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1장 장시의 성립과 발전
  • 3. 이름난 장시의 발달 양상
  • 박천군의 재정을 좌지우지하였던 진두장
김대길

평안도 박천군(博川郡)의 진두장(津頭場) 역시 서북 지방에서 새롭게 부상한 조선 후기 15대 장시 중 하나였다. 진두장이 상업 도시로 성장한 것은 이 지역의 사회 경제적 여건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진두장은 교통 운수의 중요한 요충지인 대령강 나루터에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진두는 청천강과 연결되고, 다시 바다를 통한 상품 운송이 가능한 곳이었다. 따라서 주위의 안주·평양·개성을 비롯하여 정주·선천·용천·의주 등지와 통하는 교통상의 요지였다. 이곳은 17세기 이후 중국으로 가고 오는 사신들이 지나는 길목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상인들의 왕래도 많아졌다.

1656년(효종 7)경에는 이곳에 포자가 설치될 정도로 상업 중심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포자의 설치는 장시가 매일 개시되는 것과 마찬가지 기능을 하였다. 이에 따라 상당한 경제력을 지닌 인근의 상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기반을 다져 나갔다. 그리고 이들은 이곳을 근거지 삼아 안주나 강계 등지로 상권을 넓혔다.30) 『승정원일기』 139책, 효종 7년 5월 16일.

진두장은 5·10일장으로 매달 여섯 차례 장이 열렸다. 19세기 전반에 진두장 주변에는 500∼600여 호의 인구가 모여 들어 큰 상업 도시로 발전 하였다. 이러한 인구수는 1842년(헌종 8)에 대홍수로 진두 지역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인가 500여 호가 인근 지역으로 이주하였다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31) 『일성록』 헌종 8년 8월 21일.

행정 중심 도시가 아니면서 이와 같이 많은 인구가 모여들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상업 도시로서 주민들의 생계를 이어 갈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진두장의 상권은 영변, 가산, 정주, 안주는 물론 용천, 의주, 평양 등 광범한 지역을 아우를 정도로 확대되고 있었다. 다음의 가사는 당시 번성하는 진두장의 모습을 읊은 것이다.

판자와 삼이 모여들어

저자에 산 같이 쌓였고

고기와 자라를 실은 배들의

왕래하는 모습이 볼만 하구나.32) 홍희유, 『조선 상업사(고대·중세)』, 과학 백과사전 종합 출판사, 1989, p.312.

짤막한 내용이지만 진두장이 육로와 해로를 연결하는 이점을 이용하여 각 지역의 상품들이 거래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진두장은 지역 경제 활성화뿐만 아니라 관아 재정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 진두장에서 거두어들이는 장세는 인근 지역과 비교하여 가장 많아 박천군 관아의 재정을 충당할 정도였다. 한낱 장시에서 거두는 세금으로 지방 관아의 재정을 충당한다고 할 만큼 액수가 많았다는 것은 지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음을 보여 준다. 장시의 성장은 자연스럽게 이 지역에 상인을 비롯한 인구 증가를 가져왔고, 이는 지역 경제 활성화로 이어졌다.

그런데 1845년(헌종 11) 대홍수로 인해 진두장이 인근 지역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이때 가산군(嘉山郡)에서는 진두장이 있던 가까운 곳에 장시를 새로 설치하고 상선을 유인해 갔다. 이에 재정적으로 진두장에 크게 의 존하던 박천군은 자립할 기반을 잃게 되었다.33) 『비변사등록』 233책, 헌종 12년 9월 21일. 결국 박천군과 가산군 사이의 추도(楸島)에 장시를 설치하는 문제를 두고 상권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진두장은 박천군의 재정 확보에 크게 기여하고 있었고, 장시의 성쇠가 한 지역의 경제를 좌우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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