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5장 국권 수호에 나선 무기와 무예
  • 1. 무기의 재발견
  • 혼란스런 국내, ‘홍경래의 난’
강신엽

19세기를 전후한 서북민 일반의 반봉건적 저항은 중앙 권력의 대리자인 수령권(守令權)에 대항하여 일어났으며, 이는 1811년(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에서 농민들의 거센 항쟁으로 집약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10년여의 오랜 기간 동안 준비되었다. 그러나 봉기를 구체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때는 1810년(순조 10) 11월 무렵이었으며, 12월에 가산(嘉山) 다복동(多福洞)에서 거병하여 곽산·정주·박천·태천·선천·구성·철산·용천 등을 점령하고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듬해 4월 관군은 정주성을 폭파할 목적으로 굴을 파고 인근 광산의 화약 기술자를 동원해서 1,800근의 화약을 그 속에 채우고 불을 붙임으로써 성의 북쪽을 폭파시킨 후 성내로 진입하여 홍경래군을 진압하였다. 홍경래는 총에 맞아 전사하였고, 홍총각(洪總角)·김이대(金履大)·윤언섭(尹彦涉)·양시위(楊時緯) 등은 사로잡혔다. 우군칙(禹君則)·이희저(李禧著)·최이륜(崔爾崙) 등은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고 처형당하였다. 이때 체포된 사람은 모두 2,983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10세 이하 소년 224명과 여 자 842명을 제외한 1,917명은 23일에 모두 참수되었다.362)『순조실록』 권15, 순조 12년 4월 기사. 이렇듯 홍경래의 난은 1811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5개월에 걸쳐 진행되었던 것이다.

홍경래의 난은 봉건 사회 내에서 새롭게 성장한 신흥 상공업 세력과 기존 정치권력에서 배제된 몰락 양반이 연합하여 추진한 반봉건 투쟁이었다. 그러나 봉건적 사회 모순을 극복하려는 진보적 사회 이념을 제시하지 못한 채, 항쟁의 우선 목표를 봉건 권력의 교체에 둔 한계도 갖고 있었다.363)국사 편찬 위원회, 『한국사』 36 조선 후기 민중 사회의 성장, 탐구당, 1997, 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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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성공함작전도(定州城攻陷作戰圖)
정주성공함작전도(定州城攻陷作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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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하더라도 홍경래의 난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봉건제의 위기가 점차 심화되는 가운데 봉건 정부 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5개월 동안 항쟁을 지속함으로써 봉건 권력의 도덕성을 근저에서부터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그 후 반봉건 항쟁의 도화선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또한 핵심 주체 세력의 역량이 당시 지배 체제의 외부에서 자라나고 있었다는 점도 사회 변화의 보편적 양상이 항쟁의 구도에 반영되고 있는 증거이며, 아울러 체제 내부의 갈등이 아니라 체제 변혁의 시발점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364)오수창, 「홍경래 난, 봉기군의 최고 지휘부」, 『국사관 논총』 46, 국사 편찬 위원회, 1993, 260쪽.

당시에 사용한 무기로는 조총(鳥銃), 삼혈총(三穴銃), 호준포(虎蹲砲), 대완구(大碗口), 완구(碗口), 백자총(百子銃), 천(天)·지(地)·현자총(玄字銃), 불랑기(佛狼機), 대장군전(大將軍箭), 석류화전(石硫火箭), 창(槍), 윤제(輪梯), 각종 궁시류 및 탄환류 등이었다.365)방우정, 『서정일기(西征日記)』 임신 2월. 이러한 무기 가운데는 조선에서 자체적 으로 개발하여 사용한 무기도 있으며,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하여 그대로 활용하거나 조선의 현실을 감안하여 개량한 무기도 있었다.366)조선의 무기에 대한 설명으로는 다음과 같은 논문이 참고된다. 유승주, 「조선 후기 총포류 연구」, 『군사』 33, 국방 군사 연구소, 1996. 12. ; 박재광, 「임진왜란기 조·명·일 삼국의 무기 체계와 교류-화약 병기를 중심으로-」, 『군사』 51, 군사 편찬 연구소, 2004. 4. 이 중에서 몇 가지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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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준포
호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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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은 조선에서 사용한 외래의 총 중에서 가장 중요한 휴대용 소화기였다. 크기·형태·재료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었다. 삼혈총은 삼안총(三眼銃)이라고도 하며, 세 개의 통신(筒身)을 세모꼴로 연결한 무기이다. 명나라 군대가 전해 준 이후 조총 다음으로 가장 긴요한 전투 무기였을 뿐만 아니라 신호용으로도 많이 활용하였다. 호준포는 임진왜란 중에 명나라 군대가 가져온 총포류 중의 하나로, 불랑기와 함께 위력을 발휘한 무기였다. 포의 이름은 설치한 포의 모양이 ‘범이 쭈그리고 앉은(虎蹲)’ 형상과 비슷한 데서 나왔다. 백자총은 대·중·소의 종류가 있었으며, 다수의 탄환을 한 번에 발사할 수 있었다. 이것은 1594년(선조 27)경부터 대량 생산하여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이후 왜의 침입에 대비해서도 활용하였다. 불랑기도 임진왜란 중에 명나라 군대가 가져온 총포류 중의 하나로, 평양성의 탈환전에서 위력을 발휘하였으며, 이후 육전과 해전에서 사용하는 필수적인 무기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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