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1장 천문의 관측과 기상의 측후
  • 4. 기상 현상의 측후
  • 풍기
구만옥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의 『금양잡록(衿陽雜錄)』에서는 농사를 짓는 사람의 걱정은 수재와 한재가 첫째이고 그 다음이 바람이라고 하면서,47)강희맹(姜希孟), 『금양잡록(衿陽雜錄)』, 제풍변(諸風辨) 4. 농 작물에 미치는 바람의 영향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동방의 땅은 동쪽과 남쪽이 바다에 접해 있고, 서쪽은 넓고 멀며, 북쪽에는 높은 산과 험준한 봉우리가 있는데, 그것은 꺾어져서 동쪽을 가로막고 남쪽 가까이에서 그친다. 그 지세가 동쪽과 북쪽은 모두 산이고, 서쪽과 남쪽은 모두 비어 있다. 바람이 바다를 지나 불어오면 따뜻하기 때문에 능히 구름과 비가 되어 사물을 자라게 한다. 바람이 산을 넘어 불어오면 차기 때문에 온화함을 상실하여 사물을 손상시킨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영동(嶺東)의 농민들은 농사철에 닥쳐서 동풍이 불기를 바란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다른 까닭은 그 바람이 산을 넘지 않기 때문이다.48)강희맹, 『금양잡록』, 제풍변 4.

강희맹은 산천과 지역의 구분에 따라 기후가 일정하지 않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남풍이 불면 큰비가 오고 북풍이 불면 맑았는데, 이는 중국의 기후와 상반되는 것이었다.49)강희맹, 『금양잡록』, 제풍변 4. 앞에서 언급한 내용은 영동 지역의 특수성을 말하고자 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다른 지역을 보면 일반적으로 동풍의 피해가 가장 심각하였기 때문이다. 동풍은 만물을 잘 마르게 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는데,50)강희맹, 『금양잡록』, 농담(農談) 2. 그 피해가 심할 때는 논밭의 물고랑이 모두 마르고 농작물이 모두 말라 버린다고 하였으며, 피해가 적을 때도 벼 잎과 이삭이 너무 빨리 마르기 때문에 벼 이삭이 싹트자마자 오그라들어 자라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51)강희맹, 『금양잡록』, 제풍변 4.

강희맹의 논설은 비록 그 내용은 간결하지만 높새바람 현상을 파악하고 세운 나름의 이론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는 농업에 미치는 바람의 영향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기상학 분야의 선구적 이론 가운데 하나라고 할 만하다. 바람에 대한 이와 같은 기상학의 전개가 언제부터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농업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였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바람의 관측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유물이 ‘풍기대(風旗臺)’이다. 풍기대는 그 위에 풍기죽(風旗竹)을 꽂아 놓고 깃발이 날리는 방향으로써 풍향을 관측하였던 석대(石臺)이다. 현재 경복궁과 창경궁에서 찾아볼 수 있는 풍기대는 아름답게 조각된 화강석의 받침돌대만 남아 있다. 풍기대에 꽂았던 풍기죽의 구체적인 모양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나무에 기다란 깃발을 매단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이와 같은 풍기를 이용하여 바람을 관측함으로써 측우기·수표를 이용한 강우량 측정과 함께 또 다른 기상 관측의 전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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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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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0년(영조 46) 측우기의 설치와 관련한 기사에서는 풍기대의 기능과 설치 장소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보인다.

또 대궐 안에 풍기가 있는데, 이는 곧 옛날부터 바람을 점치는 뜻으로서, 창덕궁의 통제문(通濟門) 안과 경희궁의 서화문(西華門) 안에 돌을 설치하고, (거기에) 풍기죽을 안치하였다.52)『증보문헌비고』 권3, 상위고3, 의상2.

이 기사를 통해 조선 왕조에서는 옛날부터 바람을 점치는 뜻을 본받아 궁궐에 풍기대를 설치하여 바람을 관측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농업을 기간산업으로 삼는 조선 왕조의 위정자들이 ‘바람과 비의 순조로움’을 국가의 중대한 일로 여겼던 저간의 사정을 보여 준다.53)『증보문헌비고』 권3, 상위고3, 의상2.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동궐도(東闕圖)에는 풍기대가 사실적인 모습으로 묘사되 어 있다. 그런데 창 모양의 풍기죽이 꽂혀 있는 기구의 이름은 ‘상풍간(相風竿)’으로 적혀 있다. 이 명칭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정조실록』의 기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계 문신(抄啓文臣)에게 과시(課試)를 행하였는데, 상풍간을 제목으로 삼았다. 경연의 신하에게 이르기를, “상풍간은 진(晉)나라 때의 고사인데, 우리 조정에서 이를 사용하여 창덕궁·경희궁의 정전과 정침의 곁에 모두 이 간(竿)을 설치하였다. 『문헌비고』를 편찬할 때에 측우기만 기록하였으므로, 이 간에 대한 일은 조정 밖에서 모른 것 같기에 시험 제목의 망단(望單)에 특별히 써서 내린 것이다.”라고 하였다.54)『정조실록』 권14, 정조 6년 7월 임술.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현존하는 『증보문헌비고』에는 풍기대와 관련한 기사가 독립되어 있지 않고, 측우기와 관련하여 간단히 설명되어 있다. 정조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일풍일우’를 삼갔던 과거의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상풍간을 시험 문제로 출제했던 것이다.

본래 상풍간이란 기다란 막대기 위에 나무를 깎거나 청동을 주조하여 새, 특히 까마귀 모양을 만들어 붙이고, 이를 수레나 배 위에 설치하여 바람의 방향을 관측하는 기구였다. 그것은 상풍(相風)·상오(相烏)·상풍오(相風烏)·상풍동오(相風銅烏)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배의 돛대 위에 설치하는 장오(檣烏)는 바로 이 상풍간을 본뜬 것이다.55)『운부군옥(韻府羣玉)』 권4, 상평성(上平聲), 십사한여환동용(十四寒與桓同用) ; 『산당사고(山堂肆考)』 권4, 천문(天文), 풍(風). 1793년(정조 17) 주교사(舟橋司)에서는 한강의 배다리 가설에 대한 기본 원칙을 확립하고자 이전의 논의들을 종합하여 「주교절목(舟橋節目)」을 마련하였다. 여기에는 풍향을 관측하기 위해 배의 꼬리 부분에 설치하는 깃발이 등장하는데, 그 명칭이 ‘상풍기(相風旗)’였다.56)『정조실록』 권32, 정조 15년 1월 무인 ; 『정조실록』 권37, 정조 17년 1월 을사.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5세기 전반 조선에서는 각종 기기를 사용하여 강우량과 풍향 등을 과학적으로 측정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그 동 기나 배경이 오늘날의 과학적 의미와 다르다고 할지라도 자연 현상의 수량적 측정과 통계 처리, 기록의 축적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는 분명 기상학의 성립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왕조의 관리들은 관측 활동, 관측 규정, 관측 기록과 보고에서 매우 합리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기상학에서 선구적인 관측 활동을 벌였고 훌륭한 전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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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풍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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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이란 ‘천상을 관찰한다’는 뜻이다. ‘관상’의 대상이 되는 ‘천상’에는 일체의 천문 현상과 기상 현상이 포함된다. 우리 선조들은 오랜 경험적 관찰을 통해 축적된 천문 지식을 바탕으로 정상적인 자연의 상태를 전제한 다음, 그것과 어긋나는 일체의 현상을 주요 관측 대상으로 삼았다. 그것은 ‘천상’ 또는 ‘천문’으로 표현되는 하늘의 뜻을 읽기 위한 행위였다. 그 배경에는 지상의 정치 권력이 ‘천명’에서 유래한다는 천명사상과 하늘의 뜻에 어긋나는 정치 행위가 벌어졌을 때 그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천재지변이 발생한다는 재이론(災異論)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통 사회의 천문 역산학이 ‘하늘을 공경하고 재이를 삼가는 도리(敬天謹災之道)’57)『중종실록』 권30, 중종 12년 11월 정유. 참찬관(叅贊官) 성세창(成世昌)의 발언.라는 정치적 이상에 복무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관상’은 전근대 한국 사회의 국가 운영, 다시 말해 집권 체제(集權體制)의 사회 경제 운영을 위해서도 필요하였다. 전근대 사회의 물적 토대는 토지와 인민(노동력)이었다. 집권 체제를 지향하였던 한국 고대·중세의 국가들은 토지와 인민의 안정적인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고, 양자의 효율적인 결합을 통해 농업 생산력의 증대, 나아가 국가 재정의 확보와 국방력의 강화를 추구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농민층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그들의 재생산 기반을 보장해 줄 필요가 있었다. 이른바 농업 기상학의 필요성이 여기에서 대두하였다.

조선 왕조의 관상감(서운관)에서 관측한 내용을 일지 형식으로 기록한 문서의 이름이 『풍운기(風雲紀)』였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당시 사람들은 바람 한 줌, 구름 하나의 움직임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그것은 비, 구름, 바람이 농사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측우기, 수표, 풍기라는 과학적 도구를 사용하여 자연 현상을 정량적으로 관측하였다. 그리고 통계 처리를 통해 자료를 축적함으로써 기상 관측의 훌륭한 전통을 수립하였다.

전통 사회의 자연 관찰은 오늘날과 비교할 때 대상과 목적이 달랐다.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관상’에는 과학과 미신의 요소가 뒤섞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천문학이라는 분야가 정치·사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 밑바닥에는 자연(우주)과 인간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전근대의 자연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인간의 존재 원리, 사회의 운영 원칙, 자연계의 법칙은 일관된 논리로 설명될 수 있다고 여겼다. 사람들은 천체의 운행 과 자연계의 순환적 질서를 통해 그 안에 숨겨진 하늘의 뜻을 찾아내고, 그에 합치되는 도덕적 생활과 사회 운영을 추구하였다. 그것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천문학은 바로 이와 같은 정치적·사상적 이상에 복무하는 학문이었다. 왕조 국가 체제하에서 정부·왕실을 중심으로 천문학이 유지·발전되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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