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3장 역과 역서
  • 1. 역이란 무엇인가
전용훈

조선 후기의 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은 역(曆)을 “명천시 수민사(明天時授民事)”라고 정의하였다.85)이규경(李圭景),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천지편(天地篇)/천문류(天文類), 역상(曆象), 역이십사기변증설(曆二十四氣辯證說). 역이란 하늘의 시간을 밝혀 백성들의 생활에 쓸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는 뜻이다. 역은 시간을 밝히고 백성이 일상생활에 쓸 수 있게 해주는 활동의 총체를 가리키지만, 그 활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장치, 즉 자연에서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가를 이해하여 이것을 백성들의 생활에 쓰이도록 만든 장치는 바로 역서(曆書)라고 할 수 있다.

동양에서 많은 문명적 고안물의 출발을 전설적 존재인 황제(黃帝)에게 소급하듯이 역의 시작도 마찬가지이다. 황제가 유능한 신하들로 하여금 해와 달과 별을 살피라고 명한 데서부터 역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전설상의 임금인 요임금은 신하들에게 명하여 윤달을 만들어 계절의 변화에 잘 부응하는 역을 만들었다고 한다.

역의 역사적 유래를 밝히는 글에서는 늘 요임금이나 황제가 역을 만든 것이 “흠약호천 경수인시(欽若昊天敬授人時)”라는 궁극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 강조되어 왔다.86)『서경(書經)』 권1, 요전(堯典). 제왕은 하늘을 공경하며, 정성스레 백성들에게 시간을 내려 주는 임무를 부여받은 존재라는 생각에서 나온 이념이다. 이것은 이규경이 정의한 것과 마찬가지로, 문명의 시작과 함께 만 들어진 역이 사실은 자연으로부터 취한 시간을 백성들이 따라야 할 시간적 규범으로 전환해 주는 장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때 이런 문명의 이기인 역을 만들어 낸 황제나 이를 개선한 요임금은 백성들이 따라야 할 최고의 위정자라는 점에서 역을 만드는 것은 위정자의 임무라는 의미가 자연스레 파생된다. 결국 전통시대에 역이란 위정자가 자연의 변화로부터 감지되는 시간을 백성들의 생활을 규율하는 시간적 규범으로 만든 것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인에게 시간은 자연의 변화와 상관없는 약속일 뿐이지만, 전통시대에 시간이란 반드시 자연으로부터 출발한 자연의 시간이었다. 역의 의미를 돌이켜 역의 출발이 자연의 관찰과 자연적 시간의 인식에 있었음을 보면, 전통시대의 시간관념이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잘 볼 수 있다. 자신이 출발한 곳과 시차가 있는 외국에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한다든지, 서머 타임제(summer time制, 일광 절약 시간제)를 실시하는 경우처럼 자연적인 시간 감각을 쉽게 뒤바꿀 수 있는 현대 문명에서는 자연적 시간이란 개념화할 수 있는 여러 시간 중의 하나일 수 있다.87)일광 절약 시간제에 대해서는 이은성, 『역법의 원리 분석』, 정음사, 1985, 77∼80쪽 참조. 하지만 전통시대에는 역은 기본적으로 자연의 시간을 반영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래야만 좋은 역이라고 생각하였다는 점에서 역은 본래적으로 자연적 시간을 반영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에 반영된 시간의 흐름을 규정하는 방식이나 시간을 분절하는 방식은 모두 자연의 변화에 기초를 두고 있다. 역에 반영된 자연적 시간의 흐름이란 작게는 밤에서 낮으로, 낮에서 밤으로 이어지며, 크게는 봄·여름·가을·겨울을 지나 다시 봄으로 이어지는 계절의 변화를 따르고 있다. 물론 시간의 흐름은 단절적이지 않고, 언제나 끝이 다음의 시작이 되어 끝없이 이어지는 순환적인 흐름을 갖는다. 역에 채용된 시간의 분절 또한, 자연적 분절을 반영하고 있다. 1년은 태양이 지구 둘레를 한 바퀴 크게 돌아오는(실은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도는 것이다.) 주기를, 한 달은 달이 지구 둘레 를 한 바퀴 돌아오는 주기를, 하루는 태양이 떴다 져서 밤낮이 한 번씩 바뀌는 주기를 가리킨다. 또한, 밤이란 태양이 땅 아래로 숨었다 다시 나올 때까지의 시간이며, 낮은 태양이 떠서 질 때까지의 시간이다.

하루를 열두 시간으로 분절한 것은 자연적으로 분절된 것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분절이자 사람들 사이의 약속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시간은 자연적 시간의 반영이라 여겼던 전통시대의 사람들은 하루의 열두 시간도 자연적 분절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겼다. 1년이 열두 달로 분절되듯이 하루 또한, 열두 개의 시간으로 분절되는 것이 자연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전통시대 사람들은 하루 열두 시간을 다시 100개의 시간으로 분절하여, 하루를 100각으로 삼을 때에도 100이라는 숫자에 이미 자연이 반영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실상 하루를 열두 시간으로 나누고, 하루를 100각으로 나눈 것은 편의를 위한 사람들 사이의 약속이며 자연성이 거의 없는 인위적 분절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시대에는 나아가 30년을 세(世), 세가 12개인 360년을 운(運), 운이 30개인 1만 800년을 회(會), 회가 12개인 12만 9600년을 원(元)이라 하여 좀 더 긴 시간의 분절이 고안되기도 하였다.88)이 설은 중국 송대의 소옹(邵雍, 1011∼1077)이 제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 유학자 김석문(金錫文, 1658∼1735)도 소옹의 설을 받아들여 우주 변화의 주기성을 논하였다(전용훈, 「김석문의 우주론」, 『한국 천문력 및 고천문학-태양력 시행 백 주년 기념 논문집-』, 천문대, 1997, 132∼141쪽 참조). 여기에서도 30과 12에 인간이 부여하였던 수비적(數秘的) 의미만 제거해 버리면 이들 시간은 인위적 분절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전통시대 사람들이 택한 시간의 분절 방식이 자연적이냐 인위적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역의 본래적 의미에 각인된 대로 시간의 분절은 언제나 자연성을 반영해야 한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현대인에게는 인위적 분절로 보이는 원·회·운·세, 12시, 100각 등의 분절에도 각종의 자연적 의미가 있다고 믿었으며, 아울러 이런 시간들이 우주의 변화 양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믿었다.

전통시대 사람들이 시간의 분절에 자연성을 반영하려 하였던, 그리고 역에 각인된 본래적 의미에 충실하고자 하였던 좋은 증거가 ‘부정시법(不 定時法)’이라는 것이다.89)시간을 나타내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서는 이은성, 앞의 책, 67∼77쪽 참조. 전통시대에 낮 시간과 밤 시간은 자연적인 분절을 따랐으므로 밤 시간과 낮 시간 각각은 계절에 따라 달라졌다. 겨울에는 밤이 길고 여름에는 밤이 짧은데, 이 밤 시간을 또다시 좀 더 작은 시간들로 분절하면 분절된 각각의 시간도 계절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시대에는 밤 시간을 통틀어 1경부터 5경까지 다섯 개의 시간을 두었다. 그러면 밤이 짧은 여름 밤의 1경의 시간과 밤이 긴 겨울 밤의 1경의 시간은 당연히 길이가 서로 달랐다. 이 때문에 세종 때의 자동 물시계로 알려진 자격루(自擊漏)에서도 물의 양으로 밤 시간을 나타내는 자를 각 절기마다 각기 달리 사용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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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의 시간 표시는 밤에도 대낮처럼 불을 밝힐 수 있어 밤낮의 자연적 변화에 무감한 현대인이 보기에는 매우 불편할 듯 보이지만, 해가 뜨면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일을 멈추는 자연의 시간에 맞추어 생활하던 전통시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편리한 것이었다. 더욱이 이러한 시간 분절법은 역에 함축된 자연성이라는 가치를 가장 충실하게 실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의 변화에 따라 겨울이 되어 밤 시간이 길어졌으므로 당연히 이 를 분절한 시간도 길어져야 하고, 다시 여름이 되어 밤이 짧아지면 이를 분절한 시간도 짧아져야 가위 ‘자연’스런 것이다.

역은 황제나 요임금이 만들고 개선하여 백성들에게 준 것이라는 의미에서 전통시대 역이 지녔던 정치성을 읽을 수 있다. 황제나 요임금에 가탁(假託)하여 위정자로부터 백성에게 역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사실 역은 위정자가 백성에게 내려 주는 시혜적인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혜는 순수하게 생각하면 매우 고마운 선물이지만, 시혜라는 것이 늘 그렇듯 이는 무엇을 주고받는 두 상대의 정치적 위계를 전제해야 성립할 수 있다. 바로 황제와 요임금은 지배자로서 시혜를 베풀고, 백성들은 피지배자로서 시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시혜와 수혜의 과정을 조금 더 정치적으로 해석해 보면, 지배자는 시혜를 통해 지배권이 실재함을 드러내고, 피지배자는 수혜를 통해 지배권의 실체와 이에 대한 복종을 인정하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가 바로 역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역을 내리고 받는 과정이 지배와 피지배의 정치적 관계를 확인하는 고도의 정치적 과정이 되는 것이다. 고대부터 동아시아의 어느 왕조에서나 역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반포하는 것을 가장 시급하고 긴요한 것으로 여겼던 이유가 바로 역이 함축하고 있는 이러한 정치적 의미에 있었다.

역을 주고받는 정치 행위가 지닌 의미는 한 왕조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가 중국의 왕조로부터 다투어 역을 받아 오고, 또 중국의 왕조는 우리나라에 역을 내려 주었던 것도 역을 주고받는 행위를 통해 중국과 우리나라 왕조 사이의 정치적 지배와 복종 관계를 확인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두 왕조 사이에 전달되는 역은 두 왕조가 서로 위계적 관계임을 확인하는 훌륭한 매개체였던 것이다.90)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역서를 매개로 나타난 지배와 피지배의 정치적 관계에 대해서는 전용훈, 「17∼18세기 서양 천문 역산학의 도입과 전개」,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편, 『한국 실학 사상 연구』 4 과학 기술편, 혜안, 2004, 275∼333쪽 참조.

지배와 복종의 정치적 관계를 확인시키는 매개물로서의 역이 제대로 기능하게 하려면,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가 역서에 부여된 본래적 의미를 온전하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바로 지배자는 자연의 시간을 가장 잘 반영한 역서를 만들어 자신이 지배자로서 합당하다는 점을 드러내고, 피지배자는 그렇게 만들어진 역을 자신의 생활 규범으로 삼아 지배자에 대한 복종을 확인해 주어야 한다.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왕조가 바뀌면 제도를 바꾼다.”는 뜻을 지닌 ‘수명개제(受命改制)’라는 믿음이 유지되어 왔다. 이 믿음은 각종 제도를 바꾸어 백성들에게 새 왕조가 성립되었음을 확인시키고, 또한, 새로운 제도가 더욱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는 것임을 선전하여 왕조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정치 행위의 기초가 되었다. 역이 이런 정치 행위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필수 불가결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왕조마다 가장 좋다고 평가된 역법을 채용하고, 천체의 운행과 어긋나는 부정확한 역법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였던 까닭도 바로 역이 지닌 정치적 의미 때문이었다.91)중국에서의 역법의 변화에 대해서는 이은성, 앞의 책, 18∼28쪽 참조.

한편,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에서는 중국 왕조와의 관계가 지배권을 인정받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때문에 한반도 내에서 왕조가 바뀌더라도 중국에서와 같은 수명개제의 이념을 명확하게 실천하기가 어려웠다. 우리나라의 왕조는 중국의 왕조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역을 받아 쓰는 일이 많았으므로, 왕조가 바뀌었다고 해서 매번 새로운 역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인정을 받고 싶은 중국 왕조에 따라 우리나라 왕조의 역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중국 지역이 여러 왕조로 분열되어 있으면, 한반도의 왕조는 정치적·외교적 목적에 따라 서로 다른 왕조와 접촉하며 관계를 맺은 나라의 역을 썼다. 또한, 중국의 왕조가 바뀌었을 때 한반도의 왕조는 바뀌지 않았음에도 어쩔 수 없이 중국의 새 왕조에서 채택한 역을 따라 역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경우도 있었다.92)고려시대의 중국 역법 도입의 상황을 보면, 역법이 한반도 왕조와 중국 대륙 왕조의 정치적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박성래, 「고려 초의 역과 연호」, 『한국학보』 10, 일지사, 1978, 135∼155쪽 참조).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매개하는 정치적 도구라는 것으로만 국한하여 역의 의미를 파악하면, 역이 실질적이지 못한 채 상징성만 강한 도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역이 일단 주고받는 정치 행위를 통해 백성들에게 전해지면, 그것은 대단히 광범위하고 강하게 백성들의 생활을 규제하는 규범으로 작동한다. 역이 지닌 정치성의 뒤편에는 실제로 한 사회가 따라야 할 시간적 규범의 총체가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매년 반사(頒賜)되는 역서에 수록된 수많은 시간적 규범들은 실제로 백성들의 생활 속에서 매우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작동한다.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종 영역에서, 다시 말해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역서에서 규정한 시간적 규범이 관철되는 것이다.

동아시아 전통 사회에서 사회적 규범으로서의 역의 역할이 가장 철저하고도 확실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의례적(儀禮的) 실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 역사를 지배한 유가적(儒家的) 이데올로기는 의례적 실천에서 역의 역할을 다른 문화권에서보다 훨씬 더 크게 만들었다. 이것은 유가적 이데올로기가 의례적인 실천을 강조하고, 의례에 큰 가치를 두는 특징을 지녔기 때문이다. 물론 서양에서도 역은 종교적 의례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지만, 동양에서만큼 강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먼 과거로 갈 것도 없이 현재도 관혼상제를 대표로 한 각종의 의례에서 우리 사회가 날짜와 시간을 얼마나 중요하게 취급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전통 사회에서 역이 의례적 실천에서 얼마나 강하게 규범으로 작동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전통시대에 벌어진 역법의 개정을 둘러싼 각종 논란 속에는 늘 의례적 실천과 관련된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역을 바꾸면 기존의 역에 따라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의례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역법을 채택하는 일은 매우 신중하여야 했고 논란도 많았다.

의례적 실천을 할 때 역에서 규정한 날짜와 시간을 중요하게 여긴 원인은 다시 되돌아가 역의 본래적 의미와 연결된다. 역은 본래 자연의 시간을 반영한 것이므로, 역에서 규정한 시간은 자연의 상태를 잘 기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가장 바람직한 실천 행위란 자연적 과정을 거스르지 않고, 나아가 일체가 되는 것으로 여겼던 전통시대 사람들이 의례적 실천에 서 역을 중요시하고 예외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 역이 자연의 시간을 반영한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역서는 사회에서 시간적 규범으로 작동하기 위해 수많은 장치를 갖추고 있는데, 연월일시의 시간적 분절을 기록함은 물론이고, 그 밖에도 간지, 윤달, 절기, 오행, 이십팔수, 십이지 등 각종의 시간적·사상적·종교적 의미를 지닌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이들 요소 각각에는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고도의 형이상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 전통 사회에서 역서는 단순한 시간표가 아니다. 전통 사회에서 역서는 시간을 둘러싼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의식의 총체이며, 이 사실이 현대 서양식 달력과 동아시아 전통 사회의 역서를 구별해 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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