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1장 천문의 관측과 기상의 측후
  • 4. 기상 현상의 측후
  • 수표
구만옥

강우량을 측정하는 데는 측우기를 사용하는 것 이외에 하천의 수위를 측정하는 방법도 있다. 비가 오면 하천의 수위가 올라가고, 가물면 하천의 수위가 내려간다는 자연 현상에 주목한 방법이다. 측우기의 제작과 동시에 세종대에는 ‘수표(水標)’를 설치하였다. 당시 마전교(馬廛橋)의 서쪽 물 가운데에 넓적한 돌(薄石)을 놓고, 그 위를 깎아 받침돌(趺石) 두 개를 세운 다음 그 사이에 모난 나무 기둥을 끼워 넣었다. 받침돌과 나무 기둥은 쇠갈고리(鐵鉤)로 묶어 고정시키고, 나무 기둥에 척(尺)·촌(寸)·분(分)의 수를 새겨 호조의 낭청(郎廳)으로 하여금 하천의 수위를 측정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한강변의 암석에도 동일한 형태의 수표를 세우고, 나루터를 관리하는 도승(渡丞)에게 수위를 측정하여 호조에 보고하도록 하였다.42)『세종실록』 권93, 세종 23년 8월 임오.

현재 세종 대왕 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는 수표와 장충단 공원에 있는 수표교(水標橋)는 수표를 이용한 오랜 관측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수표는 높이 약 3m, 폭 약 20㎝의 화강석으로 된 부정육면체 방추형(紡錘形)의 돌기둥이다. 물의 압력을 받게 되는 상류 방향을 홀쭉하게 만들어 물의 저항을 약하게 한 구조로서, 위에는 연꽃 봉오리 무늬를 한 머릿돌이 얹혀 있고, 아래는 방추형의 초석으로 땅속에 박혀 있다. 돌기둥의 양쪽 면에는 1척에서 10척까지 눈금을 새겼고, 뒷면의 3척·6척·9척 되는 눈금 위에는 표를 파서 각각 갈수(渴水)·평수(平水)·대수(大水) 등을 헤아리는 표지로 삼았다. 6척 안팎의 물이 흐르면 보통의 수위였고, 9척이 넘으면 위험 수위로 개천이 범람할 것을 예고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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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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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표를 이용한 관측 기록도 남아 있다. 『풍운기(風雲紀)』, 『기우기청제등록(祈雨祈晴祭謄錄)』, 『천변초출등록(天變抄出謄錄)』이나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등의 연대기류(年代記類)에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풍운기』는 관상감의 관측 일지 원부(原簿)이다. 즉, 관측에 임한 당직 관리가 자기 담당 시간에 관측한 모든 현상을 규정에 따라 기록한 것이다. 관측은 24시간 동안 3교대로 하였고, 관측자는 관측 내용을 기록하고 서명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의 연대기 기록은 『풍운기』를 원본으로 삼았다. 매일 승정원, 시강원, 규장각 등에 제출한 보고서에 의해 집계되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 록』에서 확인되는 ‘수표 단자(水標單子)’는 바로 이를 가리킨다.43)『인조실록』 권49, 인조 26년 5월 무인 ; 『영조실록』 권108, 영조 43년 4월 경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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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의 수표교
일제 강점기의 수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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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수표교
1959년 수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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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표교는 청계천에 흐르는 수량을 측정하는 다리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수표교는 장통교(長通橋)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다리의 서쪽 물 가운데 석표(石標)를 세우고 척·촌의 수를 새겨 강우량을 측정하게 하였다고 한다.44)『신증동국여지승람』 권3, 한성부(漢城府), 교량(橋梁). 이는 수표교와 수표를 설명한 것이다. 1760년(영조 36) 청계천에 대한 대대적인 준천 사업을 실시하고, 영조는 수표교 교각에 ‘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는 네 글자를 새겨 이후 준천 사업의 기준으로 삼게 하였다. 실제로 정조 때에는 ‘경진지평’이란 글자가 보이지 않는데도 준천 사업을 소홀히 하였다고 하여 관계자들이 처벌받기도 하였고,45)『정조실록』 권4, 정조 원년 7월 을해. 순조 때에는 이 네 글자를 기준으로 준천 사업을 실시하였다.46)『순조실록』 권32, 순조 32년 8월 정해, 준천사목(濬川事目) 참조 ; 『순조실록』 권33, 순조 33년 3월 임오·4월 기미. 영조 때는 다리 동쪽에 준천사(濬川司)란 관청을 두어 수량의 변화를 한성 판윤에게 보고하게 하였다. 원래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1959년 청계천 복개 공사 때 장충단 공원으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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