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5장 풍수지리와 정치
  • 3. 고려의 정치와 풍수 도참
  • 새로운 명당, 남경의 부상
임종태

개경의 지덕을 보완할 새로운 도읍에 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1대 임금인 문종 때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도선이 지었다고 하는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라는 책에 개성에서 가까운 “예성강가에 군자가 말을 제어하는 형국의 명당이 있으니, 태조가 통일한 해로부터 120년 뒤에 이곳에 궁궐을 지으면 나라의 기업이 연장될 것”이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물론 현 존하지 않는 이 책이 실제 도선의 저작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며, 도선의 권위를 빌려 참위적인 주장을 전개한 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당시 사람들에게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렸던 것 같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로 120년이 흐른 때는 바로 문종의 치세였으므로, 문종은 이러한 예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천문과 지리를 맡은 관리인 태사령(太史令) 김종윤(金宗允)에게 명하여 책에서 언급한 형국의 땅을 찾게 하고는, 『송악명당기』에서 예언하였던 때인 1056년(문종 10) 그곳에 장원정(長源亭)이라는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다.162)『고려사』 권56, 지(志)10, 지리1. 이후 문종은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장원정에 거주함으로써 그곳의 풍수적 힘을 빌려 나라의 수명을 연장하려는 바람을 표현하였다. 풍수에 대한 문종의 집착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067년(문종 21)경 그는 오늘날의 서울 부근에 남경을 세웠으며, 1081년(문종 35)에는 서경 지역에도 본래의 궁궐 좌우 지역에 궁궐을 새로이 지었다.

문종의 셋째 아들로서 고려의 15대 임금이 된 숙종 또한 풍수에 대한 믿음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숙종대에는 부왕인 문종이 이미 시도하였던 남경 건립에 관한 논의가 부활하였으며, 이를 통해 남경은 비로소 개경·서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당으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흥미롭게도 남경의 건립에 관한 이때의 논의 과정에서 개경이 지닌 풍수상의 약점과 지덕이 이미 쇠하였다는 주장이 기록상으로는 처음으로 분명히 제기되었다.

숙종이 왕위에 오른 첫해에 남경 건설의 필요를 적극적으로 주창한 인물은 김위제(金謂磾)였다. 그는 『도선기(道詵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신지비사(神誌秘詞)』 등의 지리 참위서를 다양하게 인용하며 임금에게 남경 건설의 풍수적 필요성을 설득하였다. 김위제의 말에 따르면 『도선답산가』는 “송악이 삼한의 주인이 되기는 하지만, 그 지세가 세열(細劣)하여 겨우 100년 만에 운이 다할 것”이라며 개 경이 지닌 풍수의 약점으로 인해 명당으로서의 지위가 이미 소멸하였음을 선언하였다. 그리고는 이어서 “한강의 북쪽에 새로운 명당을 찾는다면, 사해(四海)의 신어(神魚)가 한강에 모여들어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리라.”고 예언하였다. 김위제는 이 구절을 근거로 “한양(漢陽)에 도읍할 경우 나라의 기업이 장구할 것이며, 세계의 모든 나라가 고려에 조공을 바칠” 정도로 국력이 강성해지리라고 예언하였다. 『삼각산명당기』는 삼각산 주위의 지역, 즉 한양의 상서로운 풍수를 좀 더 구체적으로 논의한 내용으로, 이 또한, 이 지역을 도읍으로 건설한다면 “9년 만에 사해의 모든 나라가 조공을 바칠 것”이라는 참위적 주장을 담고 있었다.

김위제가 새로운 도읍의 건설을 주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완전한 천도를 뜻하지는 않았다. 여러 지리서에서 예견한 명당들은 개경의 지위를 위협한다기보다는 도리어 이미 쇠퇴한 개경의 지력을 보완한다고 생각되었다. 예를 들어 김위제가 인용한 『도선기』에는 “고려에는 세 도읍이 있으니 송악은 중경(中京)이 되고, 목멱양(木覓壤, 지금의 서울)은 남경이 되며, 평양은 서경이 된다.”며 한 해에 넉 달씩 번갈아서 머문다면 “36국이 조공을 바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김위제는 『신지비사』를 인용하여 개경, 서경, 남경을 각각 저울대, 저울 그릇, 저울추에 비유하였는데, 이 세 지역이 균형을 이룬다면 나라가 부강하여 “70여 국이 조공을 바칠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그의 주장은 당시 고려는 개경과 서경의 두 도읍만 있어 풍수적 균형을 위해 꼭 필요한 저울추 남경이 결여되었으므로, 나라의 안위를 위해서는 남경을 설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163)『고려사』 권122, 열전(列傳)35, 김위제(金謂磾).

이러한 비기(秘記)들에서 언급된 36국이나 70여 국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를 상징하는 숫자로 보인다. 지상 세계가 중앙과 사방(또는 8방)으로 이루어졌다는 전통적인 세계상에 따라 각 방위에 9나라를 배당함으로써 36 또는 72의 숫자가 나오게 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와 같은 논리는 보통 중국을 중심에 두고 주위를 여러 제후국이 두르고 있다는 중국 중심의 세계 관에서 자주 이용되던 것이었지만, 당시 고려에서 유행하던 참위서들은 중국이 아닌 고려를 세계의 중심에 놓고 있었다.

남경 건설에 관한 김위제의 건의는 1099년(숙종 4)에 본격적인 실행 단계로 접어들었다. 신하들을 파견하여 지세를 관찰하게 한 뒤 오늘날의 백악산 아래로 터를 잡았고, 이후 1104년(숙종 9)에 남경의 궁궐이 완성되었다.

이렇듯 문종에서 숙종에 이르는 시기에 등장한 여러 참위서와 그에 근거한 풍수설은 개경의 중심적 지위를 여전히 인정한 상태에서 서경과 남경 등의 다른 명당이 그를 보좌하는 역할을 부여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사실 태조 왕건의 훈요에서 서경을 중시하여 그에 순주함으로써 서경의 지덕을 이용할 것을 당부하였던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적어도 고려의 건국부터 이때까지 개경과 다른 명당 사이의 긴장은 개경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는 정도에서 유지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들이 명당들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완전히 없애 버릴 수는 없었다. 이는 특정한 상황, 예컨대 고려 왕실의 권위가 극도로 약화될 경우 표면적인 보완 관계를 벗고 대립과 갈등의 관계로 번져 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서경과 남경은 모두 그러한 불온한 잠재력을 지닌 지역이었다. 물론 그 힘이 단순히 풍수 이론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서경과 남경을 건설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중시하는 입장은 곧 그에 근거한 정치 세력의 성장을 가져왔다. 서경과 남경이 지닌 풍수상의 힘은 곧 그 지역에 기반을 둔 정치 세력의 힘과 비례 관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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