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5장 풍수지리와 정치
  • 3. 고려의 정치와 풍수 도참
  • 고려 중기의 정치적 혼란과 풍수 도참설
임종태

서경과 남경이 지닌 불온한 힘은 숙종대에서 머지않은 인종대에 폭발력을 과시하며 정치적 소용돌이의 중심에 등장하였다. 예종의 뒤를 이어 14세의 어린 나이로 인종이 즉위하자 고려는 내외로 어려운 상황에 봉착해 있었다.

이미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에 이르는 30여 년 동안 거란과의 전쟁을 겪은 고려는 이 시기 북방에서 새로이 흥기하는 여진족 금(金)나라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여진족은 1115년(예종 10) 금나라를 세운 뒤, 인종이 즉위한 직후 거란을 멸망시켰을 뿐 아니라 1127년(인종 5)에는 송나라의 수도 개봉(開封)을 함락시켰다. 이전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던 여진족은 국력이 강성해지자 고려에 군신(君臣)의 관계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고려 조정은 금나라의 무례한 주장에 격분하였지만, 강성한 세력에 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러한 외교적인 굴욕으로 고려 왕실의 자존심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당시의 조정 내부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나이 어린 인종의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들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왕위 계승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인종의 숙부들이 일차적인 위협이 되었지만, 더 큰 문제는 이들로부터 인종을 보호하여 임금에 오르게 한 그의 외할아버지 이자겸(李資謙, ?∼1126) 가문의 세력이었다. 인주(仁州, 오늘날의 인천 부근) 이씨 가문은 이자겸의 할아버지인 이자연(李子淵, ?∼1086) 때부터 고려 왕실에 딸을 시집보내며 강력한 외척(外戚)이자 명문 대족(名門大族)으로 성장하였다. 인종이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이자겸은 인종에게 다시 자신의 두 딸을 시집보낸 뒤 세력이 더욱 강성해져서 이제는 왕권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이자겸 세력의 부상과 이어진 1127년(인종 5)의 반란은 풍수 도참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자겸은 “십팔자(十八子) 또는 목자(木子)가 왕이 된다.”는 참언을 믿고 인종을 독살하려 하였는데, ‘십팔자’나 ‘목자’는 모두 이자겸의 성인 ‘이(李)’를 파자(破字)한 것이었다.164)『고려사』 권127, 열전40, 이자겸(李資謙). 곧 이씨가 왕씨에 이어 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예언이었는데, 그 바탕에는 개경에 도읍한 고려의 덕이 쇠하고 남경을 새로운 도읍으로 하는 이씨의 시대가 오리라는, 당시에 널리 유행하던 믿음이 깔려 있었다. 요컨대 문종대와 숙종대에 걸쳐 새로운 명당으로 떠오른 남경이 인종대에 이르자 아예 개경과 고려 왕조의 정당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이씨가 왕이 되리라는 이른바 ‘십팔자 참언’은 이후로도 고려 왕조 내내 유행하여, 훗날 무신 정변(武臣政變)의 주역 중 한 사람인 경주 출신의 이의민(李義旼, ?∼1196)이나 결국에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李成桂, 1335∼1408)에 이르기까지 고려 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물론 인종 당시에는 이러한 예언이 이자겸의 실패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반대로 이자겸의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서경 세력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평양의 승려였던 묘청(妙淸, ?∼1135)과 그를 지지하던 정지상(鄭知常, ?∼1135) 등 평양 출신 관료들은 금나라와의 굴욕적인 외교, 이자겸의 난으로 어수선해진 정국을 쇄신하기 위해 서경으로 천도한 뒤 칭제 건원(稱帝建元, 왕의 칭호를 황제로 높이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도 풍수지리설이 자리 잡고 있었다. 1128년(인종 6) 묘청이 건의한 바에 따르면 “우리들이 보건대 서경의 임원역 땅은 음양가들이 말하는 대화세(大華勢, 최상의 명당)인데, 만약 이곳에 궁궐을 건설하고 옮겨 앉으면 금나라가 스스로 항복할 것이며 36개국이 모두 복종할 것”이라고 하였다.165)『고려사』 권127, 열전40, 묘청(妙淸). 이는 문종이나 숙종 때의 주장과 비슷한 논리이지만, 이전과 다른 점은 개경에서 서경으로 도읍을 완전히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인종은 묘청의 건의를 일면 받아들여 그들의 요청대로 서경에 ‘대화궁(大花宮)’을 건설하고는 자주 그곳에 순주하였다. 하지만 개경의 조정에서는 점차 묘청 등 서경파의 외교 정책이나 천도론에 반대하는 유교 관료 김부식(金富軾, 1075∼1151) 등의 목소리가 힘을 얻어 갔고, 인종 또한, 점차 그들의 주장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결국 1135년(인종 13) 묘청 등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나라 이름을 대위국(大爲國)이라 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칭하였다. 묘청의 난은 고려 초부터 전개된 개경, 서경, 남경 등 여러 명당 사이의 긴장이 당시의 긴박한 정치 정세와 맞물려 최고조에 달한 사건이었다. 이들의 반란은 김부식 등에 의해 1년 만에 진압되었지만, 이 사건은 정치적 파괴력만큼이나 이후 풍수지리를 둘러싼 논의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물론 개경의 지덕이 쇠하였다는 주장이나 다른 명당으로의 순주를 주장하는 사례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고려 말 공민왕대까지 묘청 등과 같이 개경의 지위에 노골적으로 도전하는 주장이 조정 내에서 제기되기는 어려웠다. 특히, 묘청의 반란을 겪은 이후 왕실은 서경에 대해 고려의 기업을 연장하는 데 도움을 줄 명당이라는 이전의 긍정적 이미지 대신 반역의 고향이라는 부정적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전까지 빈번히 행해지던 왕들의 서경 순주도 이후로는 뜸해졌다. 정치적으로 어수선한 고려 말에 다시 풍수 도참 사상이 고개를 들었을 때에도 이제 평양은 이전과 같이 진지한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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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난을 계기로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 중요한 변화는 풍수 도참에 대해 회의적인 세력이 고려의 정치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서경 천도론을 둘러싼 논쟁에서 김부식 등 유교적 합리주의로 무장한 세력이 등장하여, 결국에는 묘청 등의 풍수 도참 사상에 대해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 당시의 대립 구도는 종종 서경파와 개경파의 불 화로 표현되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이 두 집단이 풍수 이론을 둘러싸고 대립하였던 것은 아니다. 요컨대 묘청에 반대하였던 김부식 등이 평양을 대신해서 개경의 풍수지리적 가치를 옹호한 집단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정치·경제·군사 등 여러 복잡한 현실 문제를 적절히 고려해야 할 나라의 운영에 풍수 도참설이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이들은 상서로운 땅을 찾아 새로운 궁궐을 짓고, 임금이 순주하는 것만으로는 나라의 운명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사실 풍수 도참에 대한 온건한 비판 세력은 예전부터 존재하였다. 『고려사』 등의 기록에는 역대 임금이 서경과 남경에 궁궐을 짓고 비보 사탑을 건설하는 데 국력을 낭비하는 일에 비판적 상소를 올린 여러 사례가 남아 있지만, 그것이 풍수 도참에 경도된 임금의 생각을 바꿀 만큼 커다란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 묘청 등이 풍수 도참 사상에 근거한 정치적 프로그램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자, 그에 대한 반동으로 유교적 합리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정치적으로 결집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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