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5장 풍수지리와 정치
  • 4. 고려 말 조선 초에 일어난 변화
  • 고려 후기의 정치와 풍수지리
임종태

고려의 정치에 풍수와 관련된 쟁점이 다시금 크게 부각된 것은 원나라의 세력이 물러가고, 고려 정치 문화에 대한 전반적 개혁의 기운이 고개를 들던 공민왕 때였다. 100여 년간 중원을 통치하며 고려의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원나라가 퇴조하고 명나라가 패권을 장악하는 급박한 국제 정세가 조성되자, 그동안 원나라의 간섭하에서 안정을 누려 오던 고려 사회도 다시 격동에 휩싸였다. 공민왕은 조정 내의 친원파 권문세가(權門勢家)를 숙청하여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으며, 원나라가 장악하고 있던 북방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수복하고 요동 지방을 공략하는 등 적극적인 군사 정책을 펼쳤다.

이렇듯 내외로 불안한 상황에서 정치의 주도권을 잡고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하던 공민왕은 음양 술수나 풍수 도참설을 통해 자신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하려 하였다. 공민왕이 채택한 방식은 이전 문종대나 숙종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개경 이외의 다른 명당 지역의 궁궐에 순주함으로써 땅의 힘을 빌려 자신의 개혁 정치를 정당화하려 하였던 것이다. 1356년 (공민왕 5) 임금은 남경의 궁궐을 보수하게 하고는 그곳에 순주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은 “한양에 도읍하면 36개국이 조공을 바칠 것”이라는 승려 보우(普愚, 1301∼1382)의 건의에 의해 더욱 적극적으로 변모하여 아예 남경에 새로운 궁궐을 신축하는 시도로까지 발전하였다. 하지만 1360년(공민왕 9) 궁궐이 완성되고 난 뒤 점을 쳐 보니 불길하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한양 궁궐을 포기하고는 급히 다른 지역에 터를 잡아 궁궐을 건설하고 그곳에 순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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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과 노국 대장 공주의 초상
공민왕과 노국 대장 공주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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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이 한미한 승려 신돈(辛旽, ?∼1371)을 중용하여 왕권 강화를 위한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한 이후에도 이러한 시도는 계속되었다. 특히, 당시 실권을 장악한 신돈은 음양술과 풍수에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자신과 공민왕이 추구하는 개혁을 위해서는 권문세족의 근거지인 개경 이외의 다른 곳으로 천도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는 『도선비기』 등의 서적에 근거하여 개경의 지력이 쇠하였으므로 다른 지역으로의 천도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고는 서경, 충주 등을 후보지로 하여 천도를 추진하였다.167)『고려사』 권132, 열전45, 신돈(辛旽).

그러나 신돈의 천도 정책에는 공민왕도 적극적이지 않았고, 조정의 관료들도 매우 비판적이었다. 당시 신료들의 반대는 물론 개경에 근거한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보수적 정서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공민왕의 학술 진흥 정책 과정에서 성장한 신흥 성리학자들의 음양 술수에 대한 비판적 태도 또한 큰 몫을 하였다.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내외적으로 어려운 당시에 궁궐의 신축과 순주에 막대한 국력을 낭비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일이었다. 이는 인종대에 묘청의 시도에 반기를 들었던 김부식 등의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음양 술수와 도참에 의지하였던 신돈의 개혁도 결국에는 묘청과 마찬가지로 실패하고 말았다. 공민왕대의 성리학 소양을 지닌 신흥 사대부의 등장은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는 이후의 정치적 변화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풍수 도참 사상의 운명에도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성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때 불교와 음양 도참과 긴밀히 관련된 고려의 정치 문화를 비판하고, 유교 성리학적 합리주의에 기반하여 새로운 정치 질서를 건설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문화적 변화의 과정에서 풍수와 정치는 고려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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