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2장 경제를 살린 상품 생산과 유통
  • 2. 수공업의 발달과 민영화
  • 수공업이 민영화로 개혁되다
이상배

왜란과 호란을 겪은 조선은 전후 복구 작업과 경제 재건 등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한양은 도성 재건과 궁궐 중건 등으로 연일 많은 장인과 백성이 동원되어 매우 혼란스러웠고, 경제적으로도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하였다. 정부에서 필요한 각종 물품의 조달은 더 이상 공장의 몫이 아니었다. 국가에서는 필요한 물품을 공인이나 시전을 통해 돈을 주고 구매하였다. 결국 장인들은 스스로 만든 제품을 시전에 넘겨 판매하고, 정부와 백성들은 이 제품을 사서 생활하는 경제 구조로의 변동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수공업의 민영화로 더욱 촉진되었다.

그러면 정부에서는 왜 수공업을 민영화할 수밖에 없었을까? 첫 번째는 경공장과 외공장에 예속되어 있던 장인들이 속속 작업장에서 이탈하면서 현실적으로 관영 수공업 체제를 유지할 명분이 없었다. 민간 장인과 노비를 동원하여 관영 수공업장을 운영한다고 해도 비용만 들어갈 뿐 양질의 제품 생산을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비경제적이고 비생산적이었다. 그리하여 아예 장인들에게 자유롭게 제품을 만들어 팔도록 하고, 돈으로 시전에서 질 좋은 제품을 사는 것이 좀 더 편리하다고 인식하였다. 결국 정부에서는 장인에게서 일정한 양의 면포를 장인세(匠人稅)라는 명목으로 거두어들이고, 장인들은 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제품 생산 활동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장인세는 수공업자들이 집중된 한양부터 시작하여 이후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두 번째는 관영 수공업에 소속된 일부 장인이 만든 제품 품질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관영 수공업하의 장인들은 국가에서 받는 요금도 낮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도 못 받기가 일쑤였고, 힘 있는 권세가와 양반의 개인적인 제품 요구도 계속 늘어나는 실정이었다. 시간에 쫓기는 장인의 입장에서는 품질이 우수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고, 제품 생산에 필요한 기술 투자를 모색할 겨를도 없었다. 이러한 조건은 생산성의 저하로 귀결되었으며 제품의 질 하락은 당연한 결과였다.

세 번째는 조선 후기 사회적으로 풍부한 노동력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민영 수공업자들은 자신의 작업 공간에서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잉여 인력을 활용하여 제품을 생산하였다. 조선 후기 농촌을 떠난 인력들이 한양으로 모여 들면서 상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게 되었고, 수공업자들은 이들을 이용하여 제품을 쉽게 생산할 수 있었다. 이른바 고용을 통한 임금 노동자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수공업을 민영화로 개혁하는 데 더욱 박차를 가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전란을 겪으면서 국가에 소속된 장인들의 명단을 기록해 놓은 장적(帳籍)이 없어졌다는 점이다. 전쟁의 와중에서 훼손된 명부를 조선 전기와 같은 수준으로 다시 만들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조선 전기에도 영세한 작업 환경과 조건 때문에 수공업장을 떠나는 장인이 많았는데, 장적이 소실된 뒤에 과거의 수공업자들이 자신의 명단을 올리기 위해 제 발로 관을 찾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와 같은 요인들로 인해 수공업의 민영화는 가속화되었다. 그리하여 1785년(정조 9)에 편찬된 『대전통편(大典通編)』에는 한양의 경공장 30개 가운데 사섬시(司贍寺)·전함사·소격서(昭格署)·사온서·귀후서(歸厚署) 등 5개 관아가 폐지되었다. 또한 내자시(內資寺)·내섬시·사도시·예빈시·제용감·전설사(典設司)·장원서(掌苑署)·사포서(司圃署)·양현고·도화서 등 10개 기관은 소속 공장이 없어지고 나머지 각 관청도 공장의 규모가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장인의 등록제 자체가 무의미해져 마침내 장적법(匠籍法)을 폐지하고, 관에서 직영하는 수공업도 외부 기술자를 고용하여 운영 하였다. 실례로 무기를 만드는 군기시에는 활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90여 명의 궁인(弓人)과 화살을 제조하는 150여 명의 시인(矢人)이 소속되어 있었으나 1625년(인조 3)에 이르면 겨우 4명의 궁인만이 남아 있었고, 그 가운데 1명은 70세가 넘은 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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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상은 외공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전통편』에 의하면 “『경국대전』에는 각도 각 읍에 모두 공장의 이름이 있었으나 지금은 외공장을 등록하여 본도에 두는 규정이 없어졌으니 관에서 일할 것이 있으면 사공(私工)을 임용한다.”고 규정되어 있다.75) 『대전통편(大典通編)』 권6, 외공장(外工匠). 실제로 조선 전기 전라도의 경우 외공장이 778명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나 1799년(정조 23)에 불과 8명의 장인만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76) 『일성록』 정조 23년 5월 30일. 관영 체제가 어느 정도로 붕괴되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결국 국가에서는 수공업을 민영화로 돌리는 방안을 선택하였다. 이와 같은 제도의 변화는 정부 스스로 선택한 개혁이라기보다는 이미 사회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현상을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수공업의 민영화로 경제 구조는 좀 더 활성화되었고, 수공업 제품의 품질도 향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장인들이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는 품질이 우수한 제품을 만들어야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른바 경쟁 체제로, 매뉴팩처(manufacture)의 형태로 발전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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