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5장 풍수지리와 정치
  • 2. 통일신라 말기와 고려 초의 풍수지리
  • 왕건의 훈요 10조와 고려 초의 풍수지리
임종태

풍수지리가 고려의 건국과 통일에 사상적으로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기 때문에 태조 왕건 이래 고려 왕실은 풍수지리를 중시하였고, 그에 따라 이후 고려의 정치 문화와 풍수지리는 밀접한 연관을 맺게 되었다. 고려의 정치는 풍수 도참으로 시작해서 풍수 도참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풍수지리 이론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다.156)이병도, 『고려시대의 연구-특히, 도참 사상의 발전을 중심으로-』 개정판, 아세아문화사, 1980, 32쪽.

왕건이 풍수를 중시한 사실은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이른바 ‘훈요 10조(訓要十條)’에 풍수와 관련된 조항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그 중 제2조는 불교 사찰의 무분별한 건설을 경계한 내용이다.

모든 사원은 다 도선이 산수(山水)의 순역을 추점(推占)하여 개창한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점정(占定)한 외에 함부로 더 창건하면, 지덕(地德)을 훼손시켜 왕업이 길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짐은 후세의 국왕, 공후(公侯), 후비(后妃), 조신(朝臣)이…… 혹 더 창건한다면 크게 우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라 말에 사탑(寺塔)을 다투어 짓더니 지덕을 훼손하게 하여 망하기에 이르렀으니 경계하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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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왕건상
고려 태조 왕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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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모든 불교 사원은 도선이 산수의 순역을 살펴서 개창한 것이므로, 그 밖에 함부로 사찰을 창건할 경우 지덕이 훼손되어 결국은 고려의 기업이 길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제5조는 자신의 뒤를 잇는 임금들에게 매년 일정한 기간 서경(西京, 평양)에 머물 것을 강조한 내용이다. 왕건에 따르면 “평양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며, 대업을 만대에 전할 땅”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야 할 지역이었다. 이는 평양이라는 지역이 지닌 상서로운 기운을 언급하였다는 점에서 풍수와 연관된다. 제8조는 후백제 지역 출신의 인물을 조정에 등용하지 말 것을 권고한 내용으로, 이 또한 그 지역의 풍수적 특성을 근거로 삼았다.

차현(車峴) 이남과 공주강 바깥은 산형(山形)과 지세(地勢)가 함께 배역(背逆)으로 달리니 인심도 또한 그러한지라. 저 아래 주군(州郡)의 사람들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 국척(國戚)과 혼인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혹 국가에 변란을 일으키거나…… 거둥하는 길을 범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다.

따라서 왕건은 차령 이남과 금강 바깥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벼슬자리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였다.157)『고려사』 권2, 세가2, 태조 26년 4월. 이상 원문은 홍승기, 「고려 초기 정치와 풍수지리」, 『한국사 시민 강좌』 14, 일조각, 1994, 21쪽 재인용.

왕건의 이와 같은 유훈은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시기에 이루어진 풍수지리의 초점을 잘 보여 주며, 더 나아가 이후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풍수지리와 정치가 착종하게 된 핵심 쟁점을 예견하고 있다.

사찰의 무분별한 건설을 경계한 훈요 제2조는 우리나라 풍수지리에서 독특하게 나타나는 이른바 ‘비보(裨補) 풍수’ 관념을 반영하고 있다. 왕건이 도선의 업적으로 돌린 비보 풍수란 지덕이 쇠약하거나 산천이 거스르는 형세를 띤 곳에 사탑을 세워 땅의 기운이 지닌 문제점을 고치고 보완할 수 있다는 관념이었다. 왕건에 따르면 신라 말기에 도선은 전국 산천을 돌아다니며 지세의 순역을 관찰하여 땅의 기운이 약하거나 좋지 않은 곳에 사탑을 세우도록 하였는데, 만약 그 밖의 지역에 사찰을 함부로 짓게 되면 도리어 땅의 기운을 손상하여 결국에는 나라의 운명을 해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보 풍수의 관념은 두 가지 점에서 흥미롭다. 첫째, 땅의 기운이 쇠약한 곳을 사탑으로 보완한다는 생각은 풍수 이론이 불교 신앙과 결합하였음을 잘 보여 준다. 둘째, 이 관념은 산천이 지닌 기운과 덕이 불가항력적이며, 따라서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제어하여 자신에게 이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이라는, 자연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반영하기도 한다. 마치 의원이 침을 이용하여 사람 몸에 흐르는 기의 허실과 순역을 제어하듯, 풍수지리를 이용하면 지기를 제어하여 그 땅에 터를 잡은 나라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158)최창조, 『한국의 자생 풍수』, 민음사, 1997, 60∼62쪽. 실제로 태조 때 개경의 사찰에는 땅의 기운을 비보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보이는 사례들이 있다. 새로운 왕조의 도읍지로서 풍수지리적인 장점이 널리 인정된 개경에도 몇몇 문제는 있었다. 예를 들어 개경을 가로질러 흐르는 물이 거칠고 급한 것이 그 중 한 가지였다. 그런 점에서 태조 왕건이 개경에 여러 사찰을 창건한 데는 불순한 물의 기운을 억눌러 지덕을 보완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던 것 같다. 태조가 세운 사찰이 대부분 개경을 관통하는 물길에 연해 자리 잡고 있는 것 을 통해 이를 짐작할 수 있다.159)이병도, 앞의 책, 96∼97쪽. 비보 사탑의 관념은 태조의 훈요 10조에 표명된 권고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불교 사원의 건립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 스스로가 개경에 10여 곳의 사찰을 건립하였으며, 이후에도 개경에만 70곳에 이르는 사찰들이 들어섰다.

후대의 임금에게 평양에 순주(巡住)할 것을 권고한 제5조는 고려의 수도로 채택된 개경의 풍수에도 나름의 한계가 있다는 태조 왕건 및 당대 풍수지리가의 인식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서경은 수덕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라는 왕건의 언급에서, 개경은 지니지 못한 풍수지리상의 장점을 평양이 가지고 있다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개경의 상서로운 풍수적 특징을 주장하던 학설이 신라 말기부터 널리 유포되었고, 실제로 개경을 도읍으로 한 고려가 결국에는 삼한을 통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풍수지리의 측면에서는 개경이 다른 모든 경쟁 지역을 누르고 완전한 패권을 장악하지는 못하였음을 보여 준다.

물론 서경과 훗날 또 다른 명당으로 부각된 남경(南京, 오늘날의 서울 근처)이 개경과 뚜렷한 대립 관계에 있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보통의 경우, 그 지역들은 개경의 지덕을 보완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가 개경의 풍수가 지닌 결점이 강조될 경우, 이들 다른 지역이 지닌 이점은 그에 비례하여 돋보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개경과 다른 명당 지역 사이에는 풍수상의 긴장 관계가 항상 존재하였고, 이러한 풍수상의 긴장은 정치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극단적인 파국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있었다.

서경의 풍수에 대한 언급은 그것이 개경의 주인 스스로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더욱 진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왕건이 평양을 중시한 것은 이미 후삼국을 통일하기 이전 그의 즉위 초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왕건은 즉위하자마자 평양에 대도호부를 설치하고, 다른 지역의 주민을 그곳에 이주시켜 살게 하였으며 곧 이를 서경으로 승격시켰다. 심지어 후삼국의 통일이 가까워 오던 932년(태조 15) 그는 아예 평양으로 천도할 뜻을 밝혔다. 그리고는 “평양의 지력(地力)에 의지하여 삼한을 통일하기 위함”이라며, 풍수지리 이론에 기대어 자신의 천도 정책을 합리화하였다. 물론 왕건이 서경을 중시한 일을 단지 풍수지리에 대한 믿음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후삼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 이후의 정치적·군사적 경영에서 평양 지역이 지니는 중요성을 왕건은 잘 인식하고 있었고, 이러한 그의 정치적 고려가 그를 뒷받침해 주는 풍수 학설을 통해 표명된 듯하다.160)홍승기, 앞의 글, 26∼34쪽. 결과적으로 그의 평양 천도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왕건은 훈요 10조를 통해 후대 임금이 한 해 중 일정한 기간 동안 평양에 머물 것을 당부함으로써 서경에 대한 그의 관심을 후대 임금들에게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하지만 이는 이후 고려 사회를 뒤흔들 정치적 혼란의 불씨이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제3대 임금인 정종(재위 945∼949)이 급작스러운 죽음 직전까지 평양 천도를 무리하게 강행한 일은 훨씬 뒤에 일어날 더 큰 일의 전주곡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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