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2장 시간의 측정과 보시
  • 4. 시계의 종류와 시간 측정
  • 세계에서 유일한 오목 해시계, 앙부일구
문중양

세종 때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시계가 창제되었다.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玉漏), 행루(行漏) 등을 만들었고, 해시계로는 앙부일구·현주일구·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 등이 창제되었다. 낮과 밤에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주야 겸용의 해시계와 별시계를 통합한 일성정시의도 창제되었다. 그 중에서 앙부일구는 우리 역사 속의 독특한 해시계로 너무나 유명하다.

앙부일구는 원래 수시력을 정립한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이 만든 ‘앙의(仰儀)’를 개량해서 만든 오목 해시계이다. 해시계는 대부분 해 그림자를 받는 시반면(時盤面)이 평평하다. 그런데 이 앙부일구는 반구형(半球形)의 오목한 시반면을 갖고 있다. 반구형의 시반면 내부에 시각을 읽을 수 있는 눈금이 그려져 있다. 마치 모양이 하늘을 우러르는(仰) 가마솥(釜) 같다고 해서 ‘앙부일구(仰釜日晷)’라 이름이 붙여졌다.

앙부일구와 같은 오목형 해시계는 현재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다. 물론 원나라 때 곽수경이 앙의를 처음 고안하였지만 유물로 남아 있지 않고, 제작하여 사용했다는 관련 역사 기록이 없어 중국에서 실제로 만들어 썼는지도 알 수 없다. 단지 『원사』에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해 앙의를 개량해서 해시계 전용으로 조선에서 다시 태어난 앙부일구는 세종대에 처음 제작된 이후 조선을 대표하는 해시계로 정착할 정도로 많이 만들어져 널리 보급되었다. 현존하는 앙부일구만도 여러 개가 된다. 휴대용 앙부일구까지 세면 10여 개가 남아 있을 정도이다.

그럼 여기서 앙부일구의 구조를 살펴보자. 가장 중요한 구조는 해 그림자를 만드는 뾰족한 막대기인 영침(影針)과 해 그림자를 받아 시각을 읽는 둥그런 반구형의 시반면이다. 시반면은 둥그런 구를 정확하게 반으로 잘라 오목한 내부 면에 눈금을 새겨 넣었다. 이 반구형의 시반면 주둥이 부 분에는 보통 방위를 새겨 넣었다. 시곗바늘에 해당하는 시침인 영침은 시반면 주둥이 정남 위치에서 관측지의 북극 고도(한양의 북극 고도)만큼 내려간 지점을 남극으로 해서 정확히 북극을 향하도록 시반면에 박혀 있다. 영침의 끝 부분은 뾰족한 바늘 모양으로 정확하게 시반면 주둥이의 정중앙에 위치한다. 시반면에 그려져 있는 눈금은 영침과 수직하게 13개의 절기선(節氣線)이 그려져 있고, 절기선에 수직하게 시각선(時刻線)이 그려져 있다. 시각선은 정중앙의 자오선을 오시 정초각 0분으로 해서 좌우에 묘시(卯時)부터 유시(酉時)까지 낮 동안의 시각을 잴 수 있도록 자오선에 평행한 방향으로 그려져 있다. 절기선은 해 그림자만 보고도 이십사절기를 알 수 있도록 13개의 선이 시각선에 수직한 방향으로 그어져 있다. 춘·추분선을 한가운데의 적도선으로 해서 맨 위의 선이 동지선(冬至線), 맨 아래의 선이 하지선(夏至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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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부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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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구조의 앙부일구는 천구 상에서 일정한 주기를 갖고 도는 태양의 운행을 구형의 스크린 위에 완벽하게 재현하는 기구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구조의 해시계보다 시각을 읽기가 쉽다. 절기선과 시각선에 맺힌 해 그림자의 눈금을 그냥 읽기만 하면 된다. 해가 아침에 동쪽에서 뜨면 해 그림자는 시반면의 서쪽 묘시 시각선을 가리킬 것이며, 이후 서서히 오른쪽으로 움직여 동쪽의 유시 시각선에서 해가 지게 된다. 그림자가 가리키는 시각선 위의 글자를 읽으면 그것이 현재의 시간이다. 번거로운 별도의 환산이 필요하지 않다. 절기도 마찬가지이다. 춘·추분날에는 영침의 해 그림자가 중앙의 적도선인 춘·추분선을 따라서 움직인다. 따라서 해 그림자가 어느 절기선에 맺히는가를 보고 바로 현재의 절기를 알 수 있다. 해 그림자는 절기가 변함에 따라서 남북으로 이동하는데, 해 그림자가 가장 긴 동짓날에는 가장 북쪽의 동지선을, 하짓날에는 가장 남쪽의 하지선을 따라서 궤적을 그리게 된다. 이와 같이 앙부일구는 1년 중의 절기와 하루 중의 시각을 별도의 계산 없이 시반면에 생긴 해 그림자만 보고도 바로 파악할 수 있다.

앙부일구가 조선시대 내내 널리 제작되어 보급된 데에는 어떤 해시계보다도 시각을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을 듯하다. 실제로 앙부일구의 탄생은 우매한 대중들이 쉽게 시간을 읽을 수 있도록 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앙부일구를 처음 만든 때는 1434년(세종 16)이었는데, 우리는 앙부일구의 탄생 과정에서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주목할 점은 처음으로 앙부일구를 만들어 혜정교(惠政橋, 오늘날의 광화문 우체국 동쪽에 있던 다리)와 종묘 앞 길가에 설치하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한양은 건국 초에 철저한 계획에 의해 설계된 신도시로, 한양의 중심지를 동서로 관통하는 큰 도로가 혜정교와 종묘 남쪽을 가로질러 서대문과 동대문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앙부일구가 설치된 곳은 한양의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던 대로변이었다. 이렇게 앙부일구는 궁궐 속 깊은 곳에 설치하지 않고 백성들이 직접 보고 읽을 수 있도록 사람이 많이 다니던 길거리에 설치하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백성을 위한 공중 시계(Public Clock)인 셈이다.

앙부일구에서 주목할 점 또 하나는 시반면의 주둥이에 시각을 새겨 넣으면서 글자로 새기지 않고, 12지신의 동물 그림으로 새긴 것이다. 이는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이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렇게 앙부일구는 철저하게 백성들의 시계로 태어났다. 중국에서 최초로 고안된 앙의가 중국 땅에서는 태어나지 못하고, 조선에서 태어나 조선을 대표하는 해시계로 자리 잡은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434년 앙부일구를 창제한 후에 김돈(金墩)이 쓴 「앙부일구명(仰釜日晷銘)」은 그러한 앙부일구의 성격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무릇 가설해서 베푸는 것 중 시간만큼 중대한 것이 없다. 밤에는 경루(更漏, 물시계)가 있어서 시간을 알 수 있지만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를 주조하여 기구를 만들었으니 형태는 솥과 같다. (반구의) 지름을 가로질러 둥근 송곳을 설치하여 북극을 가리키도록 하였다. 움푹 팬 곳에서 휘어서 돌게 하였고, 점은 겨자씨만큼 작게 찍었다. 그 안에 반주천(半周天)의 도수를 표시하였는데, 12지신의 그림으로 그려 넣은 것은 (글자를 못 읽는)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시각이 정확하고 해 그림자가 또렷하다. 길가에 이것을 놓아 두었는데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이때부터 백성들이 이것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77)이은희·문중양 역주, 『국조역상고』, 소명출판, 2004, 160∼161쪽.

세종 때 처음 만든 앙부일구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우리가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조선 후기에 제작한 것이다. 현존하는 앙부일구들은 세종 때의 것에 비해 구조는 거의 동일하나 몇 가지 점에서 다르다. 먼저 가장 큰 차이점으로는 12시의 시각선 표시가 12지신의 동물 그림으로 그려져 있지 않고 글자로 새겨져 있는 점이다. 이는 세종 때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이 시간을 볼 수 있도록 그림으로 그린 것과 매우 다른 모습이다. 또 다른 점으로는 조선 후기 시헌력 체제로 개력이 이루어지면서 달라진 역법 상수와 시제의 변동에 따라 달라진 것을 들 수 있다. 즉, 앙부일구의 시간 눈금이 세종대의 100각법 시제에서 시헌력 체제에 의한 96각법 시제로 바뀌었다. 또한, 북극 고도도 달라져 있다. 세종대의 북극 고도는 ‘38도 소(少, 약 4분의 1)’였다. 이 도수는 주천 도수 365¼도 하에서의 북극 고도 도수이다. 시헌력 체제 하의 360도 체제로 환산하면 약 37° 41′ 정도가 된다. 이 도수는 시헌력 개력 이후 37° 39′ 15″로 바뀌었다.78)사실 이 북극 고도 수치는 1713년(숙종 39) 중국의 사신 하국주(何國柱)가 ‘상한대의(象限大儀)’라는 서양식 천문 관측 기구를 사용해서 한양의 종로에서 측정한 값이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후 기의 앙부일구들에는 이 북극 고도 수치가 ‘북극고 37도 39분 15초’라 새겨져 있다. 세종 때의 앙부일구라면 당연히 ‘북극고 38도 소’라 적혀 있을 터이다.

현존하는 앙부일구 중 세종 때의 것과 가장 유사한 것은 청동으로 만든 직경 30㎝ 내외의 앙부일구들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국립 고궁 박물관에 소장된, 보물 845호로 지정된 청동제 앙부일구 두 개이다. 그 중의 하나에는 북극 고도가 ‘37도 20분’이라 적혀 있고, 96각법 시제로 눈금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1653년(효종 4)에서 1713년(숙종 39) 사이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북극 고도가 ‘37도 39분 15초’로 적혀 있어 1713년 이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청동제 앙부일구는 눈금과 글자가 은상감(銀象嵌)으로 처리되는 등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지니고 있어 궁궐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도 이와 유사한 청동제 앙부일구가 고려대학교 박물관과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에 각각 하나씩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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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부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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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부일구는 청동 이외에도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졌다. 기상청에 있는 직경 20㎝의 앙부일구는 검은색 대리석으로 만들었지만 그 구조와 형태는 청동제와 다를 바 없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앙부일구는 하얀색 대리석으로 만든 독특한 형태의 것이다. 즉, 시반면의 몸체를 16개의 꽃잎 모양으로 조각한 대접 모양의 받침대가 받치고 있다. 이 밖에도 백자로 만들거나 옥으로 만드는 등 정말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서 앙부일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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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부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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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부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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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용 앙부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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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용 앙부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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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이르면 앙부일구는 더 많이 제작되고 더 널리 사용된 듯하다. 아주 작아 가지고 다니면서 간편하게 시간을 잴 수 있는 휴대용 앙부일구의 등장은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 준다. 대표적으로 19세기 말 강윤(姜潤, 1830∼1898)과 강건(姜湕, 1843∼1909) 형제가 제작한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운 휴대용 앙부일구를 들 수 있는데, 그 중 국립 중앙 박물관에 있는 것은 보물 85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들이 만든 휴대용 앙부일구는 현재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데, 대략 가로 6㎝ 이내, 세로 4㎝ 내외이다. 상부 위쪽에는 지남침(指南針)을 달아서 방위를 알 수 있게 하였고, 아래쪽에는 앙부일구를 새겨 넣은 구조이다. 간혹 영국 옥스퍼드 과학사 박물관에 있는 것처럼 수평을 파악할 수 있게 하 는 장치가 달려 있는 더욱 정교한 것도 있다. 이 앙부일구의 아랫면에는 “성상(聖上) 7년(1870) 11월 하순에 신(臣) 강윤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삼가 제작하다.”란 명문이 적혀 있다. 이로 보아 고종의 명에 따라 제작해서 바쳤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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