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3장 개항기 상업 발달과 대외 무역
  • 2. 개항장의 발달과 도시의 거상들
  • 도시 거상의 활동
  • 개성 상인의 활동
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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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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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사람들은 조선 왕조 건국 이후 정치적 출세보다는 상업적 성공을 지향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가치관은 개성이라는 도시 사회에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던 것이었다. 개성 사람들의 직업 역시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1905년의 개성 남부 도조리 지역의 호적 대장을 보면 호주의 직업이 상업인 경우가 52.6%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농업호는 33.1%에 이르고 있지만, 농업호 중에는 삼포 농가가 많았으며, 이 밖에도 마와 목면 등을 재배하는 농가가 있었다. 또한 개성의 명산이 었던 백채(白菜) 등 소채류를 재배하여 상품화하는 농가도 많았다. 특히 백채는 서울의 시장과 황해도 일대에 대량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이는 답(畓)보다 전(田)이 약 1.4배 많던 개성의 지형적 특성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개성의 농업호는 대부분 상업적 농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개성 지방의 주민 상당수는 인삼의 경작, 가공, 판매에 종사하고 있었다. 특히 삼포 경작자들은 개성을 상업 도시로 발전시켜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개성의 삼포주 중에는 대를 이어 가업으로 삼포를 소유, 경작하던 사람이 우선 많았던 것 같다. 대표적인 예로 손봉상(孫鳳祥), 공응규(孔應奎)·공성학(孔聖學) 부자 등을 들 수 있다. 손봉상의 경우를 보면, “이 사람의 삼경(蔘耕) 작업이 집안 전래의 업이지마는 이 사람에 의하여 대성되었다 합니다.”라는144) 장재흡, 앞의 책, p.155. 말로 미루어 인삼 경작이 손씨 집안 전래의 가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본격화된 것은 손봉상의 대에 와서였다. 이후 “손봉상에 의해 발명된 인삼 제품도 적지 않다.”는145) 장재흡, 앞의 책, p.155.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손봉상은 삼포 경작뿐만 아니라 인삼의 제조와 판매에서도 개성의 삼업계에 많이 공헌하였다. 개성 인삼 경작계의 원로라든가 개성 상업계의 노장이라는 평을 듣던 그는 개성 삼업 조합의 조합장과 개성 상업 회의소의 대표자를 오랜 기간 지내면서, 대표적인 개성 상인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아울러 그는 합자 회사인 영신사(永信社)의 사장으로도 활동하였으며, 또한 1914년 자본금 20만 원 규모의 합자 회사인 고려 삼업사(高麗蔘業社)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공응규·공성학 부자의 경우는 선조 대부터 삼포 경작에 종사하였으나, 공응규 때에 와서 부상(富商)이 되었다. 공성학은 인삼으로 자본을 축적하여 근대 기업가로 성장한 인물이었다.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1850∼1927)에게 사사받은 그는 제2대 개성 인삼 조합장을 역임하면서 인삼의 품종 개량, 경작 방법 등의 개선을 통하여 삼포 경영 방법의 혁신을 꾀하였다. 공성학은 뒤에 개성을 대표하는 실업가의 한 사람으로서 여러 사업 분야에 서 상당한 활동을 벌였다. 즉 개성 전기 주식회사(開城電氣株式會社), 송도 고무 공업 주식회사 등의 기업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성 양조 주식회사(開城釀造株式會社, 1925), 춘포사(春圃社, 1934), 개성 삼업 주식회사(開城蔘業株式會社, 1936) 등을 설립하였으며, 개성 인삼의 해외 시장 개척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146) 조기준, 앞의 책, p.273.

한편 최익모(崔益模)는 인삼의 판매 분야에서 남다른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 총독부가 홍삼의 위탁 판매권을 일본의 미쯔이(三井)에 독점시키자 백삼(白蔘)을 ‘고려 인삼’이라는 상표로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고려 인삼’이라는 상표에 금대(金帶)를 입혀 포장을 개량하고, 새로운 판매법으로 통신 판매를 고안해 내었다. 그의 ‘고려 인삼’은 국내외에서 홍삼 못지않은 성가를 누리게 되어 개성 인삼의 국제적 판로망을 개척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인삼 경작업에 종사하던 개성 사람들 가운데에는 전통적인 삼포 경작 집안의 후손들만 있지는 않았다. 상인이나 삼포주의 자손으로 생각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당당한 양반가의 후예도 있었다. 문과(文科)의 대과(大科)나 생진과(生進科)에 합격한 사람의 자손이 바로 그들이다. 예를 들면 남부(南部) 도조리(都助里)에 살던 김종한(金鍾漢)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순천 김씨인 그의 호적에는 아버지인 김근규(金覲圭)가 진사였다고 적혀 있다. 실제로 김근규는 1867년(고종 4)의 진사시(進士試)에서 1등으로 합격하였다. 김종한의 집안은 부계와 모계를 합하여 조부대 이래 이미 세 명의 생원과 진사를 배출해 낸 손색없는 양반가였다. 더욱이 김종한의 10대조가 되는 김성갑(金誠甲)은 생원을 거쳐 1610년(광해군 2)의 식년시(式年試)에서 대과에 합격한 인물이었다.

대과 급제자와 생원 진사의 후손으로는 김진우(金鎭禹)도 있다. 예안 김씨인 그는 서부(西部) 관전리(館前里)에 있는 3년근 200간의 삼포를 경작하고 있었으며, 살고 있던 집은 초가 15간이었다. 그의 호적에는 증조부인 김일성(金一成)이 진사였다고 적혀 있다. 실제로 김일성은 1816년(순조 16)의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김진우의 11대조와 김현도(金玄度)는 1576년(선조 9)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이후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10대조인 김정후(金靜厚)는 진사를 거쳐 1605년(선조 38) 정시(庭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부자가 잇따라 문과에 급제하였던 것이다. 김진우는 적어도 두 명의 대과 급제자와 한 명의 생진과 합격자를 낸 가계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1905년 당시 북부(北部) 이정리(梨井里)에 살던 설효석(薛孝錫)의 경우 부친 설한주(薛翰周)는 1835년(헌종 1) 증광시에서 생원이 되었으며, 설한주의 종제인 설병주(薛秉周)도 이때 함께 생원이 되었다. 백부 설익주(薛翊周) 역시 1837년(헌종 3)의 식년시에서 생원이 되었다. 설효석의 장형인 설용석(薛用錫) 또한 1873년(고종 10) 진사과에 합격하였다. 설효석의 가문은 그의 아버지부터 네 명의 생원과 진사를 배출하였던 것이다. 이런 집안의 자손인 설효석은 1905년 당시 와가(瓦家) 25간에 초가(草家) 18간으로 모두 43간 규모의 가옥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설효석은 1896년 당시 황해도 수안군 천곡방(泉谷坊) 용촌(龍村) 지역에 5년근 2,100간과 1,100간, 도합 2좌(座) 3,200간의 삼포를 소유하고 있었다.

요컨대 개성에서 인삼의 경작과 가공업을 통해 상인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의 사회적 배경은 매우 다양하였다고 파악된다. 이와 같은 현상은 곧 개성의 상업계 내지 개성 상인들이 지니고 있던 특성의 일면이자, 개성 사회가 지니고 있던 특징적인 사회적 면모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한다.147) 오성, 『한국 근대상업도시 연구』, 국학자료원, 199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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