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3장 개항기 상업 발달과 대외 무역
  • 1. 개항기 상업계의 변화
  • 상회사의 설립
오성

개항 이후 상업계에서는 상회사를 설립하여 근대적 상업 체제를 발전시키려는 일련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당시 사회 지도자들이 서구의 회사 제도에 대한 소개와 회사 설립을 촉구하는 논설을 발표하면서 회사 설립 운동이 활기를 띄게 되었다. 대표적인 글은 유길준이 동경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발표한 상회 규칙(商會規則)과 1883년 10월 21일자 『한성순보(漢城旬報)』에 수록된 회사설(會社說) 등이 있다.

상회 규칙은 모두 25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용은 주식의 발행과 출자, 사장 선출 방법, 주주 총회, 본사의 기구와 지사 설치 등이었다. 회사설에는 “여러 사람의 자본을 모아 몇 사람에 위탁하여 농공상(農工商)의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회사가 서양 부강의 기초라 하여 정부가 회사 설립을 장려할 것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제시된 회규를 보면 공개적으로 자본을 모 집하고, 유능하다거나 지분이 많은 사람이 회사의 사무를 맡고 회사의 운영을 공개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주식회사의 설립과 운영, 회사 역원의 선출, 대차 대조표 공개, 이윤의 분배 등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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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
유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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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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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회 규칙이나 회사설은 개화파의 계몽 활동을 잘 보여 주는 사례이다. 또한 회사의 설립을 직접 정부에 건의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서울 안에 상회소와 국립 은행을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124)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2904책, 고종 19년 9월 22일. 회사 창설을 위한 개화파의 노력에 대한 정부의 호의적 반응은 민간 회사의 출현을 낳았는데, 이러한 움직임을 자극한 것 중 하나는 개항장과 서울에 들어 온 외국인 상사로 예컨대 세창양행(世昌洋行), 이화양행(怡和洋行) 등이었다.

상회사는 1883년부터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객주들이 주로 상회사를 설립하였다. 상회사 가운데에는 서울이나 개항장에 본점을 두고 주요 상업 지역에 지점을 두는 형태로 전국적 영업망을 구축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하여 1883년 원산에 상회소가 생겼고, 이어 1885년 인천에 상회가 설립되었으며, 1890년 부산에 상법 회사가 세워졌다. 이들 상회소는 일종의 동업 조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중앙의 관리와 개항장의 감리 통솔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관설 성격의 구조는 정부가 영업세를 거두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지만, 외국 상인의 침탈로부터 국내 상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125) 한우근, 『한국 개항기의 상업 연구』, 일조각, 1970, pp.208∼210. 1883년부터 갑오개혁 때까지 문헌상 나타나는 상회사는 모두 40여 개에 달하였다.

상회사를 설립한 자본주는 대체로 대자본가로 성장하고 있던 도고 상인들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들이 자본의 규모를 확대시키고 합자 형태를 주식제로 바꾸어서 상회사를 설립한 것이었다. 결국 도고가 해체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도고 자본을 바탕으로 상회사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정부가 설립한 회사도 출현하였다. 1889년에 내항(內港)의 운수와 무역을 위하여 기선 회사가 설립되어 세 척의 기선을 운영되었다. 항세(港稅)를 면제받고 있던 이 회사는 1892년 세곡을 운반하기 위한 관민 합변 회사(官民合辨會社)인 이운사(利運社)가 설립되자 여기에 흡수되었다.126) 한우근, 앞의 책, pp.243∼246.

상회사가 대거 설립되었지만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몇몇 대상(大商)이 회사를 설립하고, 군소 상인에게 출자토록 하되 출자하지 않는 상인의 상행위를 금하고, 해당 상품을 독점적으로 매점하였던 것이다. 결국 도고와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없었던 셈이다. 더욱이 정부에서도 이들이 바치는 영업세가 국가 재정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특권을 인정해 주고 있었다. 1901년 옥구에 세워진 영흥 회사(永興會社)는 그곳을 지나는 선박에게서 세금을 거두었고, 사령 수십 명을 해상에 두고 감시토록 하였으며, 모자에 어자표(御字標)를 붙이고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으며, 궁내부(宮內府)의 훈령이라 빙자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상회사의 해체 문제가 또다시 당면의 과제로 등장하였다. 정부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상당히 고심하였지만, 정부 입장은 종래의 도고 체제를 근대적 회사 체제로 전환시키고 이들을 보호함으로써 상업을 발달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정적 측면이 발생함에 따라 특권 회사가 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조치를 여러 차례 내렸지만, 쉽게 결실을 얻지 못하였다.

갑오개혁 이후에 가서는 상회사 이외에도 기선 회사, 은행, 공장 등이 활발하게 설립되었다. 하지만 기선을 이용한 민간 해운업은 대부분 일본 선박 업체와의 경쟁에서 뒤지거나, 자금의 부족, 기선의 사고 등으로 단명 하곤 하였다. 그러한 중에서도 함경도 지방에서는 조선인 해운업자가 국내 유통 관련 물자 운송을 장악하면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00년 이후에도 관료, 객주 등이 항해권 회복을 목표로 해운 회사를 설립하기도 하였지만, 정부 지원의 부족과 일본 해운업자의 견제로 1903년부터는 경영이 부진해졌고 결국에는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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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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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황실, 개화파 관료, 기업가 등은 조선은행, 한성은행 등 은행을 설립하였고, 민간에서는 철도 부설을 추진하였지만 자금난, 신용 기반의 미성숙, 경영 기법의 미흡 등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회사 설립에는 관료층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애당초 이들은 개화를 실현하려는 의식에서 참여하였으나, 그러한 의식은 점차 사라지고 부를 획득하기 위한 것으로 변질되었다. 관료 중 고위층은 여러 회사의 설립에 참여하였고, 그 가운데 상당수가 장기간 기업 활동에 종사하였다. 반면 중하위층은 특정 업종에 국한하여 단기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1905년 이후에는 고위 관료층의 회사 참여가 현저히 퇴조한 반면, 유력 상인층이 대거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금 수출이 증가하고 개화파의 광업 개발론이 대두하면서 1880년 대부터 광산 개발을 적극 추진하였다. 영흥 금광(永興金鑛)의 경우에는 1880년대 중엽에 12∼21지역에 4,000∼1만여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성황을 이루었다.127) 이헌창, 앞의 책, p.260. 1895년 광업에 관한 법제가 마련되고 정부가 광업의 개발에 적극성을 띠자 광업은 계속 확장되었고, 1899년에는 민간 광업 회사가 출현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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