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3장 개항기 상업 발달과 대외 무역
  • 1. 개항기 상업계의 변화
  • 상업적 농업의 발달
  • 인삼의 경작과 홍삼 가공업
오성

개성은 인삼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개성 인삼은 이미 조선 중엽 이래 중국, 동남아시아 일대에 널리 알려져 개성 인삼의 별칭이었던 ‘고려 인삼’은 각국이 다투어 무역 거래를 원하는 특산품이었다. 개성의 부호는 금융업과 더불어 인삼의 재배, 가공, 매매업에 관계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 널리 운위될 정도였다.

구한말 시기 개성 인삼의 수확량, 세액, 삼가(蔘價) 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96년 인삼 수확량은 4만 5440훈트로 가격으로 환산하면 60만 달러였으며, 이듬해의 수확량 가격은 120만 달러였다고 한다. 1895년경의 홍삼 제조량은 인삼의 작황과 시장의 상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략 1만 5000∼2만 근 정도였으며, 한 근당 10원씩의 물품세가 부과되었다. 1895년에는 1만 5000근의 홍삼이 제조되어 15만 원의 세금이 징수되었다. 홍삼 제조를 원하는 사람은 탁지부(度支部)에 신청서를 제출하고, 제조 권리를 얻는 대가로 생삼 100근을 증기로 찌는 데 2원을 지불해야 했으며, 생삼을 구입할 때에도 한 근당 20전의 세금을 내야 했다. 한 근당 20전의 세액은 인삼 재배자에게도 부과되었다. 그런데도 질이 좋고 잘 팔릴 때 인삼주는 지출액의 15배나 되는 거액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고 한다.128) 이 시기 개성 상인과 인삼업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양정필, 「19세기 개성 상인의 자본 전환과 삼업 자본의 성장」, 『학림』 23, 연세대학교사학연구회, 2003 참조.

개성 출신 인사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에 삼포(蔘圃) 1,000 간 정도를 경작하여 얻을 수 있는 수입은 미곡 한 가마가 5∼6원 할 때 5,000∼6,000원 정도였고, 작황이 좋으면 7,000∼8,000원 정도였다고 한다. 대략 미곡 1,000∼1,300가마에 해당하는 액수였던 셈이다. 이중 삼포 경작에 소요되는 영농비는 2,000원 내외였다고 한다. 따라서 삼포 1,000간을 경작하면 중류 이상 상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한다. 한편 1916년 청나라 시장에서의 조선산 고려 인삼의 한 근당 평균가는 150원 내외였다. 반면에 미국산 인삼은 20원 내외, 만주산 관동(關東) 인삼은 8원 내외, 일본 인삼은 5원 내외에 불과하였다. 1926년에 청나라로 수출한 개성 인삼은 3만 6370근으로, 가격으로 환산하면 192만 5280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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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의 삼포
개성의 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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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고 있듯이 인삼은 6년 만에 채출하는 까닭에 인삼을 경작하려면 6년 동안 자본을 계속 투입하여야 한다. 삼포 매간당(每間當) 생산비를 5∼6원 정도로 추정할 때 개성인들이 경작하던 삼포에 투입하는 자금은 대략 200만 원일 것으로 추측된다.129) 박재청, 「시변소론」 (6), 『고려시보』 1933년 8월 16일자, 고려시보사. 1930년대 개성에서 생산되던 홍삼은 연 4만 근 정도로서130) 1904년부터 1925년까지 개성에서 생산되던 홍삼은 해에 따라 생산량이 달랐지만, 대체로 연간 2∼4만근 내외였다(朝鮮總督府 專賣科 開城出張所, 『蔘政指針』, 1916, p.10 ; 朝鮮總督府 專賣局 開城出張所, 『蔘務槪要』, 1926, pp.8∼9 참조). 홍삼 연산액은 150∼160만 원, 백삼은 110∼120만 원 정도였다. 1936년 전매국 통계에 따르면 인삼 수출 총계는 13만 4393근으로 가 격으로 환산하면 354만 8492원이었다.131) 『고려시보』 1937년 3월 1일자.

식민지화 이전인 1908년부터 홍삼 전매와 경작 구역을 설정하였던 까닭에 개성에서 합법적으로 구역삼을 경작하던 경작자는 300여 명이었으며, 종업원은 1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개성에서의 인삼 생산은 ‘구역 밖 삼’이라 일컫던 밀삼(密蔘)의 재배와 가공량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1920년대 말 개성 일대에서 경작되던 삼포의 면적은 대략 175만 평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합법적으로 경작되던 구역 내 삼포는 시기에 따라 다소 달랐지만 대략 25∼40만 평 정도였다. 따라서 밀조 인삼의 생산량이 구역 내에서 경작되던 인삼의 양을 능가하고 있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시변(時邊)에서 거래되던 자금 역시 밀조 홍삼의 제조에 상당 부분 투입되었을 것으로 보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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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익 초상
이용익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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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삼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대외 무역품으로서 막대한 이득을 가져오는 상품이었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일찍부터 인삼의 재배와 가공 및 판매에 대한 통제와 함께 인삼에서 얻어지는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정부의 시도는 1898년에 이용익(李容翊)이 궁내부(宮內府) 내장원경(內藏院卿)에 취임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즉 인삼의 수입을 황실의 비용에 충당코자 그 전매권을 궁내부 내장원에 귀속시키고 엄중히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용익은 삼포 경영과 인삼의 가공, 판매를 효과적으로 독점하고자 1899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매 회사인 삼정사(蔘政社)를 발족시켰다. 삼정사는 정부와 민간인의 자본으로 조직된 반관반민(半官半民) 회사였으며 삼포의 경영 관리, 홍삼의 가공, 제품의 판매 및 세 징수의 대행을 겸하였다. 삼정사의 본사는 개성에 두고 내장원경이 이를 감동(監董)하기로 하였다.

삼정사의 발족은 당시 인삼 경작업자들의 커다란 반발을 샀으나, 내장원경이던 이용익은 삼포에서의 수입이 궁내부의 주 재원이었던 까닭에 삼포에 대한 통제와 관리권을 계속 궁내부 내장원이 지니도록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대한제국의 재정 관리권이 통감부의 지휘를 받게 되자 삼세 및 홍삼 전매 수입은 국고(國庫)로 이관되었다. 또한 그 관리권도 1907년에 탁지부에 귀속되었다. 이후 정부는 1908년 7월 전 25조의 홍삼 전매법(紅蔘專賣法)을 공포하였다. 홍삼 전매법의 주요 내용은 인삼의 재배는 정부로부터 면허를 받은 자만이 할 수 있으며, 재배된 인삼은 모두 정부에 남품해야 하며 홍삼의 제조는 정부에 전속될 뿐만 아니라 홍삼의 판매나 수출은 정부 또는 그가 지정한 상인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08년 홍삼 전매법이 발표되면서 탁지부 사세국(司稅局)에 삼정과(蔘政科)를 설치하여 이를 개성에 분치(分置)하고, 홍삼 원료인 인삼의 수납 업무를 담당하게 하는 한편 인삼 특별 경작 구역을 설정하였다. 즉 개성, 풍덕, 장단, 토산, 금천, 서흥, 평산, 봉산 등 여덟 군에 인삼 특별 경작 구역을 지정하고, 이어 1913년에는 평남 중화군, 황해도 해주군과 수안군 일대에 경작 구역을 추가로 지정하였다. 결국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는 인삼 재배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개성인의 삼포 경영은 일제 강점기에 더욱 번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인삼의 수납 업무 담당 기관은 1910년 삼정국으로 독립된 국이 되기도 하였으나, 한일 병합 이후 관제 개정에 의해 전매국 출장소, 사세국 출장소(1912), 탁지부 전매과 개성 출장소(1915), 재무국 전매과 개성 출장소(1919), 경성 전매지국 개성 출장소(1921), 전매국 개성 출장소(1925) 등으로 담당 부서의 명칭과 지위가 여러 차례 바뀌었다.

1928년 무렵의 개성 경제력은 개성과 장단, 파주, 연백, 금천 등지의 경지를 40∼90% 정도 소유하고 있었으며, 평산, 서흥, 신계, 해주 등 여러 군에서 20∼40%의 경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소유 경지의 견적 가격은 약 6,000만 원으로 추산되며, 그 밖의 부동산이 1,200만 원, 자본 3,500만 원 등으로 개성의 부력(富力)은 모두 1억 200만 원 정도였다. 이 무렵 개성에 거주하던 한국인의 호수는 8,800여 호이므로 한 호당 평균 보유 부력은 1만 1500원 정도였다. 당시 개성에는 부력을 70만 원 이상 소유한 자산가가 없었던 만큼 개성 사람은 대부분 부유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 밖에도 전국에 출상가 있는 차인들이 운용하던 자본금은 4,000∼5,000여만 원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한편 개성 지방의 독특한 사금융제인 시변제(時邊制)에 의해 거래되던 액수는 300만 원에서 800만 원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이 무렵 조선식산은행과 한성은행의 개성 지점, 송도 금융 조합과 개성 금융 조합에 예금된 예금액은 80∼90만원 내지 130∼140만 원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 예금고도 대부분 관공서와 기타 공공 단체의 예금이었다.132) 참고로 1935년 12월∼1936년 11월까지 개성 우편국에서 취급된 우편 저금의 예입고를 보면, 총 31만 9703원 29전이었다(『고려시보』 1937년 1월 1일자). 따라서 개성 상인들이 예입한 은행 및 금융 조합 예금액과 시변제에 의해 거래되던 액수는 매우 대조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시변제에 의해 거래되던 금액의 상당 부분은 개성 상업의 운영과 인삼의 경작과 가공이라는 두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입, 이용되고 있었다.133) 오성, 「한말∼일제시대 개성의 시변제」, 『한국근현대사연구』 2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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