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3장 역과 역서
  • 7. 달력 만들기
전용훈

전통시대 천문 관서의 주요 임무는 천문의 관측과 역서의 편찬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천문의 관측이란 날마다 하늘에서 일어나는 변화, 즉 일식이나 월식, 태양이나 달의 움직임, 오행성의 움직임과 그 주변의 상황, 별의 밝기 변화, 혜성의 출현, 별똥별의 출현 등을 빠짐없이 살피는 것을 말한다. 또한, 역서의 편찬이란 일상생활에서 중요하게 사용될 날짜와 절기, 그리고 날마다 그날의 운세가 수록된 날짜표, 즉 오늘날의 달력과 같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천문 관서에서 역서를 어떻게 편찬하였는지를 알려 주는 좋은 자료는 『서운관지(書雲觀志)』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의 천문 관서인 서운관(혹은 관상감)에서 역서를 편찬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아쉽게도 고려나 그보다 먼 과거의 왕조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역서를 편찬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사료는 거의 없다. 다만 생활에 사용할 역서를 천문 관서에서 해마다 만들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의 구조는 시대를 통틀어 일관되므로, 조선시대의 예를 통해 그보다 먼 과거의 일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천문 관서에서 역서를 편찬하는 일 중 가장 긴요한 것은 해마다 쓸 수 있는 1년치의 역서를 만드는 일이다. 오늘날 사용하는 것처럼 매월의 날짜 가 표시된 12장짜리 달력을 생각하면 된다. 해마다 새해가 되기 전에 이런 달력을 만들어 민간에 배포하는 것이 서운관의 커다란 임무였다. 서운관에서는 이와 같은 1년치의 달력 외에도 때때로 지나간 수년치를 한꺼번에 묶은 백중력(百中曆), 앞으로 다가올 긴 기간의 달력을 미리 계산하여 수록한 천세력(千歲曆)이나 만세력(萬歲曆), 그리고 천체들의 위치를 정밀하게 계산하여 수록한 칠정력(七政曆) 등 다른 역서도 만들었다.104)역서의 종류와 역서 편찬의 과정에 대해서는 이은성, 앞의 책, 321∼365쪽 ; 허윤섭, 앞의 글, 200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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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관지』
『서운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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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만드는 1년치의 역서는 보통 ‘그해의 달력’이라는 뜻에서 ‘연력(年曆)’이라고 하였다. 그해의 달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달이 큰달인지 작은달인지, 그리고 절기는 어느 날짜에 들어가야 하는지 등을 계산하여야 한다. 달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필요한 계산을 어떤 원칙에 따라 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하는데, 이를 결정해 주는 것이 앞서 말한 역법이다. 우리나라는 역사상 신라에서는 인덕력(麟德曆), 고려에서는 선명력, 조선에서는 칠정산과 시헌력을 사용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런 서로 다른 역법이 바로 달력을 만들기 위해 따랐던 서로 다른 계산 원칙이었다. 일단 어떤 시기에 역법을 바꾸어 옛 계산법을 버리고 새로운 계산법을 적용하기로 하면, 또다시 새로운 역법을 채용하기 전까지는 정해진 계산법을 따라서 달력에 필요한 계산을 한다.

오늘날에도 연말에 새해의 달력이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새해에 쓸 달력은 새해가 되기 전에 만들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옛날에도 달력은 아직 새해가 되기 전 동지 무렵에 만들어 내는 것이 원칙이었다. 우리나라의 여러 왕조에서는 중국의 여러 왕조와 관계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중국의 왕조에서 발행한 새해의 역서를 받아 오는 관례가 있었다. 중국은 황제국으로서 새해의 역서를 우리나라에 내려 주면서 황제국의 위신을 세우고, 우리나라는 황제국에 순종하는 공손함을 표시하는 수단으로 역서를 주고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도 새해의 역서는 동지 무렵에 만드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조선시대의 교통 형편을 고려하면 조선의 사신이 중국에 가서 이것을 받아 국내에 돌아오면 벌써 새해가 되어 국내에서 역서를 반포할 시기를 놓쳤을 것이다. 결국 조선은 국내에서 쓸 새해의 역서를 중국의 역서를 받아 오기 전에 만들어 놓아야 하였으므로, 사신이 중국에 가서 황제가 내려 주는 새해의 역서를 받아 오는 일은 형식적인 관례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역서를 만드는 계산 방법은 중국의 역법을 따를 수밖에 없었는데, 이 때문에 신라에서는 인덕력, 고려에서는 선명력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보통의 달력에는 달 이름, 그달의 날짜, 요일, 양력 날짜에 함께 표기된 음력 날짜, 절기 등 몇 가지 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특별한 용도를 위해 만든 달력에는 좀 더 복잡하게 날마다의 일진(日辰), 절기의 시각,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시각, 밀물과 썰물의 시각 등을 기재하는 경우도 있다. 일진, 절기의 시각, 일출과 일몰 시각, 밀물과 썰물의 시각 등의 사항은 달력에서 요일과 날짜만 보고 사는 현대의 도시인들에게는 별로 필요 없지만, 제례나 어업에 관계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유용한 정보이다. 따라서 좋은 달력은 그 달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생활에 유용한 정보를 잘 담고 있어야 한다. 전통시대에도 달력에는 백성들의 생활에 꼭 필요한 사항들이 기재되었는데, 이 사항들은 현대에 필요한 사항과는 전혀 달랐다. 역서에 기재된 사항들을 통해 전통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였는지 그들의 생활 방식의 일면을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달력의 종류에 따라 기재하는 사항이 조금씩 달랐지만, 해마다 반포하던 일반적인 역서를 보면 달의 이름과 날짜 외에 전통시대 사람들이 생활하는 데 어떤 내용이 필요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우선 전통시대의 달력은 음력이었으므로 윤달이 든 해에는 13개월이고, 보통의 해에는 12개의 달이 있었다. 한 해의 총 날짜 수가 변하므로 역서에는 반드시 한 해의 총 날짜 수를 표시해 주어 윤달이 들었는지 여부를 알려 주었다. 달력이라는 말로부터 알 수 있듯이, 역서는 달별로 그달에 들어 있는 각각의 날짜를 한 장의 종이에 표기하였다. 달의 이름에는 꼭 총 날짜가 30일인지 혹은 29일인지 대소를 표시하고, 각 날짜가 배열된 칸에는 그달에 들어 있는 절기를 해당 날짜에 적어 놓았다. 달의 이름 아래 그달의 날짜가 배치된 대체적인 구조는 오늘날 사용하는 달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은 각 날짜에 함께 표시된 여러 가지 생활상 필요한 정보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반드시 60갑자로 순환하는 일진과 그날의 기운을 지배하는 오행 중 한 요소, 28개의 별자리 중 그날의 운세를 지배하는 하나의 별자리, 12가지로 순환하는 운세 중 하나의 요소, 이사·집수리·여행·결혼 등 각종 생활에 좋은 날인지 나쁜 날인지 길흉을 함께 적어 놓았다. 어쩌면 그날이 몇 월 몇 일인지보다 그날에 어떤 운세가 작용하며, 어떤 일에 길하고 흉한지를 알아보는 것이 전통시대 사람이 달력을 보는 주요한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역서 자체에 기재된 내용에는 천문학적·수학적 복잡함이 전혀 없어 보이지만, 천문 관서에 종사하여 이런 역서를 만들어 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역서 내용의 간단함에 반비례할 만큼 복잡하고 어려운 계산을 해야 하였다. 어느 달이 큰달이 되어야 하는지 작은달이 되어야 하는지, 절기는 어떤 날에 배치될지 등을 결정하려면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수학적 계산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계산을 얼마나 정확하게 해내는가가 그 시대 역법 지식의 수준을 결정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세종대에 칠정산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이런 계산을 아주 능숙하게 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인 계산을 통해 다음 해의 역서를 만들어 낼 수는 있었지만, 계산한 결과를 늘 중국에서 발행된 역서와 비교해 보고 틀린 점이 있으면 바로잡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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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력(明時曆)
명시력(明時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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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관에서는 역서를 만들 때 먼저 필요한 수학적 계산을 하는 전문가들이 계산하고, 이들의 계산 결과에 따라 역서의 꼴을 정하고, 이를 활자화하여 인쇄하였다. 보통 새해의 역서가 다 만들어지고 나면 다음 해의 역서를 만들 조를 새롭게 짠다. 각 조는 1년 내내 다음 해의 역서를 만들 계산을 행하고, 역서 인쇄에 필요한 종이를 조달하고, 인쇄된 역서를 배포하는 일을 담당하게 된다. 보통 네 개의 조가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각각 한 계절씩 맡아서 역서에 필요한 계산과 검산을 하였다. 검산이 끝나면 그 결과가 반영된 역서의 초본을 글씨를 잘 쓰는 관원이 목판에 새길 용도로 다시 깨끗이 쓴다. 이것을 목판에 새겨서 찍어 보고, 그 내용을 다시 여러 차례 교정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그해 4월부터 이듬해 1월치 달력부터 인쇄를 시작해서 동지 전에 일을 마무리하였다. 한 해에 인쇄되는 역서의 양은 시대 상황에 따라 달랐을 것이나, 조선 후기 정조 때에는 약 30만 부, 고종 때에는 약 35만 부를 찍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토대로 추론해 보면 조선 초에는 적어도 10만 부 정도는 찍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선 후기의 인구를 적게 잡아 600만으로 잡으면 인구에 비해 역서 발행량은 상당히 적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흔한 것이 달력이지만, 전통시대에 역서는 귀한 책이었던 것이다.

서운관에서 만든 역서는 동지 무렵에 배포되었다. 조선 후기의 예를 보면 인쇄된 역서 가운데 우선 대궐에서 쓸 것을 바친 다음 왕족들, 고위 관직자, 서울과 지방의 각 관서 등에 전달되었다. 이처럼 공적인 필요에 사용된 역서는 전체의 약 8분의 1 정도 되고, 나머지는 모두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도록 하였다. 서운관에서는 일반 백성들에게 필요한 역서를 판매하였는데, 역서를 팔아서 생긴 이익은 관청의 재정에 충당하거나 서운관 관원들의 부족한 녹봉을 보전하는 데 사용하였다. 서운관 관원들 중에는 종이 값과 인쇄비를 서운관에 내고, 보관된 목판을 사용하여 사적으로 인쇄한 역서를 팔아 돈벌이를 삼는 사람도 나왔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다투어 인쇄해 버리면 오히려 판매가 어려워 가격이 떨어지거나, 수요는 많은데 인쇄된 양이 적으면 값이 크게 오르기도 하는 등 상황에 따라 역서의 가격이 등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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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세력
천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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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운관에서는 민간에서 쓸 용도의 1년치 역서, 즉 연력 외에도 여러 가지 역서를 만들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칠정력이다. 칠정력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칠정, 즉 태양, 달, 오행성을 통틀어 일곱 천체의 위치를 표시한 역서이다. 더불어 지금은 거의 의미가 없는 네 개의 가상적인 천체인 사여성(四餘星)의 위치도 표시하였다. 이것은 민간에서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임금과 세자에게 바치고 또 서운관에서 업무에 참고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전통시대 임금은 하늘의 의사를 대행하는 사람으로 여겼으므로, 임금은 천체들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에서 칠정력을 임금과 세자에게 바쳤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서운관에서는 특이한 천문 현상을 관측하는 일도 중요하였으므로, 천문 관측에는 주요한 천체들이 날마다 이동하는 위치를 계산하여 수록한 칠정력을 참고할 필요가 있었다. 서운관에서는 또 내용삼서(內用三書) 혹은 내용삼력이라 하는, 궁궐 내에서 쓰는 왕실용 역서를 제작하였다. 역서의 체제와 수록된 항목은 해마다 발행하는 민간의 연력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그날을 지배하는 운세와 길흉의 판단이 국왕이나 왕실의 행사에 참고가 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백중력, 천세력, 만세력 등은 모두 장기간에 걸친 계산 결과를 한꺼번에 수록한 역서이다. 긴 기간을 다루어야 하므로 연력처럼 날짜별로 구분할 수는 없어서 달의 대소, 대표적인 몇몇 날짜의 일진과 절기 등만을 실었다. 천세력이라는 말은 1,000년 동안의 역서라는 뜻이지만, 실제 포괄 기간은 100년이었다. 보통 10년에 한 번씩 만들어서 지난 역서에 앞으로의 10년이 덧붙여지므로 오래되면 수백 년을 포괄하는 역서가 된다. 만세력은 조선이 황제국임을 선언한 고종 때부터 천세력보다 더 웅장하고 유구한 의미를 담기 위해 이름을 바꾼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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