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2장 경제를 살린 상품 생산과 유통
  • 1. 상업적 작물의 생산과 상품화
  • 직물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상품화되었을까
이상배

사람이 살아가는 데 의식주(衣食住)는 필수 요건이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이다. 옷과 집은 없어도 살 수 있겠지만 먹지 못하면 삶 자체를 이어 갈 수 없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의를 제일 앞세워 부를까? 이것은 아마도 동물과의 차이점을 부각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인간은 먹는 것만 해결되면 문제가 없는 동물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인식에서 의를 가장 앞에 두어 강조하였을 것이다.

현대의 의류는 다양한 재질과 색깔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양반과 부유한 집은 주로 비단을 입었고, 일반 서민은 무명 을 걸치고 생활하였다. 우리나라의 전통 직물류로는 베(麻布), 모시(苧布), 무명(木棉), 명주와 각종 사(紗)·나(羅)·능(綾)·단(緞)·금(錦) 등이 있다. 베와 모시는 섬세하고 시원한 느낌, 무명은 수수하면서도 소박한 느낌, 명주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베와 모시는 여름철 옷감으로 가장 많이 쓰던 직물이다. 쌍떡잎식물인 대마(大麻)의 껍질을 벗겨 베틀을 이용하여 베를 짠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일반 가정에서 베를 짜는 일이 여성의 중요한 일과였다. 생산 지역에 따라 함경도의 베는 북포(北布), 강원도의 베는 강포(江布), 경상도의 베는 영포(嶺布), 안동의 베는 안동포(安東布)라 불렀다. 이러한 베가 여인의 정성스런 손질을 거쳐 옷으로 탄생되었다. 오늘날은 수의(壽衣)로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베가 조선시대에는 일상복의 옷감이었다. 그뿐 아니라 화폐 대용으로 이용되기도 하였고, 고운 것은 외국과의 무역 상품으로 거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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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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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은 목화에서 실을 뽑아 길쌈을 하여 만든다. 목화를 따서 말린 후 씨아를 이용하여 목화씨를 빼고, 솜활로 타서 남아 있는 씨앗 껍질을 깨끗이 떨어뜨리고 솜이 피어오르게 한 후 고치말이를 한다. 고치말이가 끝나면 물레질을 하여 실을 뽑고 이를 가락에 올린다. 가락에 올린 실을 가늘고 고르게 하여 베날기를 하고, 날실을 베틀에 옮겨 무명을 짠다. 현재는 이러한 모습을 자주 볼 수 없지만 조선시대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계절을 가리지 않고 무명짜기를 한다.

조선시대에 베·모시·무명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 것은 집집마다 일상적인 생활이었다. 따라서 일반 가정에서 대개 농번기에는 작물을 재배하고 농한기인 겨울에 기기를 이용하여 옷을 지어 입었다. 그리고 자급자족하다가 쓰고 남는 것이 있으면 팔기도 하고, 화폐 대용으로 다른 상품을 구입하는 데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이후부터는 서민들의 가내 공업도 소상품 생산자로 전환하면서 무명이나 베를 자가 소비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많든 적든 판매를 위해 생산하게 되었다. 이들 상품은 장시를 통해 거래되었다.

명주는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생산해 낸다. 나방이 알을 낳아 10∼15일이 지나면 누에가 되고, 이 누에는 25일 동안 잠을 자면서 왕성하게 뽕잎을 먹는다. 그 후 누에가 고치를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 번데기로 탈바꿈한 뒤 고치를 뚫고 나와 나방이 되어 날아간다. 누에고치는 바로 번데기가 고치를 뚫고 나오기 전에 열을 가하여 번데기를 죽이고 건조시켜 두었다가 실을 뽑아내는데, 보통 한 개의 고치에서 800∼1,500m 길이가 생산된다. 이렇게 생산된 실을 베틀에 걸어 명주를 직조한다. 조선시대에는 누에가 먹는 뽕잎을 마련하기 위해 왕실에서 직접 뽕나무를 관리하기도 하였다. 또한 전국적으로 뽕나무 심는 것을 권장하였다. 나아가 잠실(蠶室)을 두고 누에고치 생산에 힘을 기울이는가 하면 왕실 내명부(內命婦)가 중심이 되어 선잠제(先蠶祭)를 지내기도 하였다. 서울에서는 오늘날의 광진구 자양동과 광장동 일대, 송파구 잠실동과 신천동 일대, 서초구 잠원동 일대, 서대문구 연희동 일대, 한강의 밤섬 일대에서 뽕나무 재배와 함께 누에가 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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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어제잠직도(肅宗御製蠶織圖) 부분
숙종어제잠직도(肅宗御製蠶織圖)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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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조선시대 정부에서는 이러한 직물류를 어떻게 생산하고 관리하였을까? 조선 건국 초부터 성종 때까지는 관의 주도 아래 직물류가 생산되고 유통되었지만 연산군 이후에는 잠업(蠶業)이 정착되고 국가 경제가 안정됨에 따라 민간에 의한 양잠이 활발해지면서 직물류가 상품화되었다. 특히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만드는 견직물의 경우 중종대 이후 개인에 의한 사(紗)·나(羅)·능(綾)·단(緞)의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상품의 질이 높아졌다. 그러나 견직물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침체기에 빠졌다. 전쟁 직후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조선 후기에 역대 왕이 사치를 금하는 정책을 펴면서 고급 견직물 생산이 위축되었다. 그 결과 조선 후기에는 영세한 농촌 수공업에 의해 생산된 명주와 같은 단순한 견직물만 남게 되었고, 고급 견직물은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하는 것에 의존하였다.

조선 전기 직물류를 관장하는 관청 중에 대표적인 곳이 상의원(尙衣院)이다. 상의원은 왕을 비롯한 왕족의 의복과 궁중에서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관청이다. 고려시대 상의국(尙衣局) 체계를 이어 받은 상의원은 성종 때 체제가 정비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상의원에 소속된 공 장(工匠)은 597명이다. 세종 때는 467명의 장인이 있었으며, 세조 때는 801명까지 확대되기도 하였다. 597명의 공장 가운데 직물 생산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장인은 모두 264명이며, 각각 전문 분야가 나뉘어 있었다. 즉 합사장(合絲匠) 10명, 연사장(練絲匠) 75명, 홍염장(紅染匠) 10명, 청염장(靑染匠) 10명, 능라장(綾羅匠) 105명, 방직장(紡織匠) 20명, 성장(筬匠) 10명, 재금장(裁金匠) 2명, 사금장(絲金匠) 4명, 금박장(金箔匠) 4명, 도침장(擣砧匠) 14명 등이 있었다. 합사장과 연사장은 실을 뽑아내는 일을, 홍염장과 청염장은 염색 작업을, 능라장과 방직장은 비단 등 직물을 짜는 일을 각각 전문으로 담당하였다. 성장은 직물을 만드는 기구의 바디를 만들고 수리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재금장·사금장·금박장은 비단을 제직할 때 필요한 금사(金絲)와 금박(金箔)을 만들었고, 도침장은 제직된 직물을 다듬이질하여 정리하는 일을 담당하는 장인이었다. 결국 견직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인력이 분야별로 나뉘어 전문화·분업화되어 있었다. 『대전속록(大典續錄)』에 의하면 상의원 능라장이 짠 제품의 질이 중급 이하일 경우에는 씨실을 낳는 직장(織匠)과 무늬를 놓는 인문장(引紋匠), 천을 짜는 위봉족(緯奉足) 등에게 차등 있게 근무 일수를 삭감하는 벌칙을 내렸다. 이것은 능라장 안에서도 세부적으로 다시 분업화되어 전문적인 장인이 있었음을 뜻한다.

조선 전기 상의원에서 제직된 견직물은 중종대에 이르러 당대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냈다. 초기에는 근검절약을 강조하면서 중국산 직물을 선호하고, 명주와 같은 손쉬운 직물을 주로 제직하였으나 점차 고급 견직물이 경공장에서 생산되었다. 1424년(세종 6)에는 일본 국왕에게 보내는 물품 중에 나(羅)로 만든 의복이 들어 있었으며, 1504년(연산군 10)에는 각종 무문사(無紋紗)를 일곱 필씩 짜서 바치도록 하였다. 또한 능라장을 능단장(綾段匠)이라고 하여 나 대신 단의 제직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더 나아가 연산군은 능라장을 중국에 파견하여 직조 기술을 배워 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508년(중종 3)에는 상의원에서 능과 단을 잘 짜고 있으므로 명나라에서 사 오는 비단도 정지하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기술이 향상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사치의 금제(禁制)가 더욱 강화되었고, 영조가 상의원의 직조기를 철거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심지어 궁중에서 국혼(國婚) 때조차 면포를 사용하고 주단(紬緞)을 금하였기 때문에 고급 견직물의 생산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였다. 다만 규모는 작지만 경복궁 안에 향직원(鄕織院)을 두고 왕실용 의복을 소량 생산함으로써 조선 말기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다.

직물류 가운데 조선시대에 가장 활발하게 사용된 것은 면포였다. 면은 1363년(공민왕 12)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文益漸)에 의해 전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록상으로 그 이전에 이미 면직물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어 오래 전부터 사용해 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문익점이 종자를 들여온 후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협력하여 이듬해 봄 진주 강성(江城)에서 재배에 성공하였고, 호승(胡僧) 홍원(弘願)에게서 직조술을 익혀 면포 한 필을 짜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에서 무명이 태동하게 되었다.

면포 재배는 조선 초기에 국가 차원에서 면업을 장려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세종 때 이르러서는 대외 교역의 대표적인 수출품으로 자리 잡을 정도로 생산이 발전되었다. 이들 면직물은 사계절 통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민들이 가장 많이 쓰는 직물이었다. 나아가 저화(楮貨)나 주화(鑄貨) 같은 화폐가 있었지만 화폐의 유통이 활발하지 못할 때는 면포가 상품 교환의 유통 수단이 되었고, 국가에서 수납하는 조세를 면포로 징수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면화 재배가 가장 활발하고 지역적으로도 알맞았던 곳은 경상도와 전라도였다. 대표적인 생산지는 경상도의 안동과 의성 등 10여 개 읍과 전라도의 무주와 금산 등 7∼8개 읍이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충청도의 양산·옥천 등 10여 개 읍도 면화가 많이 재배되고 있으며, 특히 옥천과 양산은 논이 적어 주민들이 오로지 면업을 생업으로 삼아 이것으로 장사를 하여 많은 이익을 내고 있다고 하였다. 황해도에는 봉산 황주읍 등이 면화를 재배하여 이익을 내던 곳이었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상품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325개 장시 중 136곳에서 면화가 상품으로 거래되고 있다. 특히 호남이 28곳, 영남이 32곳으로 면화 산지가 풍부한 곳에서 매매도 활발하였다. 또한 관서 지방에서도 32곳의 장시에서 면화의 상품 거래가 이루어져 19세기 장시의 주요한 거래 품목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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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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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적(紡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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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 재배지는 충청도 임천·한산·서천 등이 유명하였다. 『택리지』에는 “충청도 서천·한산·임천 등이 모시 재배에 적당하였고, 모시 재배에 따른 이익도 전국에서 제일 많다.”고 할 정도였다. 오늘날까지 한산 모시와 임천 모시는 지역의 특산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면포와 마포는 평민이 주로 가정에서 손수 지어 입는 것이 대부분이었 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면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면포와 마포를 장시에서 구입하여 입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또한 지역적으로 특성화되는 상품이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고, 고급 품질의 상품을 선호하게 되었다. 면포로는 송도목(松都木)과 고양목(高陽木)이 제일 유명하였고, 마포는 안동포를 비롯하여 길포(吉布)·회령포(會寧布) 등을 명품으로 인정하였다.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비교적 활발하게 거래가 이루어졌던 325개 장시 가운데 254개소에서 면포가 거래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영남 지역에서의 거래가 제일 활발하였다. 영남의 경우에는 72개 장시 가운데 68곳에서 면포를 거래하여 90% 이상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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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의 마포 직조
북청의 마포 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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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왕실에서 필요한 직물은 상의원에서 제조하였지만, 고급 비단이나 중국에서 들여온 비단 등은 시전을 통해 거래되었다. 당시 직물류는 가격이 높고 이윤이 많아 대부분이 육의전(六矣廛)에서 거래되었고, 양반이나 서민은 이곳에서 물품을 구입하였다. 서울 광통교 주변에 있던 선전(線廛, 입전(立廛)이라고도 함)에서는 주로 중국산 비단을, 광통교와 종루 부근 에 있던 면포전(綿布廛)에서는 무명과 은을, 종루 주변에 있던 면주전(綿紬廛)에서는 국내에서 생산 유통되는 명주를, 종로 3가 근처에 있던 저포전(苧布廛)에서는 모시류를, 남대문로 1가에 위치하였던 포전(布廛)에서는 무명을 각각 전문적으로 판매하였다. 이들은 서울의 시전 가운데 가장 무거운 국역을 부담하는 대신 국가로부터 매매 전권을 위임받아 유통과 판매를 책임지고 있었다. 이들은 전매권을 가지고 있다는 장점뿐 아니라 산지에서 직접 직물을 구입하여 유통비를 아끼는 방법으로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였다. 고급 비단은 상의원의 기능이 쇠퇴되면서 선전을 통해 왕실에 공급되기도 하였다. 목면의 매매는 육의전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광통교 부근에 있던 면화전(綿花廛)에서 국역을 부담하고 전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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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포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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