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1장 천문의 관측과 기상의 측후
  • 4. 기상 현상의 측후
  • 측우기
구만옥

강우량을 측정하는 방법은 예로부터 있어 왔다. 조선 초기에는 땅속에 스며든 빗물의 깊이를 측정하였다. 각도의 감사(監司)가 강우량을 집계하여 호조(戶曹)에 보고하면, 호조에서는 이것을 정기적으로 집계하여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강우량 측정법은 아마도 이전 시기부터 사용된 방법이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런데 이 방법은 토성(土性), 건조한 땅인가 습한 땅인가에 따라 빗물이 스며드는 깊이에 차이가 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강우량을 측정할 수 있는 좀 더 합리적인 방법이 필요하였다. 그것은 빗물을 특정한 그릇에 받아서 우량을 측정하는 방법이었다. 측우기의 발명은 바로 이러한 요구에 따라 이루어졌다. 1441년(세종 23) 8월 18일(임오)에 쇠(鐵)로 길이 2척(尺), 지름 8촌(寸)의 원통을 제작하여 대(臺) 위에 올려놓고 빗물을 받아 강우량을 측정하게 하였다. 측 우기는 서운관에 설치하고, 서운관의 관원이 자(尺)로 강우량을 측정하여 호조에 보고하였다. 지방의 각 관청에서는 서운관에 설치한 측우기의 제작 예에 따라 자기(瓷器)나 와기(瓦器)로 그것을 만들어 관청 뜰에 설치하고, 수령이 강우량을 측정하여 감사에게 보고하면 각도 감사는 호조에 전문(傳聞)하도록 하였다.35)『세종실록』 권93, 세종 23년 8월 임오.

『세종실록』에 따르면, 측우기는 당시 세자(뒤의 문종)가 고심하여 발명했다고 한다. 그것은 이른바 ‘황우(黃雨)의 변’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었다. 1441년(세종 23) 4월 26일 예조에서 정부로 누런 비(黃雨)가 내렸다는 보고가 올라왔고, 정부는 이에 근거하여 국왕에게 아뢰었다. 그런데 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다.

도성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말하기를, “황우가 밤에 내렸다.” 하므로, 신이 즉시 사람을 시켜 두루 궁정(宮庭)의 물이 괴어 있는 곳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모두 송화(松花)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을 알지 못하여 밤비(夜雨)가 그릇에 고인 것을 가져다 보니 송화가 없었습니다. 황우가 만일 하늘에서 내렸다면, 하필 땅에만 내리고 그릇에는 내리지 않았겠습니까. 또 이 물빛은 순황색(純黃色)이 아니고 송화를 섞은 것 같아서, 가져다 맛을 보니 매운 맛(辛味)이 바로 송화와 같았습니다. 또한, 사람을 시켜 송화를 가져다 물 가운데 넣었더니, 형상도 비슷하여 사람들이 분간하지 못하였습니다. 25일은 어두울 무렵부터 바람의 형세(風勢)가 점점 급해졌고 2경(更)이 되자 비도 내리기 시작하였는데, 바람은 더욱 밤새도록 불었습니다. 거센 바람이 분 나머지 송화도 반드시 날았을 것이고, 하루 동안 날린 것이 쌓였다가 비로 인해 떠오른 것이니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만일 망령되게 황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청하옵건대 의심하지 마옵소서.36)『세종실록』 권92, 세종 23년 4월 임신.

당시의 비가 정말 황우였다면 그것은 재이와 관련된 문제였고, 신하들 은 재이를 물리치기 위한 대책의 하나로 국왕의 도덕적인 수양(恐懼修省)을 요청해야 하였으며, 국왕은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거나(減尙膳), 정전을 피하고(避正殿), 죄수를 방면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취해야 하였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관습이었다. 따라서 어떤 자연 현상이 재이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안평 대군의 문제 제기는 그런 면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세종은 이와 같은 논란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측우기와 관련한 중요한 발언을 하였다.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간 푼수(分數)를 땅을 파고 보았다. 그러나 적확하게 비가 온 푼수를 알 수 없었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어서 궁중(宮中)에 두고 빗물이 그릇에 고인 푼수를 증험하였다.37)『세종실록』 권92, 세종 23년 4월 을미.

여기서 구리를 주조하여 만들었다는 그릇은 측우기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이때가 1441년(세종 23) 4월이고, 측우기를 제작하여 서운관에 설치하고 지방 관청에 제작·설치를 지시한 것은 같은 해 8월이었다. 요컨대 측우기는 1441년 8월에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 얼마 전에 이미 세자에 의해 발명되었던 것이다.

이후 측우기는 약간의 보수와 개량을 거치게 된 듯하다. 이듬해인 1442년(세종 24) 호조에서 강우량을 측정하는 일에 미진한 점이 있다고 하면서 다시금 원칙을 제정해서 올렸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측우기의 규격이 조금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1441년의 기록에 따르면 측우기의 길이는 2척, 직경은 8촌이었다. 그런데 이때 새롭게 제정된 내용에 따르면 측우기의 길이는 1척 5촌, 지름은 7촌이었다. 측우기의 규격이 조금 축소된 것이다.

다음으로 강우량 측정 방법이 좀 더 세밀하게 규정되었다. 1441년의 기록에는 서울에서는 서운관 관원이, 지방에서는 수령이 강우량을 측정하여 보고하도록 한다고만 되어 있었는데, 이때에는 보고 내용을 좀 더 상세하게 규정하였다. 강우량은 주척(周尺)으로 측정하고, 비가 내린 시각과 갠 시각(下雨雨晴日時), 그리고 정확한 강우량(水深尺寸分數)을 보고·기록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이와 같은 기록을 보존하여 후일의 참고 자료로 삼고자 하였다.38)『세종실록』 권96, 세종 24년 5월 정묘. 강우량의 과학적 측정과 기록 보존을 통해 자료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기본 원칙이 확립된 것이다.

현존하는 측우기는 1837년(헌종 3)에 만든 ‘금영 측우기(錦營測雨器)’가 유일하다. ‘금영’이란 공주에 있던 충청 감영(監營)의 다른 이름이므로 이 측우기가 공주 감영에 설치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와다 유지(和田雄治)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10년대까지도 최소한 네 개의 측우기가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그 유물을 확인할 수 없다. 금영 측우기는 와다 유지의 소유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기상청에 보관되어 있다가 1971년 한국에 반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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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 측우기
금영 측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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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에게 측우기 사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현재 기상청에 소장되어 있는 측우대(測雨臺)를 찍은 것이다. 이는 측우기를 설치했던 화강암 대석으로, 그 뒷면의 왼쪽에 “건륭 경인년 5월에 만들었다(乾隆庚寅五月造).”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제작 시점이 1770년(영조 46) 5월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 1770년 5월에 세종조의 제도를 본떠서 다시 측우기를 제작하여 창덕궁·경희궁·8도·양도(兩都, 개성과 강화)에 설치하도록 하였다. 당시 측우기의 제작은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상위고(象緯考)」의 편찬과 관련하여 진행되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영조가 이 사업을 추진하면서 “일풍일우(一風一雨)를 살피라고 명하신 성의(聖意)를 본뜬 것” 이라고 천명하였다는 점과 측우대의 규격을 명확히 규정하였다는 점이다.39)『영조실록』 권114, 영조 46년 5월 정축. 세종대의 기록에는 측우기를 대 위에 설치한다는 말은 있었지만 대의 규격을 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영조 때에는 측우기를 설치하기 위한 석대를 창덕궁·경희궁·서운관 등에 만들면서 그 규격을 포백척(布帛尺)으로 높이는 1척, 넓이는 8촌, 석대 위에 측우기를 설치하기 위한 구멍의 깊이는 1촌으로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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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감 측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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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풍일우를 살핀다’고 하는 것은 측우기가 경천(敬天)과 애민(愛民)의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되었음을 말해 주는 대목이다. 측우기는 ‘일풍일우’로 표현되는 하늘의 뜻을 살펴 ‘경천’하기 위한 도구였으며, 아울러 ‘일풍일우’를 살펴 농사에 힘썼던 열성조(列聖朝)의 성스러운 뜻을 받들어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를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측우기의 제작과 그를 이용한 강우량의 측정 방법이 『증보문헌비고』에 종합적으로 정리되었다.40)『증보문헌비고』 권2, 상위고2, 의상1.

1791년(정조 15)에는 다음과 같이 측우기의 수심을 측정하는 시기를 규정하였다.

측우기의 수심을 써서 올릴 때 그 깊이(分寸)가 매번 서로 다르고 시한도 역시 일정하지 않다. 앞으로는 이른 새벽부터 오시(午時) 초삼각(初三刻)까지, 오정(午正) 초각부터 인정(人定)까지, 인정부터 다음날 이른 새벽 이전까지 세 차례로 나누어 써서 올리도록 하라.41)『정조실록』 권32, 정조 15년 4월 정묘.

하루를 3등분하여 강우량을 측정토록 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정조 때 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강우량을 측정하여 통계 자료를 확보하고 있었다. 1791년(정조 15)부터 1798년(정조 22)까지의 연평균 강우량은 표 ‘정조 때의 연평균 강우량’과 같았다.

<표> 정조 때의 연평균 강우량
연도 평균 강우량 연도 평균 강우량
1791(정조 15) 8척(尺) 5촌(寸) 9분(分) 1795(정조 19) 4척 2촌 2분
1792(정조 16) 7척 1촌 9분 1796(정조 20) 6척 8촌 5분
1793(정조 17) 4척 4촌 9분 1797(정조 21) 4척 5촌 6분
1794(정조 18) 5척 8촌 1798(정조 22) 5척 5촌 6분
✽『정조실록』 권51, 정조 23년 5월 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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