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3장 개항기 상업 발달과 대외 무역
  • 1. 개항기 상업계의 변화
  • 상업계의 동향과 상업관의 변화
오성

개항 이전 우리나라의 상업 체계는 한마디로 도고(都庫) 상업 체제라 할 수 있다. 17세기 후반부터 시전 상인(市廛商人) 등 일부 특권 상인과 사상층(私商層)에 의한 독점적 상업이 계속해서 진행되어 왔다. 또한 이들은 당시 대표적 자본가로 성장·발전하고 있었다.

문호 개방이라는 새롭고도 뜻하지 않는 시대 변화에 따라 국내의 상업계 역시 바뀔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다. 변화의 주된 양상은 도고 상업 체제의 해체 작업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개항 이전에도 도고 상업의 문제점과 반도고론이 대두되었지만, 도고 상업 해체론은 개화파 정치 세력에 의해 계승되어 이들이 추진한 경제 정책의 주요 사항이 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개화파가 내놓은 14개 정강 가운데 ‘혜상공국혁파사(惠商公國革罷事)’가 있다. 혜상공국은 1883년에 조직된 보부상(褓負商) 단체이다. 추진 세력은 보수파 정치인이었던 민태호(閔台鎬), 민영익(閔泳翊), 이조연(李祖淵) 등이었다. 자유 상인의 경제 활동을 억제하고 이들의 이익을 침탈할 의도 아래 특권 상인 단체로 발족시킨 것이었다. 아울러 혜상공국에 속해 있는 보부상들을 이용하여 개화파 세력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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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익
민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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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혜상공국의 폐지 주장은 기왕의 특권 경영 체제를 해체하고, 좀 더 근대적인 경제 질서를 수립하려는 것으로 이해된다. 개화파의 주요 인물이었던 박영효(朴泳孝)도 정변 실패 후 일본 망명 때에 임금에게 올린 ‘개화에 대한 상소’에서 도고 상업의 해체를 주장하였다. 대표적 개화 사상가였던 유길준(兪吉濬) 역시 정부가 상인을 보호하고 상업을 발달하게 하는 길은 공정성 확립과 도로 수리를 통한 교통의 원활과 편리에 있지 상인에게 특권을 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개화파에 의한 도고 상업 해체 움직임과 함께 또 하나 주의할 것은 개항 후 국내 상업계에 침투하여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 외국 상인 자본의 움직임이다. 이들은 국내 도고 상인들에 의해 여러 저해를 받고 있었다. 한국의 생산품을 수입한다거나 자국 물품을 한국에 판매하는 데 있어서 제약을 받고 있던 것이다.

외국 상인 세력에 가장 크게 저해가 되었던 상인은 육의전(六矣廛) 상인이었다. 일반 시전의 금난전권(禁亂廛權)은 1791년(정조 15)의 신해통공(辛亥通共)을 비롯한 몇 차례의 통공 정책에 의해 상실되었다. 그러나 육의전은 통공에서 제외되어 있었으며, 개항 이후에도 육의전의 도고권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개항 초기에는 외국 상인, 특히 일본 상인의 진출이 개항장에만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육의전과 일본 상인 간의 직접적 충돌은 없었다. 그러나 점차 외국 상인이 서울 시내까지 침투해 옴에 따라 충돌이 빚어지기 시작하 였고, 상권 분쟁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결국 갑오개혁을 계기로 육의전에 대한 특권 옹호책도 무너지게 되었고, 일본 상인이 큰 이익을 얻게 되었다.

한편 도고 상업 체제에 대해서는 기왕의 특권 상업 체제를 해체하고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유발, 촉진시켜야 한다는 여론도 많이 일고 있었다. 갑오개혁을 계기로 육의전에 대한 특권 해제 조치가 내려지긴 하였지만, 육의전이 갑자기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독립신문(獨立新聞)』이나 『황성신문(皇城新聞)』 같은 언론에서는 논설을 통하여 정부가 상업 발전을 뒷받침하려면 상인의 편의에 맡기는 방법밖에 없다 하여 자유 상업 체제를 강조하였다. 언론에서는 이러한 자유 상업 체제의 강조를 부강의 기초로 파악하였고, 국가가 부유해질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개항 무렵에도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박규수(朴珪壽)는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 조선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었다면 일본의 무력시위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개탄하였던 것이다.121) 『일성록(日省錄)』 고종 13년 정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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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 초상
황현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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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 개방 이후 20여 년 동안 정치적·경제적 혼란을 거치면서 경제 분야에서 절실하게 필요성을 느낀 부분은 근대적 공업을 진흥시키는 것이었다. 외세의 침투로 인한 혼란을 극복하고 자율적이면서 근대적인 체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공업의 육성이 대단히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서구 자본주의 제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면직물과 같은 생활필수품이 농촌 지역에까지 침투해 들어가고, 그 결과 막대한 자금이 해외로 유출되었다. 결국 국가 재정에 커다란 타격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수출품은 모두 곡물이나 원자재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수입품은 가공품이 주류였다. 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당시 수출입 물품의 사정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외화(外貨)로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은 10 중 사람이 만든 것이 9이며, 아화(我貨)로 나가는 것은 10 중 천산(天産)이 9이다.122) 황현(黃玹), 『매천야록(梅泉野錄)』 1, 상, 갑오(甲午) 이전.

이러한 사정은 결국 생활필수품부터 국내 생산품으로 자급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하였고, 공업품을 생산하는 공장의 설립을 추진하게 하였다. 또한 일상 생활품의 해외 의존도가 높아지고 소비 성향이 증가하고 아울러 미곡류, 금, 은 등 국내 산물이 대거 유출되자 물가가 앙등하는 현상도 초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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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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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문들도 공업 진흥책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는데, 공업에 대한 수탈 방지, 공업의 기계화, 주식회사 형태의 제조 회사 설립 등을 강조하였다. 제조 회사로서는 잠업 회사, 직포 회사, 연초 회사 등을 시급히 설립해야 할 예로 들었다. 또한 국내 자본이 부족할 경우에는 외국인과의 합자(合資)도 무방하다는 주장을 폈다. 실제로 1897년 대조선 저마 제사 회사(大朝鮮苧麻製絲會社)가 설립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삼과 모시를 합사(合絲)하여 외국의 직조 공장으로 수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외자 4만 원, 내자 3만 5000원으로 내국인과 외국인이 공동 출자한 이 회사는 상당한 영업 이익도 거두고 있었다. 생산비는 1톤당 500원이었으나, 수출가는 1,400원이었기 때문이다. 경영도 내국인과 외국인이 함께하였다. 안경수(安駉壽), 윤효정(尹孝定), 서재필(徐載弼, 당시 미국 국적) 등과 미국인, 영국인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러한 근대적 회사와 공장의 설립은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서구 열강에 예속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어 매우 중요한 경제사적 의미가 있다.

개항 이후 상당 기간이 지나면서 외세와의 접촉이 잦아지자 점차 경제적 실리를 추구해보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청나라나 일본과의 접촉에는 경계심이 고조되고 있었지만, 구미인과는 가능한 한 교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외국 상인과 외국 자본이 진출하되 이를 통하여 내국인의 고용이 증대되고, 그 이윤은 국내에서 다시 재투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문호 개방 이후 근대적 상공업관이 세워지고, 상공업 장려책이 강조되면서 상업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 갔다. 상공업관의 변화는 새로운 상공업자 계층의 형성을 유발, 촉진시킬 수 있는 전제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근대적 직업의식에 바탕을 둔 상공업자 계층의 형성을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특히 외국 자본의 침투 이후 치부법(治簿法)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고, 관세 규칙, 화폐 교환율, 시장 조사 등의 문제에 대한 훈련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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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 전습소 본관
공업 전습소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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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이후에는 상공업자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를 설립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독립 협회라든가 갑오개혁 이후 설치된 상무 회의소(商務會議所) 등에서 상무 학교 설립을 주장하였다. 1899년 6월 상공 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그 관제를 발표하였다. 상업과 공업에 필요한 실질적 학문을 교육하는 것을 목적으로 상업과와 공업과의 두 과를 두었고, 예과 1년에 본과 3년으로 교육 연한은 4년이었다. 학교장, 교관, 서기가 있었으며, 외국인 교관도 고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상공 학교는 지방에도 설치할 수 있고, 공사립 모두 설립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인공 양잠 전습소(人工養蠶傳習所), 광산 기술자 양성을 위한 광무 학교(鑛務學校), 직조 학교(織造學校) 등이 설립되었고, 공업 전습소를 설 치하여 염직공, 직조공, 제지공, 목공 기술자 등을 양성하였다. 또한 민간의 각종 제조 공장에서도 기술자 양성소를 부설하여 기술 향상을 꾀하였다.

요컨대 종래의 상업 구조를 개혁하고 자본주의적 경영 방식에 의한 각종 제조 회사가 설립됨에 따라 새로운 경제 체제를 담당할 수 있는 경영자, 기술자 확보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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