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5장 풍수지리와 정치
  • 4. 고려 말 조선 초에 일어난 변화
  • 조선의 건국과 풍수관의 변화
임종태

1388년(우왕 14) 위화도 회군을 통해 중앙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는 이후 자신의 정치적 반대 세력을 속속 제거한 뒤, 1392년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의 선위를 받는 형식으로 왕좌에 올랐다. 고려를 이어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가 개창된 것이다. 태조 이성계는 임금에 오르자 곧 도읍을 옮길 결심을 하고, 1394년(태조 3) 고려의 남경이었던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하였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고 천도가 처음 결정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신라에서 고려로의 왕조 변화 시기나 이후 고려 왕실에서 빈번히 이루어졌던 천도 논의와 양상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우왕 말년 이성계가 고려의 권력을 장악하던 즈음 이자겸의 난 때와 마찬가지로 민간에서는 ‘목자득국(木子得國)’의 참언이 유행하였고,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뒤 에는 마치 고려 태조 때처럼 그의 가계를 둘러싼 신비스런 설화가 만들어졌다. 이성계의 천도 결심도 사실은 고려 말에 이루어진 논의의 연장선에 있었다. 공민왕 이후 우왕과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도 지리 도참설에 근거하여 남경 천도를 시도한 일이 있었는데, 특히, 공양왕대에는 “도읍을 옮기지 않으면 폐군신(廢君臣)의 화를 입으리라.”는 경고가 담긴 도참 서적이 임금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후 태조 이성계도 이러한 참언이 마음에 걸렸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새로운 왕조 수립에 발맞추어 자연스레 새 왕조의 기업이 될 새로운 도읍을 건설할 필요도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고려시대부터 명당으로 널리 인식되어 온 남경, 즉 한양 천도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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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도(都城圖)
도성도(都城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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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와 같은 표면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실제 태조 연간에 이루어진 논의의 과정을 면밀히 따라가면, 한양 천도를 둘러싼 당시의 논란이 고려 때와 완연히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새 도읍을 한양으로 결정한 것은 풍수 도참적 이점보다는, 도리어 그 지역이 지녔다는 풍수상의 결점에도 불구 하고 당시 건국을 주도한 사대부들의 ‘유가적 식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168)이태진, 「한양 천도와 풍수설의 패퇴」, 『한국사 시민 강좌』 14, 일조각, 1994, 55쪽.

사실 조선의 도읍이 처음부터 한양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1394년(태조 3) 한양으로 도읍이 결정되기 전해에 당시 조선 왕실의 안태지(安胎地, 태를 묻는 곳)를 선정하러 지방에 파견된 권중화(權仲和, 1322∼1408)는 계룡산 근처의 풍수를 살펴본 다음 그곳이 새 왕조의 도읍으로 적당하다고 건의하였다. 직접 답사한 태조 또한 그곳이 마음에 들어 새로운 도읍의 건설을 시작하도록 하였다. 새로운 왕조를 연 태조의 입장에서는 고려 도읍의 하나였던 남경에 자기 왕조의 터를 정하고 싶지는 않았던 듯하다. 하지만 같은 해 말에 하륜(河崙, 1347∼1416)이 계룡산 지역의 풍수가 지닌 결점을 지적하며 도읍으로 적당치 않다는 반론을 제기하자 계룡산 천도 계획은 돌연 중단되고 말았다. 그 대신 하륜은 한강변의 무악(毋岳)이라는 새로운 지역을 명당으로 추천하며 그곳으로의 천도를 건의하였다.

이렇듯 왕조의 새 도읍을 정하는 일은 서로 다른 풍수 이론의 상충으로 인해 난관에 봉착하였다. 문제는 이 난국을 풀어 가는 과정에서 당시 천문 지리학을 담당하였던 서운관의 풍수지리 전문가들이 일관되고 합리적인 태도를 보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악이 풍수상으로 도읍에 적합하지 않다는 견해를 피력하면서도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였고, 천도를 강력히 희망하는 임금의 뜻과는 달리 개경에 그대로 머무르는 것이 좋겠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풍수지리가들이 소극적이고 모호한 입장을 보이자 당시의 사대부 관료들은 천도를 결정하는 데 풍수지리와 도참을 지나치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피력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정도전(鄭道傳, 1337∼1398)은 도읍을 결정하는 일은 도로망이나 해운 등 나라를 통치하는 데 필요한 여러 실질적 조건을 중점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며, 음양 술수가 천도 논의에 개입되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천도를 둘러싼 중대한 정치적 결정에 풍수지리가나 음 양 술사를 배제하고, 나라를 통치하는 경륜을 지닌 사대부들의 입장이 적극 반영되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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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오부(京兆五部)
경조오부(京兆五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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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도 정도전을 비롯한 사대부들의 합리주의적 입장에 동조한 듯하다. 무악을 직접 답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남경을 방문한 태조는 “조운(漕運)이 통하고 도리(道里)가 고르므로 인사(人事)에 편한 것이 많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곳으로 새 도읍을 결정하였다. 즉, 풍수지리적 관점이 아닌 실용주의적 기준에서 한양을 새 도읍으로 정하였던 것이다.169)이태진, 앞의 글, 61∼62쪽.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는 과정에서 드러난 풍수 도참설의 약화는 고려시대를 특징짓던 정치 문화의 근본적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서경의 풍수를 중시하였던 태조 왕건으로부터 남경으로의 천도를 꿈꾸었던 공양왕에 이르기까지 고려시대의 정치에는 음양 술수 및 풍수 도참이 깊숙이 개입해 있었다. 고려의 임금과 정치가들은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경륜을 음양오행의 사상과 풍수 도참의 언어로 표현하였으며, 종종 이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실제의 정치적 고려보다 앞서 나가기도 하였다. 물론 고려시대에도 현실의 정치적 고려를 우선시하며 풍수지리 이론에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이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생각이 대세를 이룬 적은 드물었다. 하지만 고려 말에 등장하여 조선을 건국한 신진 사대부들은 음양오행과 풍수 도참을 정치의 전면에서 밀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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