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2장 시간의 측정과 보시
  • 1. 전근대 사회 속의 시간
문중양

근대 사회에서 시계와 시간은 인간 생활에서 떼어 놓으려 해도 뗄 수 없는 존재이다. 누구나 시계를 한두 개 갖고 있고, 혹여 없다 하더라도 어디에서나 흔히 시계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정확한 시간을 몰라 겪는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너무나 흔하기 때문에 오히려 시간에 대해 고민하면서 살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틀림없이 시계는 편리한 근대 문명의 이기(利器)이지만 시계가 알려 주는 시간은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서, 현대인을 구속하는 요소들 중 시간만큼 강력하고 예외를 용서하지 않는 게 없다. 실제로 인간의 삶에 대한 시간의 구속은 근대 사회가 전근대 사회와 다른 큰 요소 중 하나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9시까지 출근해야 하고, 12시면 밥을 먹어야 하고, 6시가 넘어서야 퇴근해서 집에 올 수 있다. 해외 출장을 가려면 정해진 시간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 예약한 시간에 공항에 도착하지 않으면 비행기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출발 시간이 되면 승객이 오든 오지 않든 비행기는 사정없이 떠나 버린다. 이러한 시간의 규율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의 축에 끼지 못하고, 불성실하다거나 빈둥거린다는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태어나서 시간관념 없이 살다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들어가 배우는 것 중의 가장 큰 항목이 아마도 정해진 시간에 따라 살아가는 법 또는 규율일 것이다. 성공하려면 누구보다 시간 관리를 철저히 잘해야 한다는 명제가 성립한 지 오래이다. 그만큼 근대 사회에서 시간은 모든 사람의 생활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전근대 사회에서의 시계와 시간은 근대 사회에서와 달랐다. 시계라는 것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그저 닭 울음소리에 맞추어 일어나고, 들에 나가 일을 하다가, 해가 지면 집에 들어와서 자는 생활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시계를 갖고 있지 않아도 불편함이 없었던 것은 근대 사회에서와는 달리 시간이 그들을 구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 길을 떠나더라도 정확하게 예약한 시간에 출발하는 비행기나 기차를 타기 위해 부산을 떨 필요가 없었다. 그를 모실 마차나 가마는 아무리 늦어도 기다려 주었다. 정확한 시간에 따라야 하는 스케줄을 가지고 매일 반복되는 생활을 살지도 않았다. 이와 같이 시간이 사람들의 생활을 구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계가 필요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만나자는 약속 시간이래야 보통 하루 정도의 시간 간격으로 잡혔을 뿐이다. 정확해 봐야 한두 시간 간격이었다. 시보(時報)가 없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해가 중천에 떴을 때 만나자든가, 달이 처마에 걸렸을 때 보자든가 하는 식으로 해와 달, 그리고 별의 위치를 가지고 약속을 정하였다. 시보 체제가 갖추어진 서울 등 대도시에서는 예외적이었지만, 그것도 밤 시간의 파루(罷漏, 해 뜰 때)와 인정(人定, 해 질 때), 그사이의 5경, 그리고 낮 시간은 정오(正午) 정도만 시간으로 정하였을 뿐이다.

이와 같이 전근대 사회에서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시간은 남의 이야기와도 같았다. 실제로 시간과 시계는 평범한 사람들의 영역에 속하던 존재가 아니었다. 즉, 일상적 삶의 영역에 자리 잡고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동아시아에서 시계와 시간은 전적으로 지배자의 영역에 속하였다. 이러한 전근대 사회에서의 시간의 존재 모습을 잘 말해 주는 개념이 ‘수시(授時)’이다. ‘관상(觀象)’과 함께 ‘수시’는 동아시아 전통 사회에서의 하늘에 대한 관념과 사색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 ‘관상’이 하늘의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라면, ‘수시’는 그러한 관찰을 통해 정확한 시각을 측정해서 백성들에게 알려 주는 것을 말한다. 공급자는 백성을 다스리는 지존(至尊)의 위치에 있는 왕(王)과 그 대리인들이고, 수요자는 평범한 백성들이다. 수요자라고 하지만 스스로 원해서 수요자가 된 것은 아니고, 일방적인 공급에 의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수요자가 되었다. 왕과 그 대리인인 지배자가 시간을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백성은 피지배자로서 일방적으로 공급을 받는 것이다. 사실 시간을 몰라도 잘 살아갈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제왕들은 왜 시간을 독점적으로 측정하고, 시간을 몰라도 불편함이 없이 살 수 있는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려 주는 행위를 하였을까? 그것은 지상 세계를 지배하는 왕의 절대적 권력이 하늘에서 나온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동아시아 사회에서 왕은 온 우주를 주재(主宰)하는 하늘을 대리해서 지상 세계를 다스리는 존재였다. 따라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명(命), 즉 천명(天命)을 받은 자만이 왕이 될 수 있었다.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이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위에 오르려면, 이전 왕조가 지니던 천명이 소멸하고 대신 그것을 이어서 자신이 천명을 받았음을 온 천하에 증명해 보여야 한다. 천명을 바꾸는 정치적 변동을 ‘혁명(革命)’이라 부르는 연원이 여기에 있다.

천명을 새로 부여받았음을 보여 주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방법은 다양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시간의 측정과 보시(報時)이다. 왜 그럴까? 시간은 하늘에 있는 천체들의 규칙적 운행을 관찰해서 얻는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온 우주를 주재하는 하늘이 주는 것이 된다. 결국 하늘의 명을 새로이 받아서 인간 세상을 통치하게 된 새 제왕이 하늘이 주는 시간을 독점적으로 장악함은 천명을 부여한 하늘과 천명을 받은 왕 사이의 밀접한 연결을 보증 하는 상징이다. 이와 같이 우매한 백성들에게는 정확한 시간이 전혀 필요 없었겠지만, 그들을 지배하는 왕과 그 대리인에게는 시간을 측정하고 알려 주어야 하는 절대적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동아시아의 정치사에서 시간의 독점적 측정과 보시를 수행하는 ‘관상’과 ‘수시’는 통치자가 이상적인 정치 활동을 함에 있어 가장 앞서서 추진해야 할 사안이었다. 즉, 관상과 수시를 잘하는 것이 제왕(帝王)된 자의 권한이자 책무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사정을 동아시아의 정신적 관념과 지식 세계를 지배하였던 『서경(書經)』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서경』은 우(虞)·하(夏)·은(殷)·주(周)의 네 왕조에 걸쳐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성군(聖君)들의 모범적인 정치 사상과 정치 행위를 써 놓은 유교 경전(經典)이다. 사실 이후 동아시아의 유교적 정치 행위는 이 『서경』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서경』은 유교 경전으로서 동아시아의 정치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서경』 맨 처음에 등장하는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은 후대 모든 제왕이 모범으로 삼았던 성군이었다. 그러한 두 성군이 왕위에 올라 가장 먼저 행한 일이 바로 ‘관상’과 ‘수시’였던 것이다.

『서경』의 맨 앞부분 「요전(堯典)」은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한다. “(요임금께서는) 희화(羲和)에게 명하여 하늘을 공경히 따르기를 일(日)·월(月)·성신(星辰)을 역상(曆象)하여 인시(人時)를 공경히 주게 하셨다.” 여기서 ‘희화’는 천문 관측과 시간 측정을 담당하던 관원을 말한다. ‘역상’함은 천체 현상을 관찰해서 역법(曆法)을 정립함을 말한다. 결국 이 문구는 요임금께서 천문 부서와 천문 전문가를 설치하고, 천문 현상을 관찰해서 천문학을 수립하고, 나아가 그것을 토대로 정확한 시간을 측정해서 보시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이와 같이 유교 문화권에서 최고로 추앙받는 성군인 요임금이 제위에 올라 제왕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무로 천문 부서의 설치, 역법의 정비, 시간의 측정과 보시를 무엇보다도 먼저 제시한 것이다. 실제로 요임금은 관상과 수시에 역점을 두어 마침내 1년의 날을 366일로 확정하고, 때에 따라 윤달을 삽입하는 역법을 정립함으로써 모든 정치 활동의 토대를 든든히 하였다58)『서경』의 이 내용을 아주 자세하게 주석을 달아 연구한 것이 유명한 송대(宋代) 채침(蔡沈)의 「기삼백주해(朞三百註解)」이다. 태양과 달의 운행 주기를 어떻게 적절히 맞추어 1년 12달 365일을 정하였는지 세밀한 계산을 제시하였다. 고 『서경』은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요임금에게 제위를 이어받은 순임금도 마찬가지였다. 『서경』의 「순전(舜典)」에 적혀 있는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창제하사 일월오성의 천체 운행을 가지런히 하였다.”59)이 또한 「기삼백주해」와 마찬가지로 채침이 자세하게 주석을 달아 선기옥형의 구조에 대해 설명해 놓았다. 이것이 유명한 「선기옥형주해(璇璣玉衡註解)」이다.는 문구가 그러한 사정을 잘 말해 준다. ‘선기옥형’이란 ‘혼천의(渾天儀)’의 다른 이름으로 고대의 이상적인 천문 관측 기구이다. 순임금은 요임금을 이어서 천문을 관측하기 위한 기구를 창제하시고, 그로써 천체의 운행을 명확히 관찰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요순 두 성군이 관상과 수시를 제왕으로서 마땅히 앞서서 해야 할 책무로 규정하였기 때문에 이후 동아시아의 정치사에서 관상과 수시는 천문학적인 활동일 뿐 아니라 고도의 정치적 사안이기도 하였다. 혁명이 일어나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때에는 거의 필수적으로 천문 전문가를 동원해서 ‘새로운 관상과 수시의 시스템’, 즉 새로운 역법을 제정해서 반포하였다. 소위 ‘수명개제(受命改制)’의 원칙에 따라 ‘개력(改曆)’이 이루어졌다. 그럴 때면 당연히 이전의 역법보다 더욱 정확하고 우수한 역법이어야 하였다. 그러나 개력 때마다 항상 더 우수한 역법으로 개력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사실 새로운 왕조의 개창과 천문학의 발달은 별개의 사안이었기 때문에 개력 때마다 우수한 역법을 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소한 몇 개의 천문 상수나 단위 등을 바꿈으로써 역법 계산의 오차를 줄이는 정도로 포장을 하였을 뿐이었다. 그래도 모르는 우매한 백성들은 다 우수한 역법을 제정, 반포하였다고 믿었다.

이렇게 동아시아의 전통 사회에서 시간을 측정하고 시보하는 ‘수시’는 제왕의 독점적 권한이었기에 사실 일반 백성들의 삶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동아시아의 전통 천문학이라는 것이 바로 이러하였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천문학을 ‘궁정 천문학’이라 규정짓기도 한다. 이 장에서 살펴볼 ‘수시’가 이같이 지배자의 통치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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