인은 임진왜란과 두 차례에 걸친 호 란을 겪으면서 국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조총, 대포, 자모포(子母砲), 파진포(破陣砲), 지뢰포(地雷砲) 같은 무기가 제작되었고 성능도 매우 좋아졌다. 1622년(광해군 14)만 하여도 조총 900여 정, 화포 90문, 불화살 1,900개가 생산되었는데 모두 정밀하고 질이 좋았다. 또한 1652년(효종 3)에는 동으로 여러 가지 형의 포 107문을 만들었다. 그 중 현자포(玄字砲) 같은 것은 성능이 매우 뛰어나 사거리가 무려 2,000보나 되었으며, 이때 함께 만든 황자포(黃字砲)도 사거리가 1,900보에 이르렀다.259)『승정원일기』 21책, 인조 6년 5월 26일.

이렇게 총포 제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자 군사 요충지에는 적지 않은 총포를 비치할 수 있었다. 1664년(현종 5) 강화도에 비치되었던 총포와 기타 무기는 표 ‘1664년 강화도 비치 무기류’와 같다. 이때 강화도에 비치되어 있던 무기는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 전부 없어졌던 것을 다시 마련한 것으로 당시 화약, 총포 제작 기술이 비교적 빨리 발전하여 많은 양의 무기를 생산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표> 1664년 강화도 비치 무기류
재래식 무기
종류 수량
517장
장전(長箭) 4,530부
편전 7,377부
쇠갑옷 52부
화약 무기
종류 수량
조총 674정
납 탄환 87만 2,400개
진천뢰 140문
대완구 65문
대포
중포 30문
소완구
호준포 37문
화약 2만 6,892근
유황 7,572근
염초 7,116근
✽『조선 기술 발전사』 5 리조 후기 편, 백산 자료원, 1997 참조.

17세기 무기 생산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은 조총의 제작 기술이다. 조총은 당시 군인들의 무장을 강화하는 데 중요하였기 때문에 질을 높이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청나라에서도 조선의 조총을 구해 가려고 여러 차례에 걸쳐 기술자들을 요청하기까지 하였다.260)『승정원일기』 6책, 인조 3년 6월 11일. 이때 군기시(軍器寺)에서 만든 조총의 품질이 좋지 않자 청나라 사신에게 줄 수 없다 하고 훈련도감과 병기도감에서 만든 양질의 조총을 뽑아 주었다.

그러면 17세기에 개발된 무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임진왜란 때 조선은 항왜(降倭)를 통하여 조총의 제작 기술을 알아내고 노획한 조총을 분석하여 시험 제작하는 동시에 명나라 군대를 통하여 좀 더 발전된 화기 제조술을 배우려고 하였다.261)박재광, 「임진왜란기 조·명·일 삼국의 무기 체계와 교류」, 『군사』 51, 국방부 군사 편찬 연구소, 2004. 그 결과 마침내 조총 제조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지만 핵심 기술인 조총의 총신을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더불어 재료인 철의 부족과 재정 궁핍으로 제작 수량이 얼마 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지방의 조총 자체 조달과 상납을 적극 권장하기도 하였는데, 선조는 노획한 조총을 자주 올려 보낸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 1540∼1597)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하여 조총을 가지고 상경한 그의 아들 원사웅(元士雄, 1575?∼1597)에게 관직을 제수하기도 하였다.262)『선조실록』 권50, 선조 27년 4월 신미.

또한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1593년 9월에 일본 조총을 모방하여 우수한 성능을 지닌 조총을 제조하였고,263)이순신, 『난중일기(亂中日記)』, 선조 26년 9월 14일.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 1554∼1592)도 진주성 전투에 대비하여 170여 정의 조총을 제조하였다.264)김성일(金誠一), 『학봉선생문집(鶴奉先生文集)』 권3, 「치계진주수성승첩장(馳啓晉州守城勝捷狀)」. 또 김성일(金誠一, 1538∼1593)도 산청의 지곡사(智谷寺)에서 호남 지방에서 모은 숙련공을 동원하여 정철(正鐵)을 가지고 조총을 제조하였다.265)김성일, 『학봉선생일고(鶴奉先生逸稿)』 부록 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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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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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뒤 국방에 대한 인식의 증대와 함께 무기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1614년(광해군 6)에 설치된 화기도감(火器都監)에서 이를 전담하였다. 화기도감에서는 조총을 비롯하여 불랑기·백자총·삼안총·소승자총통 등을 제작하였는데, 16개월 남짓한 사이에 조총 900여 정, 환도 600자루, 화포 90문, 화전(火箭) 1,500개 등을 제작하였다.266)『광해군일기』 권182, 광해군 14년 10월 임진.

화기도감에서의 조총 제조는 장인들의 생산 능력을 기초로 하여 분업적 협업 형태로 진행되었다. 조총의 제조법은 크게 주조법(鑄造法)과 타조법(打造法)으로 나뉜다. 주조법은 화포류와 같은 주물 제작에 의한 것으로 주조 후 연마 작업만 하여 그 제조 양이나 제조 기간 단축에서는 유리하나, 총열이 쉽게 파열되어 장기간 사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에 비해 타조법은 총열을 연마 절삭하는 방식으로 성능이 월등하였다. 이때 항왜를 이용하였는데 두 명이 3일에 한 개의 총열을 뚫는 공정을 취하였다.267)『선조실록』 권62, 선조 28년 4월 신유.

조총 제조 공정은 대권로(大權爐)를 비롯한 권로장(權爐匠), 기장(機匠), 소장(塑匠), 야장(冶匠), 주장(注匠), 천혈장(穿穴匠), 조성장(照星匠), 두석장(豆錫匠), 목수(木手), 소목장(小木匠), 조가장(造家匠), 마조장(磨造匠), 제기장(蹄庪匠) 등의 장인들이 각각 일별 또는 월별로 생산량을 책정받았다.268)『화기도감의궤(火器都監儀軌)』, 을묘 5월 초2일 및 5월 13일.

조총의 총열 제작은 가장 까다롭고 정밀함이 요구되는 공정으로서 처음에는 두 쪽의 반 원통형 철물을 접합하는 주조 양식이었으나 뒤에 총혈(銃穴)을 직접 뚫는 타조 양식으로 바뀌어 소로장(燒爐匠)과 야장이 담당하였다.

조총은 총신이 길어야 화기가 새지 않고 탄환이 힘 있게 멀리 나갈 수 있으며, 또한 총구가 곧아야 하므로 연철(鍊鐵)을 잘 다듬어서 총열을 바르게 뚫어 막힘이 없게 해야 하였다.269)『융원필비(戎垣必備)』, 조총조(鳥銃條). 따라서 총구가 고르지 못하면 장전과 발사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방포(放砲)할 때에 총신이 긁히거나 파괴되어 방포하는 사람이 사망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었다. 이렇게 제작된 총신은 연마장(鍊磨匠)에 의하여 표면이 연마되고 이어 조성장(照星匠)이 총신의 앞뒤에 가늠쇠를 만들어 붙이고, 두석장이 용두(龍頭)와 받침 등을 제작하여 부착하였다. 더불어 이약통장(耳藥筒匠)이 화문(火門)과 화문 덮개를 제작하면 총신 제작 공정이 일단 마무리된다. 여기에 총신을 지지해 주는 총가(銃架)를 제작하는데, 목수가 재목을 다듬고, 조가장이 총가를 만들고, 장가장(粧家匠)이 장식하며, 이어 찬혈장(鑽穴匠)이 총신과 접합시킬 홈을 파고, 취색장(取色匠)과 기화장(起畵匠), 칠장(漆匠)이 각각 광택과 문양을 놓아 옻칠을 하는 것으로 조총 제작의 모든 공정이 끝나게 된다.270)『한국 무기 발달사』, 국방부 전사 편찬 위원회, 1994, 678∼680쪽 참조.

이렇듯 조총의 제작 과정은 총신 타조(銃身打造) → 주련 작업(注鍊作業) → 천혈 작업(穿穴作業) → 부착물 부착 → 총신 연마 → 장가 부착(粧家附着) 등으로 세분화·전문화되어 있었다.271)이왕무, 「조선 후기 조총 제조에 관한 연구」, 『경기 사론』 2, 경기 대학교 사학회, 1998.

이렇게 제조된 조총의 가격은 때에 따라 다르지만 『만기요람(萬機要 覽)』에는 미(米) 2석(石) 10두(斗) 정도라고 하였다.272)『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財用編) 1, 균상진삼청십칠공(均常賑三廳十七貢) 해서총약환계(海西銃藥丸契). 참고로 인조 당시 왜(倭)를 통하여 수입된 조총의 가격은 미(米) 1석 2두, 또는 무명(木) 10필(疋)이었다.273)『인조실록』 권16, 인조 5년 5월 병인 ; 『승정원일기』 10책, 인조 3년 11월 10일.

17세기 이후 조총 제조 기술은 꾸준히 발전되어 인조 연간에 이르러서는 국내에서 생산된 조총이 일본 것보다 훨씬 더 우수하다는 자신감까지 표명하게 되었고, 수량도 1642년(인조 20)에는 1,500∼1,600정까지 늘어나 주력 무기로 사용되었다.274)『인조실록』 권43, 인조 20년 3월 임오.

조선 전선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거북선에 관한 기록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나오고 있다. 1413년(태종 13)에 “국왕이 임진도(臨津渡)를 지나다가 거북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275)『태종실록』 권25, 태종 13년 2월 계사.고 하고,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이 올린 상소 중 병비(兵備)에 대한 내용에 “거북선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히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276)『태종실록』 권30, 태종 15년 7월 을미. 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미 조선 초기에 거북선에 대한 구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거북선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이 만든 철갑을 입힌 전선이다.

1591년(선조 24) 2월 이순신이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을 때 수군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함선들은 거의 쓸 수 없었고 그나마 수적으로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이순신은 수군을 강화하고자 온갖 지혜와 기술을 동원하여 배 위에는 뾰족한 송곳을 세운 철갑을 씌우고 여러 문의 화포를 장착하여 강력한 전함을 만들었다.

거북선이 해전에 처음 참가한 것은 1592년(선조 25) 5월 29일이며 이때부터 거북선은 여러 전투에서 종횡무진 활약하였다. “왜적들이 말하기를, 조선의 전선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날아가는 용처럼 빠르고 아무리 접근해도 기어오르기가 힘들며 대포도 역시 무서워 보이니 수군전이 매우 어렵다.”277)『선조실록』 권120, 선조 32년 12월 경자.고 하듯 적함들이 부딪치기만 하면 파손되지 않는 일이 없을 정도였 다 한다.278)『선조실록』 권82, 선조 9년 11월 기해.

이순신이 만든 거북선은 화포와 같은 무거운 짐들을 싣고도 풍랑에 견딜 수 있는 구조와 전복을 방지하기 위한 효능을 높이도록 설계되었다. 거북선에는 좌수영식(左水營式)과 통제영식(統制營式)의 두 가지가 있다.279)『조선 기술 발전사 』 5 리조 후기 편, 백산 자료원, 1997. 좌수영식은 전라 좌수영에서 만든 것이고 통제영식은 충청·전라·경상도의 삼도 통제사가 통제영에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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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수영식 거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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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영식 거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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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개발한 화포는 각종 총통을 비롯하여 완구(碗口), 질려포(蒺藜砲), 발화(發火)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화포 기술은 이미 일본을 능가하고 있었다. 일본은 조총만 있었지 화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본은 1543년 포르투갈에서 조총을 받아들였다. 조총을 수입하여 기술은 알게 되었으나 임진왜란이 시작될 때까지만 하여도 화포 기술은 지니지 못하였다.

이에 비하여 조선은 이미 거북선에 실을 각종 화약 무기를 개발한 상태였다. 『이충무공전서』에 의하면 거북선에는 천자총통(天字銃筒), 지자총통(地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 황자총통(黃字銃筒), 대승자총통(大勝字銃筒), 소승자총통(小勝字銃筒), 질려포, 대완구(大碗口), 중완구(中碗口), 대발화(大發火) 등과 함께 장편전(長片箭), 철탄환(鐵彈丸), 피령전(皮翎箭), 대장 군전(大將軍箭), 장군전(將軍箭) 등의 탄을 실었다고 하였다.280)『조선 기술 발전사 』 5 리조 후기 편, 백산 자료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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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화포
각종 화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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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통은 천자문의 글자 순서로 이름을 붙이는데, 크기에 따라 천(天)·지(地)·현(玄)·황(黃)의 순으로 정하였다. 천자총통은 당시 조선에서 제일 큰 화포로 화약을 잰 다음 돌탄을 넣어 발사하여 적의 함선을 격파하는 데 쓰이는 강력한 무기였다.

완구는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또는 둥근 돌탄을 입에 재었다가 곡사(曲射)로 발사하는 중화기의 하나이다. 특히 대완구는 적선을 격파하는 강력한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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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격진천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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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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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려포는 통 속에 마름쇠를 가득 넣은 것으로 폭발과 함께 파편을 날려 적을 소멸하기 위한 무기이며, 발화는 원통형의 두꺼운 종이통 속에 흑색 화약이 들어 있는 분사 추진 무기이다. 크기에 따라 대발화, 중발화, 소발화 등으로 나뉘는데 분사 추진 무기인 신기전, 질려포에서 분사 추진용 약통으로 쓰기도 하고, 봉수대(烽燧臺)에서 군사 통신 수단으로 쓰기도 하였다. 거북선에 대발화를 실어 적선을 불사르는 데 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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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려포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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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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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랑기(佛狼機)는 1597년(선조 30)에 처음으로 제작하여 시험 발사를 하였다.281)유성룡, 『징비록』 권14. 불랑기는 모포(母砲)와 자포(子砲)가 분리되어 있다. 모포는 포신(砲身)을 가진 어미 포를 말하며, 자포는 장약을 장전하는 아들 포를 말한다. 불랑기는 자포 안에 포탄을 장전한 상태로, 자포를 모포에 결합시키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포마다 자포가 다섯 개씩 배당되었기 때문에 발사할 때마다 그것을 바꿔가면서 장전할 수 있어서 발사한 다음 금방 재발사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장전 시간을 절약할 수는 있으나, 자포와 모포의 규격이 정밀하지 않으면 폭발할 위험성도 있다. 불랑기는 포신 뒤쪽에 장약실(裝藥室)이 있는데 여기에 장약을 설치하여 발사한다. 또한 가늠자로 조준 사격을 할 수 있는 발전된 형식의 중무기이다.

불랑기는 15세기 유럽에서 중국을 통하여 들어오면서 불랑기로 불리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조선식 자모포를 만들어 썼는데, 포르투갈의 불랑기에 비하면 조선의 것은 길이와 무게가 일반적으로 작았다. 이는 바로 실정에 맞게 조선식으로 변형하여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대형 화전은 성곽 공방전과 수군전에서 주로 부피가 크고 쉽게 불붙지 않는 목표를 불태우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흑색 화약이 많이 재어져 있는 분사 추진 무기이다. 대형 화전은 발사 장치에 재었다가 자체의 분사 추진력으로 비행한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 많이 썼는데,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화전이 대형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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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랑기 4호
불랑기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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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이라는 이름을 가진 천자총통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한꺼번에 둥근 모양의 많은 탄알을 넣어 사격함으로써 적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직사포이다. 사거리가 일반 포보다 훨씬 짧기 때문에 위력은 약하다. 이 포의 사거리가 짧은 것은 탄환이 포신을 빠져나오기 전에 포신 내부 압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282)『조선 기술 발전사 』 5 리조 후기 편, 백산 자료원, 1997. 따라서 이 포는 많이 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복잡한 형태의 이 같은 포신을 만들어 냈다는 것은 분명 기술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화포, 조총 등 총포를 많이 생산하게 되면서 화약의 개발 또한 중시되었다. 무엇보다도 흑색 화약의 원료인 유황, 염초 등을 많이 만들어야 하였다. 유황은 17세기 중엽 이래 국내에서 많이 해결되었고, 염초 생산 방법도 오래 전부터 보급되고 있었다. 그러나 화약의 생산량과 질을 높이는 문제는 고심거리였다.283)『승정원일기』 122책, 효종 2년 11월 23일조에 의하면 1630∼1631년에 이서가 군기시의 제조였을 때 염초를 생산하였는데 1년 동안 1만여 근이나 생산하였다고 한다.

『신전자취염초방(新傳煮取焰硝方)』에 보면 새로운 염초 제조법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우선 흙을 얻어내는 취토법(取土法)에는 가마 밑의 흙, 마룻바닥 흙, 담벼락 밑의 흙, 구들골 흙을 모으는데, 그 흙 맛이 짠 것, 신 것, 단 것 또는 쓴 것이 좋다고 하였다. 얻은 흙과 미리 준비한 재·오줌을 섞어 잘 화합한다. 이는 오줌 속에 있는 질산암모늄과 재 속에 있는 탄산칼륨을 반응시키는 공정이다. 또한 증백(增白)이라고 하여 화합된 흙 위에 말똥을 덮어 놓고 그것이 마른 다음 말똥에 불을 붙이는데, 이것은 탄산칼륨과 질산암모늄의 화학반응을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된 흙을 나무통 속에 골고루 편 다음 물을 붓고 여기서 나오는 물을 가마에 받아서 세 번 달 이면 염초가 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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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화약
조선시대 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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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말에는 김지남(金指南, 1654∼?)이 새로운 염초 제조법을 연구하였다. 염초를 생산할 때 땔감인 장작 대신 1년생 잡초를 쓰면 노력이 절약되고 생산되는 염초의 질도 좋아진다는 것을 발견하였다.284)『승정원일기』 378책, 숙종 24년 4월 25일조.

1698년(숙종 24)에 김지남이 저술한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에 염초 생산 공정을 취토(取土, 흙 모음), 취회(取灰, 재받기), 교합(交合, 섞음), 사수(蒒水, 채기), 열수(熱水, 달임), 재련(再煉), 삼련(三煉), 애초(艾硝), 교수(膠水), 합제(合製) 등의 공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취토란 질산암모늄이 많이 포함된 흙을 얻는 방법이다. 흙은 담 밑에 있는 것으로, 낮에는 태양 광선을 받고 밤에는 습기를 받는 검붉은 것이 가장 좋고, 쓴 것, 단 것 또는 신 것이 좋고, 짠 맛이 나는 것은 습기를 받기 때문에 취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신전자취염초방』의 방법과 약간 차이가 있다.

취회란 탄산칼륨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재를 얻는 방법이다. 여기에 쓰인 원료로는 다북쑥의 재와 짚을 태운 재가 제일 좋고, 잡초와 잡목을 태운 재가 그 다음에 좋고, 소나무재는 쓰지 못한다고 하였다.

교합은 이상과 같이 얻어낸 흙과 재를 열 말씩 혼합한 다음 물과 함께 가마에 넣고 끓이는 것이다. 이때 점성이 강한 흙인 경우에는 재를 한 말쯤 더 넣으며, 모래가 많이 섞인 경우에는 재를 한 말 덜어 낸다.

사수라는 말의 ‘사’는 재라는 뜻이다. 우선 독 밑에 구멍을 뚫고 독 안에 각재 네 개를 우물 정자형으로 놓는다. 그 위에 발을 깔고 발 위에 교합한 것을 편 뒤에 물을 부어 독 밑으로 나오는 물을 받는다. 받은 물을 가마로 끓이는 것을 열수라고 하였다. 이 책에는 물을 끓일 때 불을 때는 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상이 염초 생산의 기본 공정인데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두세 번 끓여야 하였다. 그리고 애초란 재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잡초, 볏짚, 다북쑥 등을 채취하는 방법을 말하고, 교수란 염초를 달일 때 아교를 첨가하는 방법인데 아교는 방습제로 넣었다. 합제란 염초와 버드나무 재, 유황을 보드랍게 가루로 낸 뒤 염초, 버드나무 재, 유황을 일정 비율로 섞어서 쌀 씻어낸 뜨물로 반죽을 하며 방아로 찧어서 화약을 만드는 공정을 말한다.

이렇게 만든 화약의 질은 매우 좋았는데, 땅 밑에 10년간 저장하여도 습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길바닥 흙, 부엌에서 때는 나무와 풀들이 원료이기 때문에 쉽게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285)『정조실록』 권44, 정조 20년 5월 병진.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화포 기술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파진포이다. 『조선 왕조 실록』에 의하면, 파진포는 크기가 가마만 하고 무게는 100여 근이며 말 한 마리에 싣고도 얼마든지 멀리 갈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하였다.286)『광해군일기』 권59, 광해군 4년 11월 임인. 또한 적이 침입하는 길목에 많이 매설하여 승패를 결정하는 데 매우 유익하게 할 수 있다고 한 것으로287)『광해군일기』 권59, 광해군 4년 11월 임인. 보아 오늘날의 지뢰와 비슷한 화약 무기라고 할 수 있다.

1625년(인조 3)에 지뢰포를 시험 발사하였는데, 비변사에서 “홍제원(弘濟院)에 가서 지뢰포를 시험 삼아 쏘아 보니, 만든 방법이 매우 좋았습니다. 땅속에 묻은 심지가 계속해서 타들어가 터졌는데 공격과 방어에 이용한다면 반드시 큰 도움이 있을 것이다.”288)『인조실록』 권8, 인조 3년 3월 을묘. 라고 하였다. 이 지뢰포가 바로 파진포이다.

15세기 전반기에도 이와 비슷한 화초(火硝)라는 무기가 있었는데, 이것은 참대통 안에 화약을 넣어 적이 지나가는 길목에 숨겨 놓고 도화선에 불을 붙여 폭발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이 더 발전한 것이 파진포라고 할 수 있다. 파진포는 밟으면 아륜철(牙輪鐵)과 돌이 서로 마찰하여 불이 일어나고 화약이 폭발하도록 되어 있다.

화약 무기 개발과 더불어 용호차(龍虎車), 수차(水車), 병거(兵車) 등 각 종 수레 무기가 제작되었다. 그 중에서 병거는 17세기 후반기에 윤휴(尹鑴, 1617∼1680)가 개발하였다.

화차는 두 바퀴가 달린 수레 무기로서 몸체의 복판에 널빤지로 다섯 층의 시렁을 맨 다음 각 시렁판자에 뚫은 10개의 구멍마다 조총 한 자루씩을 배치하고 그 끝에 쇠 화살촉을 붙인 나무 화전을 매어 불을 붙이면 50개의 조총을 차례로 발사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화차를 처음 만든 때는 1409년(태종 9)이다. 이때의 화차는 동으로 만든 여러 개의 통을 싣고 화약의 힘으로 수십 개의 철령전(鐵翎箭)을 쏠 수 있게 한 수레였다. 그 후 1450년(문종 즉위년)에는 25명의 호위 편대와 7명의 총통군이 총통을 발사하도록 한 화차가, 1451년(문종 1)에는 100개의 신기전을 실을 수 있는 화차가 개발되었다가 1592년(선조 25) 9월에 새로 완성한 화차에 승자총통 15개를 싣게 되었다. 이러한 화차 300대를 가지고 1593년(선조 26) 2월 권율(權慄, 1537∼1599) 부대가 행주산성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화차는 15세기 초에 발명된 후 끊임없이 구조를 개선하고 장비를 보완하여 17세기 이후 기동 화력 무기로 발전하였다.289)『조선 기술 발전사』 5 리조 후기 편, 백산 자료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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