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3장 개항기 상업 발달과 대외 무역
  • 1. 개항기 상업계의 변화
  • 상업적 농업의 발달
  • 연초 제조업의 발달과 재편
오성

16세기 말 17세기 초에 전래된 연초(煙草)는 이후 급속하게 보급되면서 오랜 기간 대표적인 기호품으로 꾸준히 소비되어 왔으며, 상업적 농업으로 재배되던 대표적인 상품 작물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면 생산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여 연초 가격이 오르게 되자 재력 있는 양반, 부상, 지방 토호들이 연초 소비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18세기에는 농민들이 토지에 곡물 대신 생산 이익이 많은 연초를 재배할 정도가 되었고, 1730년대에는 호남 지방의 진안, 장수 같은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한 지역의 토지에 모두 연초를 재배하는 현상까지 일어났다. 연 초 재배 지역도 점차 확대되었다. 18세기 말에는 호남의 진안·장수, 관서의 성천·강동·평양 등의 지역을 중심으로 황해도의 신계·곡산·토산, 강원도의 금성·안협, 충청도의 정산, 경상도의 영양 등이 대표적인 연초 산지로 자리를 잡았다.134) 이영학, 『한국 근대 연초업에 대한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0, pp.20∼29.

연초는 서울을 비롯하여 지방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유통되었다. 서울에서는 17세기 중엽 이후 엽초전이 연초 소매상의 기능을 담당하였고,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사상들이 연초 판매에 종사하면서 판매액도 증가하였다. 지방에서는 주로 지방의 대도시, 광업이나 수공업 촌락, 장시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판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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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죽 든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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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에는 사회적 생산력 증가와 함께 연초 소비가 늘어나면서 엽연초를 가공하는 연초 제조업이 발달하였다. 연초 제조업은 외국 연초의 유입과 외국 자본의 제조업 침투에 따라 이들의 자극을 받아 발전하는 한편 판매 영역을 둘러싸고 외국 자본과 경쟁하여 갔다. 이러한 양상은 전직 관료·상인·지주 및 부농 등이 그들의 자본을 연초 제조업에 투자하면서 두드러졌다. 특히 조선인과 외국인 간의 경쟁은 1894년 이후 불붙기 시작하여 1904년 이후에는 판매 영역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다.135) 이영학, 앞의 글, pp.1∼3.

1896년 이후 외국인들은 자본을 투자하여 경성·인천 등지에 연초 제조 회사를 설립하였고, 1900년 이후에는 부산·대구·군산 등의 개항장 또는 대도시에도 제조소를 설립하면서 제조업 분야에 침투해 들어왔다. 특히 1904년 이후 일본제 연초가 본격적으로 유입되고 일제의 연초 제조 회사 설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국내의 연초 재배업과 제조업은 자본의 부족과 정부의 식산흥업(殖産興業) 정책의 미비로 점차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136) 이영학, 위의 글, pp.261∼262.

식민지화 이후에는 1910년에 공포된 회사령(會社令)에 의하여 한말 이후 치열하게 경쟁하던 연초업 부문에서 조선인 자본가들은 배제되어 갔고 일본인 자본가가 연초 제조업을 장악해 나갔다. 또한 1910년대에 연초세를 조세 항목으로 설정하고 연초세의 세율도 올려 갔다. 조선 총독부는 1921년 7월에 연초 전매제를 실시하여 연초 재배업·제조업·판매업의 모든 부문을 통제함으로써 조선의 경작 농민·제조업자·판매업자를 몰락시켰고 소비자에게 비싼 전매 연초를 소비하게 함으로써 수탈을 행하여 조선 총독부의 재정 세입을 늘려 나갔다. 식량·원료의 공급 기지와 재정 세입 확보책을 위한 일제의 식민 정책 아래에서 연초업 부문도 재편되어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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