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5장 국권 수호에 나선 무기와 무예
  • 2. 병서의 재발견
  • 『훈국신조군기도설』과 『훈국신조기계도설』
  • 『훈국신조군기도설』
강신엽

『훈국신조군기도설』393)『훈국신조군기도설』의 참고 서적은 다음과 같다. 연갑수, 「대원군 집권기 무기 개발과 외국 기술 도입-『훈국신조군기도설』과 『훈국신조기계도설』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학예지』 9(화약 병기 특집), 육군 박물관, 2002. ; 강신엽 역주, 『조선의 무기 Ⅰ』(훈국신조군기도설·훈국신조기계도설), 봉명, 2004.(이하 『군기』로 약칭)은 현재 육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필사본이 유일본이다.394)육군 박물관 소장 『훈국신조군기도설』은 1869년(고종 6)경에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군기』의 내제(內題)는 ‘융원필비도설(戎垣必備圖說)’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내용을 상당 부분 전재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크기는 각각 20.0×30.0㎝이고 분량은 61장이다. ‘군기(軍器)’는 ‘기계(器械)’와 마찬가지로 무기의 별칭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군기』의 전반부에는 ‘순조계유대장박종경조(純祖癸酉大將朴宗慶造)’라는 명목으로 각종 총통, 완구, 단석 등이 소개되어 있는데, 내용은 『융원필비』의 것을 거의 그대로 전재하였다. 앞에서 『융원필비』395)『융원필비』는 1813년(순조 13) 훈련대장 박종경이 간행한 병서로서 1권 1책이다.의 자세한 내용은 앞에서 상술하였으므로 여기서는 『군기』와 관련해서만 서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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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국신조군기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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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원필비』는 화기류, 봉인류, 진류로 구성되어 있는데, 『군기』에서는 진류를 제외한 화기류와 봉인류에 실려 있는 무기의 대부분을 원래의 순서대로 전재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표 ‘『융원필비』와 『훈국신조군기도설』 수록 무기 비교’와 같다.

『군기』에 재수록된 무기는 『융원필비』에 소개된 무기 중에서 주로 화기류였고, 봉인류 중에서는 일부만을 소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융원필비』가 원래 조선 후기의 화기에 관한 대표적인 저술로 평가받는데, 『군기』에서는 그 중에서 다시 화약 무기 위주로 선별하여 수록하였다고 볼 수 있다. 『군기』에 인용된 봉인류를 보더라도 이화창, 화창, 소일와봉 등은 화염 분사통이 달린 창이며, 신기만승화룡도는 연탄(鉛彈) 발사 화통이 달린 두 개의 가지가 달린 창으로서 변형된 화약 무기였다. 결국 『군기』에 인용된 무기 중 화약과 관계없는 것은 환자창∼아항창의 일곱 종의 창모도검(槍矛刀劍)이었고, 이것은 모두 간단한 도설로만 처리되었다. 이처럼 의식적으로 화약 무기를 선별한 것은 병인양요를 거치면서 재래식 무기의 한계와 화약 무기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표> 『융원필비』와 『훈국신조군기도설』·『해국도지』 수록 무기 비교
구분 융원필비 훈국신조군기도설 해국도지
서문류 서문 -  
기계총론 -  
화기류 천자총통 천자총통  
지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황자총통  
별대완구 별대완구  
대완구 대완구  
중완구 중완구  
대장군전 대장군전  
장군전 장군전  
차대전 차대전  
피령전 피령전  
동거 동거  
비진천뢰 비진천뢰  
단석 단석  
수철연의환(부 연환) 수철연의환(부 연환)  
조총 -  
비몽포 비몽포  
찬혈비사신무통 찬혈비사신무통  
매화(부 주화) -  
목통 -  
화룡권지비거 목화수거  
화거 화거  
봉인류 이화창 이화창  
화창 화창  
소일와봉 소일와봉  
신기만승화룡도 신기만승화룡도  
환도 환도  
환자창 환자창  
도도 도도  
삼릉창 삼릉창  
무차 무차  
용도창 용도창  
사모 사모  
아항창 아항창  
마병창 -  
편곤 -  
간각칠궁 -  
장전(부 통아·편전) -  
갑주 -  
장패 -  
진류 화거첩진도 -  
화거방진도 -  
- 공선수뢰
- 마반포거
- 쌍포양륜거 ○(사망포거)

『군기』에서는 『융원필비』에 수록되어 있는 조총, 매화, 목통이 제외되었다. 조총은 이미 보편화된 무기라서 설명할 필요가 없고, 매화·목통은 제약 사항이 많아서 실전에 사용할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생략한 듯하다.

『융원필비』에서 전재한 무기에 대한 도설이 끝나면 『군기』에는 수뢰포, 마반포거(磨盤礮車), 쌍포합이(雙砲合耳)에 대한 도설이 등장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신헌396)신헌은 1810년(순조 10)부터 1888년(고종 25)까지 무신·외교가로 활동한 인물로서 신관호(申觀浩)로도 불렸다. 그의 본관은 평산, 자는 국빈(國賓), 호는 위당(威堂), 시호는 장숙(壯肅)이다. 그는 금위영 대장, 어영대장, 통제사, 형조·병조·공조 판서 등을 지냈다. 그는 1866년 총융사(摠戎使)로 병인양요 때 강화의 염창(鹽倉)을 수비하였고, 난이 끝난 후 좌참찬·훈련대장을 지내고 수뢰포를 제작하여 가자되었다. 그는 1874년(고종 11)에는 진무사(鎭撫使)가 되어 강화도 연안에 포대(砲臺)를 구축하였다. 1875년 운요호(雲揚號) 사건이 일어나자 이듬해 판중추부사로서 전권 대관(全權大官)이 되어 일본의 전권 판리 대신(全權辨理大臣)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강화에서 강화도 조약을, 1882년 경리통리기무아문사로 전권 대관이 되어 미국의 슈펠트(Shufeldt)와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각각 체결하고, 같은 해에 판삼군부사가 되었다. 글씨에 능하여 예서를 잘 썼으며, 문장이 뛰어났고 묵란을 잘 그렸다.이 제작한 것이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주목받았던 것은 수뢰포였다. 수뢰포는 물속에서 작동하는 일종의 시한폭탄이라고 할 수 있다. 1867년(고종 4)에 제작된 수뢰포의 용도는 바다에 나아가 적선을 격침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하(內河)로 침입하는 적선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기술 수준으로 수뢰포를 제조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동화모(銅火帽) 즉 뇌관은 조선 자체 기술로 제작할 수 없어서 청나라에서 수입하여 이용하였다. 동화모 제조 기술의 도입은 흥선 대원군 정권이 몰락한 이후 고종이 영선사(領選使)를 청나라에 파견하는 1880년대에 가서야 추진되었다.

1868년(고종 5)에는 『해국도지』에 소개된 것을 모방하여 마반포거와 쌍포양륜거를 제작하였다. 이것은 당시 기술로 보아 대형 화포를 발명하여 새로운 화포를 좀 더 잘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포차를 제조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제작되어 있는 조선의 중소형 화포의 운영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397)『해국도지』에서는 1,000근 이상의 대형 화포는 마반포거를 이용하고 1,000근 이하의 중소형 화포는 사망포거를 이용하기 위하여 제작하였던 것과는 달리 신헌은 화포의 무게보다는 화포의 개수를 중심으로 구별하여 제작하였던 듯하다.

이처럼 새로운 대형 화포를 제조하기보다는 조선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중소형 화포에 대한 활용도를 높이는 것이 병인양요 이후의 무기 제조의 기본 방향이었기 때문에 『해국도지』에 보이는 활거교가(滑車絞架)는 제작하지 않고, 거중기만 제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에 참전하였던 미군의 수기(手記)를 보면 당시 조선군의 주력 화포는 여전히 불랑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염하(鹽河)의 양안(兩岸)에서 비 오듯이 포탄이 쏟아졌지만 정작 미국 군함을 명중시키거나 위력적이지는 못하였던 듯하다. 이것은 프랑스군이 강화부를 거의 무혈로 점령하도록 초기 전투에서 무기력하였던 병인양요 때와는 달리 흥선 대원군 정권이 서양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꾸준히 군비를 확장하기는 하였으나 수준은 아직 낮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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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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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흥선 대원군 정권은 신미양요를 계기로 병인양요 이후 제조하였던 무기 기술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군비 증강에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게 되었다. 그 방향은 불랑기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형태의 화포 그리고 대형 화포의 제작이었다.

그 결과 현재 육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운현궁별주(雲峴宮別鑄)’라는 명문이 남아 있는 소포·중포 등과 같은 뛰어난 주물 기술을 보여 주는 화포가 제작될 수 있었고, 그뿐만 아니라 청나라에서 수천 근이나 되는 화포를 수입한 다음 모방하여 제작하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연포도설집요』나 『증보칙극록』 같은 전문 화포 서적을 응용하기도 하였다.398)운현궁별주명문(雲峴宮別鑄銘文) 화포류(火砲類), 대형 화포의 수입 제작, 정공진 저술에 대한 이용 등에 대하여는 연갑수, 앞의 책, 199∼202쪽 참조.

이와 같이 고종 연간에 저술된 『군기』는 주로 조선의 『융원필비』와 중국의 『무비지』·『해국도지』 등의 영향을 받았다. 『군기』는 『융원필비』 내용 중에서 화기 중심의 내용을 가려 뽑아내고, 거기에 『해국도지』의 내용 중에서 제작 가능한 몇 가지 무기류를 첨가한 것이었다. 이 책의 편찬은 결국 기존 무기를 좀 더 효율적이고 집약적으로 정리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따라서 『군기』는 밀려오는 외국 세력에 대한 반침략 투쟁의 의지 를 반영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하여 신무기 개발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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