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5장 국권 수호에 나선 무기와 무예
  • 6. 독립 운동, 무기는 나의 생명
  • 조국 광복을 위하여
강신엽

서·북간도와 연해주의 한인 사회에서는 3·1 운동 발발 직후부터 거의 동시 다발적으로 항일전을 표방한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고 있었다. 수십 개의 크고 작은 군단이 독립 전쟁에 나서 활동하였다.414)독립군 부대에 대하여는 국사 편찬 위원회,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 전쟁」, 『한국사』 48 임시 정부의 수립과 독립 전쟁, 탐구당, 2001 참조 이런 왕성한 활동은 항일 독립 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였다는 데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만주와 연해주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내로 진입하여 일제 식민지 통치 기관을 습격하기도 하고 일제 군경과 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독립군의 활동 중에서도 홍범도가 이끈 대한 독립군(大韓獨立軍)의 봉오동 전투에서의 승리, 김좌진(金佐鎭)이 이끈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여러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이룩한 청산리 대첩 등은 가장 대표적인 독립 전쟁이었다.

중국에서 활약한 독립군은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투철한 정신과 고양된 사기 외에도 현실적 조건으로 군비 조달, 무기 구입, 군사 훈련 등과 같은 전력 증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특히 총기, 탄약 등의 화력 증강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만주 독립군이 사용하던 무기는 대부분 제1차 세계 대전 중 시베리아에 출병한 체코 군대에게 구입한 것이었으며, 여기에 소요된 자금은 만주와 연해주, 그리고 국내 동포가 헌납한 군자금이었다.

확대보기
홍범도
홍범도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함경도 산포수
함경도 산포수
팝업창 닫기

독립군이 보유한 무기는 실로 다양하였다. 일반 군총으로는 러시아제 5연발총과 단발총이 주종을 이루었고, 그 밖에도 미국제나 독일제, 심지어 일제까지 섞여 있었다. 권총류로는 루가식(Luger式)을 비롯해 7연발식·남부식 등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중무기로는 기관총과 속사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폭탄이라 부르던 수류탄을 구입하는 경우도 많았다. 서로군정서는 청산리 대첩 직전에 약 400명의 무기 운반 대원을 중·러 국경의 삼분구(三岔口) 방면으로 파견해 1인당 각각 총기 4정씩을 휴대하도록 하여 모두 1,600정의 총기를 반입함으로써 화력 증강을 꾀하였다. 전체적으로 독립군이 확보한 무기의 종류와 양이 구체 적으로 얼마나 되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1920년 8월경에 작성한 일제의 한 정보 기록에서는 군총 3,300정, 탄약 19만 5,300발, 권총 730정, 수류탄 1,550개, 기관총 9정 등의 화력을 독립군이 확보한 것으로 파악하였다.415)국사 편찬 위원회,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 전쟁」, 『한국사』 48 임시 정부의 수립과 독립 전쟁, 탐구당, 2001, 213쪽.

확대보기
독립군의 무기
독립군의 무기
팝업창 닫기

독립군은 화력 증강과 함께 군사 훈련에도 주력하였다. 독립군 훈련을 실시하던 대표적인 기관이 북간도의 사관 연성소(士官鍊成所)와 서간도의 신흥 무관 학교(新興武官學校)였다. 사관 연성소에서는 집총 훈련, 산악 구보와 행군 등 고난도의 군사 교련을 실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립 사상 함양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정신 교육도 병행하였다. 신흥 무관 학교에서는 보병·기병·포병·공병 등의 기본 과목과 총검술·격검·전술·편제학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으며, 넓은 연병장에서 각개 교련과 기초 훈련을 하는 등 강인한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416)독립 운동사 편찬 위원회 편, 『독립 운동사 자료집』 10, 국사 편찬 위원회, 1976, 23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