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5장 풍수지리와 정치
  • 2. 통일신라 말기와 고려 초의 풍수지리
  • 통일신라 말기의 사회와 풍수지리
임종태

통일신라 말기 풍수지리에 일어난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라에서 고려로 이행하던 당시의 정치적·사상적 상황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8세기 후반에 신라는 이전까지의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번영의 시기를 마감하고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경주의 중앙 정치는 귀족들 사이의 권력 쟁탈전으로 얼룩졌고, 그와 동시에 지방에서는 경주의 귀족 세력을 위협하는 독자적인 정치 세력으로 호족들이 부상하였다. 훗날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워 신라에 반기를 든 견훤(甄萱, 867∼936)과 궁예(弓裔, 870∼918)가 신흥 지방 호족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들 지방 호족들은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중앙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이러한 신흥 정치 세력은 사상의 측면에서도 독자적인 경향을 표방하였다. 기존의 교종(敎宗) 불교를 대신하여 선종(禪宗)이 지방 호족들의 지원을 받으며 옛 백제와 고구려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선종과 함께 지방 호족들의 정치적 지향을 뒷받침하였던 또 하나의 사상적 지주가 바로 풍수지리였다. 이미 신라의 쇠락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되었고, 지방 호족들이 자기 근거지에서 신라 왕실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던 상황에서, 당시의 풍수지리는 신라의 도읍 경주를 대신할 새로운 지역의 정치적 부상을 예언하는 데 이용됨으로써 신흥 지방 호족들의 정치적 이해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즉, 신라의 도읍 경주는 지기(地氣)가 쇠하여 더 이상 나라의 중심지가 될 수 없으며, 개성·평양 등의 다른 지역이 신라를 대신할 새로운 왕조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 풍수지리 이론의 형태로 제기되었던 것이다. 결국 신라 말기 풍수지리는 왕조의 미래를 예언하는 ‘도참(圖讖)’ 사상의 성격을 띠며, 당시 왕조 교체를 둘러싼 사상적 쟁점의 중심으로 부각되었다.

이와 같이 풍수지리가 신라 말기 사회에 부각되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도선이었다. 그는 당시 영향력을 키워 가던 선종의 동리산문(桐裏山門)에 속한 선승이었다. 선종에 속한 승려로서 풍수지리설을 제창한 그의 경력 자체가 지방 호족을 지원하던 양대 사상적 경향인 선종과 풍수지리가 당시에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하지만 정작 도선의 생애와 특히, 그가 어떻게 풍수지리를 배웠고, 이후 어떤 이론을 전개하였는지를 알려 주는 믿을 만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도선에 관해 남아 있는 이야기는 대부분 고려 이후의 것으로, 고려 왕실의 등장과 성취를 뒷받침하는 설화로 윤색되어 있다.

도선이 죽은 지 150여 년이 지난 고려 의종 때 최유청(崔惟淸, 1095∼1174)이 쓴 선각국사비문(先覺國師碑文, 1150)에 따르면, 도선은 전남 영암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김씨였다고 한다. 그가 태종무열왕의 서손(庶孫)이 라는 설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20세에 동리산 대안사(大安寺)에서 선종을 일으킨 혜철(惠哲, 785∼861)의 문하에 들어갔고, 이후 전국을 유람한 뒤에 광양의 옥룡사(玉龍寺)에 정착하여 72세로 입적할 때까지 그곳에 주석(住錫)하였다. 선각국사비문에서 도선이 풍수지리를 배우게 되는 과정을 묘사한 부분은 사실 신화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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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 국사 진영
도선 국사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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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스님이 옥룡사에 주석하기 전에 지리산 구령(甌嶺)에 암자를 짓고 있었는데, 이인(異人)이 스님 앞에 와서 이르기를, “제자가 세상 밖에 숨어 산 지 거의 수백 년이 된 인연으로 하여 조그만 술법을 가지고 있어서 바치려고 합니다. 존사(尊師)께서 천한 술법이라고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훗날 남해(南海)의 물가에서 전하겠습니다. 이것도 역시 대보살의 구세 도인(救世度人)하는 방법입니다.”라고 하고는 인하여 보이지 않았다. 스님이 기이하게 생각하고 기약한 곳을 찾아갔더니 과연 그 사람을 만났는데, 모래를 쌓아 산천의 순역(順逆)의 형세를 보여 주었다.

이를 통해 풍수의 이치를 깨달은 도선은 이후 음양오행의 술법을 더욱 연구하였으며, 이미 쇠멸의 길로 들어선 신라를 대신하여 새로이 천명을 받을 이가 송악(松嶽, 훗날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서 태어나리라고 예견하게 되었다고 한다.153)『동문선(東文選)』 권117, 비명(碑銘),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白鷄山玉龍寺贈諡先覺國師碑銘)」 : 이기백, 앞의 글, 10쪽 재인용.

『고려사』에는 도선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943)의 탄생에 관여한 설화가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도선이 풍수지리를 배운 것은 남해의 바닷가가 아니라 당나라의 술사 일행에게서였다. 그곳에서 풍수지리를 배우고 귀국하던 길에 송악에 들른 도선은 왕건의 아버지를 찾아가 송악의 풍수를 관찰한 뒤 그에게 집을 지을 방법을 가르쳐 주고는, 그렇게 한다면 미래에 삼한(三韓)을 통일할 아이가 태어나리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154)왕건의 탄생과 도선을 연관시킨 설화는 『고려사』 「고려세계(高麗世系)」에 인용된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실려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물론 대부분 믿기 어렵지만, 도선 풍수의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그의 풍수지리가 전국 산천 순역의 거시적 형세를 관찰함으로써 신라의 경주를 대신할 국토의 새로운 중심지를 예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쇠퇴를 목도한 도선은 풍수 이론을 토대로 하여 그가 찾아낸 새로운 명당 지역을 중심으로 일종의 ‘국토 재편안’을 제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각국사비문을 비롯하여 고려 이후의 사료에서는 도선이 제안한 나라의 새로운 중심지를 모두 개성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도선이 죽은 시기가 아직 고려가 건국되기 전이며 왕건의 세력이 부상하기 전임을 감안하면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도선이 풍수를 터득한 곳이 지리산과 남쪽 바다라는 선각국사비문의 기록을, 고려 이후에 윤색되기 전 도선 풍수가 지닌 본래 모습을 알려 주는 단서로 보는 견해도 있다. 즉, 도선의 풍수지리는 본래 북쪽의 송악보다는 지리산 주변의 남쪽을 중심으로 한 이론으로서, 왕건보다는 당시 옛 백제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던 견훤의 정치적 지향과 부합하였으리라는 것이다. 이는 견훤이 오늘날의 전라도 광주 지방에서 흥기하기 시작한 때가 도선의 생애 말년과 겹친다는 점, 그리고 도선의 제자인 경보(慶甫, 868∼947)가 실제로 견훤의 후원을 받았다는 점 때문에 더욱 신빙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럽게 신라 말기 여러 지방 호족 세력들이 경쟁하던 당시의 정치 정세에 부응하여 각 세력을 뒷받침하는 여러 풍수 도참 이론이 경쟁하고 있었으리라는 추정으로 이어진다. 각 이론은 나름의 지역에 명당을 설정한 다음 그를 중심으로 ‘산천 순역(山川順逆)의 형세’를 그렸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왕건의 고려가 신라 말기의 정치적 혼란을 평정하였고, 이는 풍수지리 이론의 판도에도 영향을 미쳐 경쟁하던 여러 풍수 이론은 송악을 중심으로 한 이론에 의해 밀려나거나 그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견훤과 연결되었던 경보는 훗날 왕건에 귀의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스승 도선의 풍수 이론도 자연스럽게 송악을 중심으로 하여 고려를 정당화하는 내용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추정이 옳다면, 고려의 문헌에 기록된 도선 관련 설화들은 이러한 정치적 변화의 최종적 결론이었던 것이다.155)통일신라 말의 사회와 풍수지리에 관한 논의는 최병헌, 「도선의 생애와 나말여초의 풍수지리설」, 『한국사연구』 11, 한국사연구회, 1975 ; 김두진, 「나말여초의 동리산문의 성립과 그 사상」, 『동방학지』 57,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소, 1988의 연구에 의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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