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4장 땅의 표현과 기술
  • 4. 지리지, 국토 정보의 체계적인 기술
  • 16세기 이후의 사찬 읍지
오상학

조선 전기 국가 주도의 전국 지리지 편찬이 1530년(중종 25)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간행과 더불어 종결되면서 지리지의 양식은 변화하기 시작하여, 16세기 후반부터는 국가의 명령에 의하지 않고 지방 단위로 사림(士林)과 수령을 중심으로 지리지가 제작되는데 이것이 읍지(邑誌)이다. 읍지란 각 고을의 지리지로서, 지방 행정 단위인 부(府)·목(牧)·군(郡)·현(縣) 등을 단위로 하여 저술된 것이다. 16세기 이후에는 읍지가 광범위하게 편찬되어 조선시대의 지리지를 대표하는데, 사찬(私撰) 읍지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시기 편찬된 읍지는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현상을 보이지만, 학맥과 지역상으로 크게 남북으로 구분된다. 경상도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 지역에서는 퇴계 이황의 문인인 남인들이 중심이 되었고, 경기도 이북의 서해 관서 지방에서는 윤두수(尹斗壽, 1533∼1601)를 선두로 한 기호 서인들이 읍지를 편찬하였다. 이러한 읍지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편찬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원인은 무엇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갖는 성격에 기인한다. 즉,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시문·예속·인물·고적 등 인문적인 면이 강조되면서 호구(戶口)·전결(田結)·군액(軍額)·공부(貢賦) 등 사회 경제적인 측면이 약하였기 때문에 이를 보충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둘째, 전란 이후 피폐된 민심을 수습하고 혼란된 사회를 안정 시켜야만 하였다. 셋째, 이러한 사회 실정 속에서 지방에 부임한 수령은 지방 통치의 수단으로서 지방 사정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구하였다. 아울러 이 시기에 사림파 유학자들이 향촌 사회를 배경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었던 점 또한, 읍지 편찬의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이 시기에 편찬된 읍지를 보면, 경상도 지방에서 작성된 것으로 의성의 읍지인 이자(李耔)의 『문소지(聞韶誌)』(1507, 전하지 않음), 정구(鄭逑)의 『창산지(昌山誌)』(1581, 전하지 않음)와 『함주지(咸州誌)』(1587), 권기(權紀)의 『영가지(永嘉誌)』(1608), 이준(李埈)의 『상산지(商山誌)』(1617)와 『일선지(一善誌)』(1630), 성여신(成汝信)의 『진양지(晉陽誌)』(1631)가 있다. 경상도 이외 지역의 읍지로는 윤두수의 『연안읍지(延安邑誌)』(1581), 『평양지(平壤誌)』(1590), 이상의(李尙毅)의 『성천지(成川誌)』(1603), 이식(李植)의 『북관지(北關誌)』(1617), 이수광(李睟光)의 『승평지(昇平誌)』(1618)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경상도에서 최초로 작성된 읍지인 『함주지』를 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없는 새로운 항목이 첨가되었는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각리(各里)·호구·전결·제언(堤堰)·관개(灌漑)·군기(軍器) 등이다. 각리 항목에는 각리마다 사방 경계를 자세히 기록하고, 동서남북의 거리 및 이(里)의 크기, 속방(屬坊)의 수와 이름, 토지의 비척(肥瘠), 수전·한전의 정도, 거민(居民)의 신분, 풍속 등을 기재하였다. 호구·전결도 각각의 이를 단위로 기록하여 세부 지역까지 상세히 파악하였다. 이 밖에도 『함주지』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지 않았던 단묘(壇廟)·임관(任官)·유배(流配)·선행(善行)·문과(文科)·무과(武科)·사마(司馬)·총묘(塚墓)·정표(旌表)·책판(冊板)·총담(叢談) 등의 항목이 첨가되거나 독립 항목으로 설정되었다. 이들 항목은 지방의 풍속을 교화하고 명분을 바로잡기 위한 이른바 ‘선속(善俗)’의 요체가 되는 것들이다.

이후 경상도 지방에서 편찬되는 읍지들은 이러한 『함주지』의 체제를 많이 따랐는데, 권기의 『영가지』, 성여신의 『진양지』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읍지는 항목과 체제가 상당히 유사하여 같은 맥락에서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임진왜란 이전의 읍지 편찬 목적과 필요성이 17세기 전반까지 동일하게 지속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임진왜란 직전의 공법(貢法) 체계의 문란, 수취(收取) 질서의 붕괴, 향촌 사회의 파괴와 농민의 유리(遊離) 현상으로부터 제기되었던 향촌 질서의 안정이라는 문제는 임진왜란 이후에 이르러 파괴된 향촌 질서의 복구라는 문제로 제기되었지만, 기본 입장과 필요성은 동일하였다.146)양보경, 『조선시대 읍지의 성격과 지리적 인식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지리학 논총』 별호 3, 1987.

확대보기
『영가지』
『영가지』
팝업창 닫기

한편, 서북 지방에서 편찬된 읍지들도 양식 면에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연안읍지』는 『함주지』와 비교해 볼 때, 군총(軍總)·창고(倉庫)·진상(進上)·관속(官屬) 등이 첨가된 반면, 관개(灌漑)·책판(冊板)·제영(題詠) 등이 누락되어 있다. 『평양지』에서는 문담(文談)·신이(神異)·잡지(雜志)·시(詩)·문(文) 등의 문적(文蹟)이 강화되었는데, 이는 평양의 장구한 역사성과 관련된다. 『성천지』도 대체적으로 『평양지』와 유사하다. 이들 서북 지 방의 읍지들도 기본적인 체제는 경상도의 읍지와 유사하였는데, 이는 16세기 후반 읍지 편찬의 동일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이 시기 편찬된 읍지는 조선 전기 지리지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세종대의 지리지 계열과 『동국여지승람』 계열을 종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이전 시기 전국 지리지들이 지니고 있었던 편향을 극복한 것인데, 세종대 지리지의 장점인 정치·경제·군사·사회적인 내용과 『동국여지승람』의 장점인 인물·예속·시문 등을 겸비한 체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간행된 지리지 중에서는 가장 풍부한 내용과 최신의 지역 정보를 수록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