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2장 경제를 살린 상품 생산과 유통
  • 2. 수공업의 발달과 민영화
  • 조선 전기 수공업은 국가에서 관장하였다
이상배

전근대 사회의 수공업은 인간이 원료나 자재를 가공하여 쓸 만한 물자를 만들어 내는 일을 말한다. 인간이 입는 옷에서부터 삶에 필요한 각종 도구들, 예를 들어 그릇·직물·놋쇠·신발·종이·가구 등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종류가 있다. 산업화가 된 오늘날은 기계로 하루에도 수만 점씩 제품이 생산되어 자유롭게 유통되고 있지만 전근대 사회 때는 모든 것을 사람의 손에 의지해야만 하였다. 따라서 당시에는 제품 생산이 대량화되기도 어려웠고, 월등한 품질을 기대한다는 것도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수공업 제품을 만드는 장인(匠人)을 공장(工匠)이라고 불렀다. 조선 전기에는 전문적인 수공업 제조 기술자인 공장들을 일정 기간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 소속시켜 궁궐과 관아에서 필요한 제품을 만들어 납품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제도를 우리는 관영 수공업(官營手工業)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성격에 따라 공장을 크게 관공장(官工匠)과 사공장(私工匠)으로 분류한다. 관공장은 관아가 주체가 되고 장인들이 삼교대로 나누어 근무하며, 사공장은 개인이 경영 주체가 된다. 관공장은 다시 한양 왕실 과 관아에 소속되어 필요한 제품을 만드는 경공장(京工匠)과 지방의 병영과 주·군·현에 소속된 외공장(外工匠)으로 구분한다. 경공장이 만든 제품은 궁궐과 관아에서 우선적으로 사용되었고, 나머지는 일반 양반이 차지하였다. 백성들은 필요한 물품을 스스로 자급자족하는 형편이었으며, 양질의 제품을 차지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경국대전』에는 30개 관청에 경공장이 2,841명 근무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들을 직종에 따라 나누면 130개로 구분된다. 여러 직종의 기술 분야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공장은 사기그릇을 만드는 사기장(沙器匠)으로 모두 386명이다. 이들은 사옹원(司饔院)에 380명, 내수사(內需司)에 6명이 배당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많은 직종이 야장(冶匠)으로 모두 192명이다. 야장은 군기시(軍器寺)에 130명, 선공감(繕工監)에 40명, 상의원(尙衣院) 등에 8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공장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던 관청은 군사 무기를 만드는 군기시로서 모두 644명이 배속되어 전체 경공장의 22.7%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만큼 군사 무기를 제조하는 전문 기술진을 확보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는 증거이다. 그 다음으로 옷을 만드는 상의원이 578명의 공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지방의 경우는 8도의 각 병영과 주·군·현에 소속되어 있던 외공장의 수가 모두 3,656명이다. 이들은 한성의 공조(工曹)를 비롯하여 상의원·군기시·선공감·제용감(濟用監)·조지서(造紙署)·와서(瓦署)·사옹원 등의 지방 조직에 소속되었다. 기술 분야별로는 종이를 만드는 지장(紙匠), 자기를 만드는 사기장, 쇠를 다루는 야장 등 27개 분야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지방 관아에서 필요한 수공업 제품을 만들었으며, 경영 형태는 한양의 경공장과 비슷하였다.

국가에서 경공장과 외공장의 수를 법으로 정한 까닭은 중앙 집권적인 전제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서 이들의 기술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쇠의 제련이나 활과 갑옷 같은 무기 제조 기술을 소지한 장인을 국가 에서 미리 확보하지 않으면 전제 왕권을 수호하는 데 필요한 장비를 확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적대 세력을 억제하는 데도 문제가 있다. 왕과 왕비를 비롯한 통치자들이 생활하는 궁궐의 신축과 도성 건설 등에도 전문적인 기술 인력들이 필요하였고, 지배층의 생활 문화에 필요한 제품을 조달하는 데도 숙련된 장인의 손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장인들을 자유롭게 방치하면 정부가 필요로 할 때 효율적으로 활용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법으로 규정을 만들어 통제하였던 것이다.

특히 조선 초에는 도성과 궁궐 건축에 많은 장인들이 필요하였다. 나무를 자유롭게 다루는 목장(木匠)이나 석재를 다루는 석장(石匠), 전돌을 다룰 수 있는 전장(磚匠) 등은 물론이고 토목과 건축 공사에 없어서는 안 될 장인들을 확보해야만 신도시 건설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위정자들의 생활용품과 장신구 등을 조달하기 위해서도 장인들이 필요하였다. 옷을 만드는 일도 비단실을 뽑는데 정통한 사람, 금박을 잘 놓는 사람, 은박을 잘 놓는 사람, 바느질에 능숙한 사람, 모자를 잘 만드는 사람, 신발을 잘 만드는 사람 등이 확보되어야 관리들의 관복 등 생활용품을 조달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이유에서 장인들이 꼭 필요하였던 조선은 법제화를 통해 그 수를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관공장 체제가 확립되었으나 시일이 흐르면서 점차 그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공장들의 임금은 보잘것없었고 사회적인 인식과 처우가 나빴기 때문에 현장에서 이탈하는 장인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1464년(세조 10)에는 군역제(軍役制)가 군포제(軍布制)로 바뀜에 따라 등록된 장인들이 출역(出役)하지 않고 장포(匠布)를 대신 납부하게 되었다. 더욱이 과중한 장인세(匠人稅)의 부담과 함께 관인의 횡포가 심해 관공장을 더 이상 매력있는 직업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는 대부분이 민영 수공업으로 전환되고 관영 수공업은 명목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기시와 사옹원은 조선 후기에도 관영 수공업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대표적인 존재였다. 무기는 국가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민영화할 수 없었다. 사옹원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관아에서 사용하는 도자기가 대부분 파손되었기 때문에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관영 수공업 체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광주 분원(廣州分院)에서 만들어 내는 자기는 최상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조선 전기 전국에서 상품의 자기를 만드는 곳이 경기도 광주목의 벌을천리(伐乙川里, 현재의 광주시 벌천리), 경상도 상주목(尙州牧) 중모현(中牟縣)의 추현리(湫縣里)와 기미외리(己未隈里), 고령현의 예현리(曳峴里) 등 네 곳이었다. 이들 중에서도 조선 후기에 지속적으로 관장들이 소속되어 있었던 경기도 광주 분원의 생산품을 가장 우수한 상품으로 인식하였다.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도 고령 백자가 가장 정교하다고 하면서도 광주 백자를 고령 백자보다 한 단계 높게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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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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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복숭아 모양 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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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는 조선 왕조의 수도인 한양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무엇보다도 양질의 백토(白土)가 생산되는 곳이었다. 또한 한강을 통해 양구에서 생산되는 백토나 땔나무 등을 운송하기 쉬운 교통여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처럼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에 사옹원에서 이곳에 분원을 두고 장인들을 소속시켰다. 광주 분원에서는 한 해에 봄과 여름 두 차례에 걸쳐 상품을 진상하였는데, 생산한 모든 제품은 궁궐로 들어가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권세가의 요구가 많아 진상하는 분량보다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하여 빼돌리는 사례가 비일비재하였고, 관인의 중간 농간으로 장인이 입은 피해는 막대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884년 관영의 형태가 무너지고 분원의 관리는 민간인에게 이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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