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2장 경제를 살린 상품 생산과 유통
  • 3. 도로와 수로를 이용한 상품 유통
  • 물류 이동으로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다
이상배

남한강을 통해 충주와 원주 등지에서 한양으로, 혹은 한양의 경강에서 반대로 남한강 상류까지 갖가지 상품이 배를 통해 거래되었다. 물품만 거래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왕래도 빈번하였다. 이들 수운 대상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조세 운반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밖에 남한강을 통해 유통된 상품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

1426년(세종 8) 남한강 수운의 책임자인 좌도 수참 전운 판관(左道水站轉運判官) 안상진(安尙縝)은 수참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남한강을 통해 운반되는 대상물이 많아 수부(水夫)들의 고충을 심하다고 주장하였다.

수부와 전운 노자(轉運奴子)는 해마다 얼음이 풀려 다시 얼음이 얼 때까지, 집이 멀고 가까운 것도 상관하지 않고 농사를 폐하고 양식을 싸 가지고 와서는 녹전(祿轉)과 잡공(雜貢)을 운반할 뿐만 아니라, 왜객(倭客)의 왕래, 여러 섬의 갈대와 물억새, 별요(別窯)의 토목 등까지 운반하게 되니, 운반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그 고통을 참지 못하고 달아나는 자가 퍽 많습니다.111) 『세종실록』 권32, 세종 8년 6월 신미.

이 기록으로 수운을 통해 조세 이외에도 각 지방에서 산출되는 공물을 운반하였고, 남한강 상류에서 산출되는 갈대와 억새, 그리고 산악 지대에서 벌목한 나무도 운송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전국 각지에서 채집되는 약초를 수로를 이용하여 한양의 제생원(濟生院)과 혜민국(惠民局)에 바쳤으며,112) 『태조실록』 권12, 태조 6년 8월 임인. 삼남 지방에서 모아들인 소목(蘇木) 5,000근을 충주에서 한양으로 일괄 수송하기도 하였다.113) 『연산군일기』 권39, 연산군 6년 10월 신축. 또한 1423년(세종 5)에는 금사사(金沙寺)에 있던 진언대장경(眞言大藏經), 영통사(靈通寺)에 있던 화엄경(華嚴經)의 판본, 운암사(雲巖寺)의 금자삼본화엄경(金字三本華嚴經) 1부와 금자단본화엄경(金字單本華嚴經) 1부를 운송하기도 하였다.114) 『세종실록』 권22, 세종 5년 10월 임신.

특히 남한강을 통해 왕래되는 물건 가운데 중요한 것이 소금이다. 소금은 해안에서 산출되는 것으로서 간장·된장·고추장 등 장류를 즐겨 먹는 우리에게는 가장 필수적인 식품이다. 그런데 내륙 지방에서는 소금을 구하기가 어려워 값이 폭등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준 교통 로가 바로 남한강이다. 세조 때 대신들이 논의한 내용을 보면 이를 이해할 수 있다.

강원도 영서 지방은 소금이 매우 귀하니, 경기도의 회계에 들어 있는 소금 800석을 참선(站船)을 사용하여 운송하고, 강원도 회계에 들어 있는 소금 200석을 여러 고을로 하여금 차례차례 인제·양구·홍천·춘천·원주·정선 등지에 옮겨 나누어 주어 백성들의 정원(情願)에 따라서 우대하여 지급하고 재목과 교환하여 조선소로 수송하여 배를 만들게 하소서.115) 『세조실록』 권27, 세조 8년 2월 을미.

소금의 유통은 전국에서 생산된 상품이 해로를 따라 경강에 집결되었다가 다시 수로와 육로를 통해 지방으로 분산되는 구조였다. 한양에는 소금을 판매하는 염전(鹽廛)으로 경염전(京鹽廛)·마포염전(麻布鹽廛)·용산염전(龍山鹽廛)이 있었다. 모두가 한강을 끼고 자리 잡고 있었다. 시전을 중심으로 한 유통 체계는 소금 상인이 전라도와 충청도 등지에서 생산된 소금을 싣고 와서 경강의 여객 주인에게 넘기고, 여객 주인은 이를 다시 구매 독점권을 가진 시전 상인인 염전에게 넘기고, 시전 상인은 직접 소비자에게 팔거나 중도아에게 넘겨 한 단계의 유통 구조를 더 거쳐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초 한양의 소금 값은 대체로 시전 상인이 좌우하는 사례가 많았다. 지방에서 소금을 싣고 한양에 온 소금 상인들은 한양 시전 상인들이 독점권을 빌미로 소금 가격을 시가의 절반 이하로 책정하는 등의 폐단을 일으키자 내수사(內需司)에 이익의 일부를 납부하고 보호를 받으려고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시전 상인들에게 수세권(收稅權)만을 인정하고, 소금 상인이 일정한 세금을 내면 자유롭게 판매하도록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경강 일대에는 소금 하역을 전업적으로 하면서 생계를 꾸려가는 임금 노동자들이 생겨났고, 양반가와 부호들이 소금 유통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지방에서는 강을 거슬러 배로 수송하거나 육지로 행상이 지고 다니면서 판매하였다. 수로로는 한강을 비롯하여 대동강·낙동강·금강·영산강 등을 따라 내륙 깊숙이 소금을 운반하여 매매하였다. 특히 낙동강 변에서의 소금 유통은 상인의 사사로운 판매를 금지하고 통영(統營)에서 전적으로 독점하여 소금 값이 10냥 이상으로 뛰어오르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또한 영조 때 암행어사로 전국을 돌아본 이시수(李時修)는 김해 관청에서 직접 4,500냥을 종자돈으로 소금을 사서 강가에 있는 고을에 팔아 2만 냥을 벌었으며, 그 가운데 반이 하급관리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고 보고하고 있다.116) 『정조실록』 권10, 정조 4년 12월 을축.

한편 남한강 변에 있던 조선시대 주요 장시에서 거래된 물목을 통해서도 당시 한강을 통해 유통된 상품이 어떠한 것인지 참고할 수 있다. 조선시대 전국 각 군현별로 대표적인 장시 325곳에서 교역되고 있었던 물품들을 수록해 놓은 『임원경제지』를 통해 살펴보면 표 ‘남한강 유역 주요 장시 거래 품목’과 같다.

<표> 남한강 유역 주요 장시 거래 품목
지역 장시 거 래 품 목
양근 사탄장(沙灘場) 쌀, 면포, 마포, 과물(果物), 어염(魚鹽), 연초, 석자(席子)
여주 부내장(府內場) 쌀, 콩, 보리, 면포, 마포, 과물, 어염, 연초, 치계(雉鷄), 부정(釜鼎), 사기(沙器), 목물(木物), 지지(紙地)
원주 주내장(州內場) 쌀, 면포, 면화, 마포, 과물, 어염, 연초, 철물(鐵物), 우독(牛犢), 지물,
토기
충주 내창장(內倉場) 쌀, 콩, 보리, 면포, 마포, 과물, 어염, 연초, 우독, 명주, 석자

남한강 유역에 있는 큰 장시의 주요 거래 품목이 대부분 일치하고 있다. 쌀과 직물류, 그리고 조선 후기에 등장한 연초, 생선과 소금, 과일 등은 모두가 공통적으로 거래하는 품목이다. 다만 여주는 사기(沙器)와 부정(釜鼎)이, 원주는 토기(土器)와 소(牛), 충주는 소와 돗자리, 양근은 돗자리 등이 각 지역에서 특징적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확대보기
동래부사접왜사도 부분
동래부사접왜사도 부분
팝업창 닫기

이러한 상품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에는 일본 사신도 남한강 수로를 타고 한양에 도착하였다. 조선 초기에 왜인들은 부산포·염포·내이포 등 이른바 삼포(三浦)를 통해 조선에 들어왔다.117) 왜인이 한성으로 입경하는 노정과 양국의 외교에 관하여는 손승철, 「조선 전기 서울의 동평관과 왜인」, 『향토서울』 56,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96, pp.103∼126. 참조. 삼포에 도착한 왜인들은 한양까지 육로나 수로를 이용하였다. 수로를 이용한 경우를 보면 부산포와 내이포로 입국하였을 때는 양산과 김해에서 창녕-선산-충주-광주-한양의 경로로 이동하였고, 염포로 입국하였을 때는 경주-단양-충주-광주-한양의 경로를 밟았다.118) 신숙주(申叔舟),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상경도로(上京道路), p.152. 신승철, 『근세 조선의 한일관계 연구』, 국학자료원, 1999, pp.15∼16. 부산포와 내이포에서 수로를 타고 한성까지 가는 시간은 대략 19∼21일가량이 걸렸고, 염포에서 한양까지는 15일이 걸렸다. 이들이 어느 길을 선택하든 간에 중간 기착지는 충주였고, 이곳에서 남한강 수운선을 타고 한양으로 올라갔다. 세종 때는 남한강 변의 수참에서 왜인의 내왕에 따른 영송(迎送)과 접대가 번잡하여 수부들을 다른 잡역에서 제외시켜 주자는 건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왜인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119) 왜인들이 이용한 이 길은 임진왜란 때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이후에는 왜인들의 직접적인 입경을 막고 외교적인 일은 대부분 부산의 왜관을 통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손승철, 앞의 책, p.35).

지금까지 조선시대에 수로를 통해 유통된 상품은 미곡 이외에도 매우 다양하였고, 일본 사신의 왕래도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이로 인해 물류 운 송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 작업장을 떠나는 자가 속출하였던 것이다.

상인들은 강원도 산간 내륙으로 소금을 운송하고, 산간 내륙에서는 한양에서 궁궐 신축 등 건축물을 지을 때 필요로 하는 목재를 벌목하여 한양으로 운송하였다. 일반적으로 물길과 물길이 만나는 곳과 육로가 함께 닿는 곳은 교통의 요지로서 예로부터 많은 인파가 몰렸고, 자연스럽게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

남한강 줄기에서는 충주와 목계·금천·원주·여주 등지가 이에 해당한다. 충주는 남한강과 달천이 만나는 요지로 한양에 근거지를 둔 사대부들이 정자와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었으며, 사방에서 배와 수레가 모여들어 큰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시장 사람들은 편리한 물길과 육로를 이용하여 동남쪽으로 영남의 물화를 받아들이고 서북쪽으로 한양과 생선 및 소금을 교역하면서 이익을 취하였다. 충주의 내창장(內倉場)도 큰 시장으로 지역 경제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던 곳이다. 조창이 있던 가흥은 많은 세곡과 인파가 모여들어 일찍부터 숙박업소인 객주업(客主業)이 발달할 정도였다.

금천도 충주와 유사한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물화의 교역이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인근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민가가 마치 빗살처럼 촘촘하게 이어져 있어 한양의 강 마을과 흡사하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원주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남한강 하류의 목계도 생선배와 소금배가 정박하고 외상 거래가 이루어졌으며,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골의 물화가 모두 여기에 모여들어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목계장뿐만 아니라 여주의 이포장, 광주의 송파장 등도 남한강의 물줄기를 이용한 상품 거래로 생계를 유지하던 지역이었다.120) 이중환, 『택리지』 팔도총론 충청도.

결과적으로 남한강 변에 자리 잡고 있던 강변 마을은 물길을 이용한 물품 교역을 토대로 도시를 형성하고 경제활동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은 객주업이나 상인 및 주막 등을 운영하면서 각 지역 경제의 중핵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전근대 사회의 지역 경제 활성화가 장시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감안할 때 이러한 유통을 원활하게 만들어 준 것은 수로 유통이었다. 곧 수로는 각 지방으로의 원활한 상품 유통에서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교역을 통한 상품 화폐 경제를 활성화시켰다. 나아가 상품의 균등한 지역적 분배로 국가 경제 생활의 향상에도 일조하였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