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4장 땅의 표현과 기술
  • 3. 국토 경영과 지도 제작
  • 지도 제작의 목적
오상학

우리나라에서의 지도 제작은 고대부터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산악 국가인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의 통치뿐만 아니라 전쟁 같은 유사시에도 지도가 요긴하게 사용되었던 사실을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도 많은 지도가 제작·이용되었지만, 남아 있는 지도가 없어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없다. 지도 제작의 흐름은 조선으로 계속 이어져 건국 초기부터 국토 경영을 위해 다양한 지도가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조선 전기에 국가가 주도한 지도 제작은 대부분 행정적·군사적인 목적 아래 이루어졌다. 행정적 목적으로 제작된 경우는 지역의 형세·인구·재정 등과 관련된 내용을 지도를 통해 파악하려는 것이고, 군사적 목적으로 제작한 경우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고 전쟁 같은 유사시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국가 행정용으로 제작한 지도에는 행정에 필수적인 정보를 수록하였는데, 고을 경내의 관사 배치, 산천의 내맥(來脈), 도로의 원근 이수(遠近里數), 이웃 고을과의 사방 경계 등을 담았다. 이를 통해 고을의 상대적인 위치와 더불어 전체적인 형세, 면적, 도로를 통한 연결 관계 등을 파악할 수 있다.

행정용 지도가 제작·이용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행정 구역 개편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질 때이다. 세종 때 진주에 소속되었던 곤명현을 남해현과 합쳐 곤남군으로 승격시킬 때118)『세종실록』 권3, 세종 1년 3월 신미.와 낙동강의 동쪽에 있는 해평현을 경상 좌도에 속하게 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을 때119)『세종실록』 권100, 세종 25년 4월 임진. 지도를 기본 자료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세조대 박원형(朴元亨, 1411∼1469) 및 이조 당상(吏曹堂上)과 한확(韓確, 1403∼1456) 등이 주군(州郡)의 합병을 논할 때 지도를 이용하였다.120)『세조실록』 권2, 세조 1년 11월 임신.

또한, 국가의 재정 확보를 위한 기초 자료로도 활용되었는데, 고을에 속한 면(面)의 토지 등급을 매길 때나 고을의 세금을 거두거나 인력을 징발할 때 기초 자료로 이용하였고, 백성들이 도망가서 사는 한광지(閑曠地)의 상황을 보고할 때도 지도를 제작하여 활용하였다.121)『성종실록』 권170, 성종 15년 9월 을사. 아울러 건축이나 토목 공사 때에도 지도가 활용되었다. 성종 때 이파(李坡, 1434∼1486) 등이 전탄(箭灘)의 개거(開渠) 문제를 논의할 때 지도를 사용하였고,122)『성종실록』 권184, 성종 16년 10월 갑오. 궁궐의 각 문에 무장이 직숙(直宿)할 임시 숙소를 조성할 때에도 지도를 그려 사용하였다.123)『광해군일기』 권126, 광해군 10년 4월 신묘. 또한, 중종 때 판윤 이점(李坫) 등이 원각사(圓覺寺)의 지도를 올려 빈 터에 민간의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청하였던 사례도 있다.124)『중종실록』 권16, 중종 7년 8월 임인.

군사적 목적에 의한 지도의 제작·이용도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먼저 국방 정책을 논의할 때에 지도가 자주 활용되었다. 태종 때 함경도 경원부의 방어 대책을 논의하면서 지도를 상고하였고,125)『태종실록』 권19, 태종 10년 4월 기미. 세종도 여러 관리와 북방 방어책을 논의하면서 지도를 종종 활용하였다.126)『세종실록』 권90, 세종 22년 8월 기묘. 세조 때는 지도 제작으로 명성을 날렸던 평안도 경차관 양성지(梁誠之, 1415∼1482)가 여연(閭延)·무창(茂昌)·우예(虞芮) 등 세 고을의 지도를 가지고 와서 북방 방어책을 논의하기도 하였고,127)『세조실록』 권2, 세조 1년 11월 임신.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경상도지도를 제작해서 유 사시 국방 전략의 자료로 삼았던 대표적인 인물이다.128)김종직(金宗直), 『점필재집(菟畢齋集)』 권2, 경상도지도지(慶尙道地圖誌).

변경 지방의 동태 파악에도 지도가 제작·활용되었다. 성종 때 영안북도 절도사 성준(成俊, 1436∼1504)이 올적합(兀狄哈)의 동태를 조사하여 보고할 때 지도를 만들어 진상하였으며,129)『성종실록』 권253, 성종 22년 5월 임오. 광해군 때는 동지(同知) 장만(張晩, 1566∼1629)이 오랑캐 지역의 지도를 그려 바쳤는데,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거리의 원근과 산천의 형세 및 부락의 이름 등을 상세히 묻게 하고, 숙장(宿將)과 노졸(老卒)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을 참고로 하여, 때로는 직접 높은 곳에 올라가 그 지점을 확인하기도 하면서 제작하였다.130)『광해군일기』 권35, 광해군 2년 11월 기유.

또한, 지도를 중앙 관청에서 제작하여 지방 관청으로 내려 보내기도 하였는데, 세종 때 함길도의 지도를 중앙 관청에서 제작하여 관찰사에 주고 그것을 모사·제작하여 감영(監營)에 보관하고 각 변장들의 처소에도 나누어 보내도록 하였던 사례도 있다.131)『세종실록』 권64, 세종 16년 4월 병진. 진보(鎭堡) 같은 군사 기지의 설치 문제를 논의할 때도 지도가 사용되었는데, 문종 때 평안도 지역 관방(關防)의 배치를 논의할 때와 성종 때 경상도 사량진(蛇梁鎭)의 이설(移設) 문제를 논의할 때도 지도를 사용하였으며,132)『문종실록』 권3, 문종 즉위년 8월 정유 ; 『성종실록』 권177, 성종 16년 4월 정묘. 선조 때 한강의 별영(別營) 설치와 관련하여 한강 일대의 형세를 지도로 제작하도록 명하기도 하였다.133)『선조실록』 권65, 선조 28년 7월 계유. 또한, 축성을 논의할 때도 지도가 활용되었는데, 세조 때 우참찬 황수신(黃守身, 1407∼1467)이 경상도지도 및 웅천현도(熊川縣圖)를 올리고 웅천 축성을 청하기도 하였다.134)『세조실록』 권1, 세조 1년 7월 을미.

무엇보다 지도가 가장 요긴하게 활용되는 시기는 바로 전쟁 때이다. 군사 작전을 세울 때 지도가 필수적인데, 세조 때 함경도 도체찰사 신숙주(申叔舟, 1417∼1475)가 야인을 토벌할 때 도리의 원근과 부락의 다소를 지도를 통해 부장들에게 가르쳐 주었다.135)『세조실록』 권21, 세조 6년 9월 갑신. 특히, 임진왜란 시기에 지도가 중요하게 이용되었는데, 비변사(備邊司)에서 왜인들의 해로 지도(海路地圖)를 보고 그 내용이 매우 상세하게 되어 있어서 남군(南軍)이 한강을 건널 때 이 지도를 보고 지키기를 청하였고,136)『선조실록』 권26, 선조 25년 5월 갑신. 인성 부원군 정철(鄭澈, 1536∼1593)은 산천의 도 리와 적진의 원근과 방수(防守)의 형세를 알기 위해 방어사 곽영(郭巆)과 순찰사 허욱(許頊)으로 하여금 지도를 그려 바치게 하였다.137)『선조실록』 권35, 선조 26년 2월 신해. 또한, 구원병으로 조선에 온 명군(明軍)이 형세를 파악하여 군사 전략을 세우기 위해 자세한 조선 지도를 요구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접반관(接伴官) 서성(徐渻, 1558∼1631)이 중국에서 온 명군에게 지도를 주면서 군사 작전의 자료로 삼도록 하였고,138)『선조실록』 권37, 선조 26년 4월 갑진. 합천에 있던 총병(總兵) 유정(劉綎)이 진주성을 구원하기 위해 경유하는 도로가 자세히 그려진 지도를 요구하기도 하였다.139)『선조실록』 권41, 선조 26년 8월 임오. 이처럼 조선 전기의 지도 제작은 행정적·군사적 목적 아래 국가 주도로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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