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3장 역과 역서
  • 3. 조선식 역법, 칠정산
전용훈

고대부터 천문학은 매우 실용적인 학문이었다. 천문학은 시간을 알려 주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시간을 모른다면 문명적인 생활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고, 사람들은 언제 씨를 뿌리고 언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야 할지도 모르게 될 것이다. 어느 문명권에서나 가장 먼저 발달한 과학이 천문학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동아시아에서 천문학의 성과가 가장 압축적으로 구현된 매체는 역법이었다. 이렇게 보면 조선시대에 만든 칠정산(七政算)은 역사적 의미와 과학적 의미에서 단연 첫손에 꼽힌다. 이견의 여지는 있지만 칠정산은 ‘세종 때의 역법’이라고 할 수 있다.97)칠정산 편찬의 과정과 의미에 대해서는 유경로, 앞의 책, 167∼182쪽 ; 박성래, 「‘수시력’ 수용과 『칠정산』 완성: 중국 원형의 한국적 변형」, 『한국 과학사 학회지』 24-2, 한국 과학사 학회, 2002, 166∼199쪽 참조. 역법은 좁게는 오늘날 같은 ‘달력을 만드는 방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전통시대의 역법은 천문학 이론, 관측, 계산법이 망라된 천문학 지식의 총체적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칠정산도 역법으로 조선 초기에 이룩한 천문학 지식의 총체가 결집되어 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전통 역법은 오늘날의 달력처럼 날짜를 계산하고, 절기를 표시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전통시대에는 하늘에서 움직이는 모든 천체의 운행을 계산하고 예측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현대의 달력에는 수록되지 않는 오행성의 위치까지 계산하고 수록한 역 서도 만들었다. 역법의 내용 속에는 태양과 달의 운행을 계산하는 것은 물론 일식과 월식을 예측하고, 오행성의 운행까지를 이론화해서 하루하루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이론적 기초가 담겨 있었다. 칠정산은 바로 태양,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일곱 개 천체의 운행을 계산하는 방법을 정리한 것이다. ‘칠정(七政)’은 일곱 천체를 뜻하고, ‘산(算)’은 계산법을 의미하니 칠정산은 ‘일곱 천체의 운행 계산법’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전통시대 우리 조상들에게 천문학이 중요하였던 것은 달력을 만들기 위한 실용적인 필요에서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조상들에게 하늘은 단순히 관찰하고 탐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숭배의 대상이자 존재의 이정표였다. 중국 한나라 때부터 유교가 국가적인 이데올로기로 정착되면서, 한 국가를 세우고 위정자가 되는 것은 하늘의 명(命)을 받았을 때 가능하다는 생각이 정립되었다. 이를 천명사상(天命思想)이라 한다. 때문에 하늘을 얼마나 잘 읽어 내는가, 즉 천명을 얼마나 잘 받아 내는가에 따라 왕조의 권위와 정당성의 정도가 달라졌다. 최고의 위정자는 하늘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은 존재이고, 때문에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운행을 가장 정확히 파악하여야 했다. 하늘의 운행을 정확히 읽어 내는 도구가 천문학이라면,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은 천체의 운행과 변화를 반영한 역법이었다. 따라서 역법을 통해 일식과 월식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으면 그 위정자와 국가는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 정당성을 부여받았고, 만일 이것이 불가능할 때는 국가의 권위가 제대로 설 수 없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황제에게 복종하는 일개 제후국에 지나지 않는 고려나 조선은 자신의 역법을 만들면 안 되는 나라였다. 역법이나 천문학이란 하늘의 명을 받은 황제만이 추구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칠정산은 중국 역법을 빌어다 쓰는 수준에서 탈피해서 우리 손으로 완성한 우리 식의 역법이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역사적 의미가 있다.

중국에서 송나라 다음으로 원나라가 들어선 후 새로운 역법인 수시력 이 채택되었다. 천문학자인 곽수경(郭守敬)이 주축이 되어 만든 원나라의 수시력은 당시까지 중국의 역대 역법 중에서 가장 정교하고 정확한 역법이었다. 이 역법은 1281년부터 사용되었다. 명나라에서는 대통력을 채택하였지만, 사실상 대통력은 수시력의 체제를 대부분 수용한 것이었다. 수시력은 원나라의 사신을 통해 고려에 전해졌다. 그러나 고려는 이 새로운 역법을 곧바로 시행할 수 없었다. 역법의 원리와 사용법을 자세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충렬왕 때 전문가를 원나라에 보내어 수시력을 배워 오고서야 비로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고려에서는 수시력의 모든 내용을 완전히 소화한 상태에서 이를 적용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일식과 월식의 계산에는 수시력을 적용하지 못하고, 수시력을 도입하기 전에 사용해 왔던 선명력을 계속 쓸 수밖에 없었다. 일식과 월식의 계산은 매우 복잡한 원리와 계산식이 적용되어서 천문학 이론은 물론 고도의 수학적인 계산이 필수였다. 특히, 개방술(開方術)이라는 방법이 필요하였는데, 이는 고차 방정식(高次方程式)을 풀어내는 복잡한 계산법이었다. 고려에서는 아직 이러한 수학을 이해하고 적용할 수 없어서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예전부터 익숙한 선명력의 계산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일식과 월식의 예보는 고려 말까지 정확할 수 없었고, 예측이 어긋나면서 천문관들이 많은 곤란을 겪었다.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국가에서는 천문학을 빌어 왕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는데, 정확한 역법을 확보하는 것도 그 중의 하나였다. 조선에서는 역법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고려 말에 들어온 수시력, 그전부터 써 왔던 선명력, 그리고 고려 말에 다시 명나라에서 들어온 대통력까지 섞어 썼으나, 역법 지식은 여전히 고려 말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그만큼 역법은 하루아침에 수준이 높아질 수 없는 매우 복잡하고 정밀한 과학이었다.

조선의 건국과 국가의 정당성을 입증할 유용한 수단이었던 천문학은 국가의 기틀이 잡히면서 더욱 중요해졌다. 그리고 국가적으로 천문학을 중요시하면서 세종 때에는 수시력과 대통력을 완전히 이해하고, 나아가 조선의 경위도에 맞는 새로운 역법을 고안해 낼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였다. 1433년(세종 15) 세종은 신하들에게 명나라의 대통력을 연구해서 역법의 원리를 완전히 소화하도록 지시하였다. 당시 역법 연구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한 사람은 이순지(李純之, 1406∼1465)와 김담(金淡, 1416∼1464)이었다.98)이순지와 김담의 천문학 연구에 대해서는 전용훈, 「이순지: 전방위적인 업적을 남긴 천문 역산학자」, 김근배 외 지음, 『한국 과학 기술 인물 12인』, 해나무, 2005, 131∼161쪽 ; 유경로, 앞의 책, 242∼269쪽 참조. 이들은 실제 관측을 행하고, 역법의 원리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를 수행하면서 이 연구를 토대로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완성하였다. 이들은 먼저 명나라의 대통력을 연구하여 그 결과로 『대통력일통궤(大統曆日通軌)』, 『태양통궤(太陽通軌)』, 『태음통궤(太陰通軌)』, 『교식통궤(交食通軌)』, 『오성통궤(五星通軌)』, 『사여전도통궤(四餘纏度通軌)』 등을 편찬하였다.99)통궤의 편찬과 역법 연구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면우, 「이순지·김담 찬 대통력일통궤 등 6편의 통궤본(通軌本)에 대한 연구」, 『한국 과학사 학회지』 10-1, 한국 과학사 학회, 1986, 76∼87쪽 참조. 이들 책은 『칠정산내편』을 완성하기 위한 전초 단계의 역법 이론을 망라한 것으로, 세종 때의 천문학자들이 중국의 역법 지식을 완전히 소화하였음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된다.

확대보기
『정묘년교식가령』
『정묘년교식가령』
팝업창 닫기

칠정산이 완전히 소화된 조선의 역법이라는 것은 1447년(세종 29) 정묘년에 일어난 일식을 실제로 계산한 『정묘년교식가령(丁卯年交食假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론적으로 정립된 칠정산을 실제 일식과 월식의 계산에 적용하여 정확성을 확인한 계산 예를 싣고 있다. 역법 연구를 통해 축적한 지식이 실제 천체 현상에서도 잘 적용되는지를 확인한 것이다. 이후 칠정산은 서운관 관리를 뽑는 과거 시험 과목에 포함되었고, 관리가 된 후에도 수시로 치러지는 인사 고과 시험에 필수 과목이 되었다.

칠정산은 사용하는 수치가 모두 한양의 위도를 기준으로 해서 역법의 정확도가 눈에 띄게 개선되었 는데, 이 점은 정밀성과 정확성을 평가하는 과학적 견지에서 큰 의미가 있다. 또한, 민족적 견지에서도 본국의 수도를 기준으로 한 본국의 역법이라는 의미가 있다. 1432년(세종 14)에 장영실(蔣英實) 등은 정밀한 천문 관측 기구인 간의를 나무로 제작하였고, 천문학자들은 한양의 북극 고도(北極高度, 위도)를 측정하였다. 원래 수시력, 대통력, 회회력(回回曆)에서 정한 해가 뜨고 지는 시각과 밤낮의 길이는 각각 중국의 경위도에 따랐으므로 한양을 기준으로 한 것과는 당연히 차이가 났다. 조선을 기준으로 한 정확한 달력을 얻으려면 한양에서 매일 해가 뜨고 지는 시각과 밤낮의 길이를 측정하여 이를 표준으로 삼아야 하였는데, 바로 칠정산은 한양을 기준으로 한 우리의 시각을 적용하였던 것이다.

확대보기
『칠정산내편』
『칠정산내편』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칠정산외편』
『칠정산외편』
팝업창 닫기

『칠정산내편』과 함께 편찬된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원나라나 명나라에서는 아랍의 역법인 회회력을 도입해서 수시력이나 대통력의 계산을 보조하는 데 사용하였다. 회회력은 특히, 일식과 월식 계산에 정밀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순지와 김담은 한양의 위도에 맞춘 수치를 적용하여 회회력의 방법을 총정리해서 『칠정산외편』을 완성하였다. 이로써 칠정산은 대통력을 기본으로 한 전통의 역법인 『칠정산내편』과 회회력을 기본으로 한 『칠정산외편』의 두 부분으로 완전 히 체계가 갖추어졌다. 『칠정산내외편』이 완성된 후 조선에서는 『칠정산내편』으로 달력을 만드는 역 계산과 교식(交食)을 계산하는 기본 작업을 하였고, 『칠정산외편』으로 내편의 일식과 월식 계산을 확인하고 보조하였다. 흔히 칠정산이라고 하면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아울러 부르는 것이다.

칠정산이 완성된 후, 조선은 청나라에서 서양의 역법에 기초해서 만든 시헌력을 1654년(효종 5)에 새로 채택할 때까지 이것을 기본 역법으로 사용하였다. 시헌력을 채택할 때도 이를 이해하고 습득하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렸지만, 결국 1700년대 초반에는 시헌력도 완전히 습득해서 우리 실정에 맞게 사용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칠정산을 만들고 적용해 온 경험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효종 때 시헌력으로 개력하기는 하였지만, 칠정산은 개력 이후에도 여전히 중요한 역법으로 사용되었다. 천문 계산을 할 때에는 시헌력으로 기본적인 계산을 하면서도 항상 칠정산을 사용해서 다시 검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조선 후기까지도 지속적으로 썼을 정도로 칠정산은 우리나라 위도에 기준을 둔 우리나라의 역법이었기 때문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