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3장 개항기 상업 발달과 대외 무역
  • 2. 개항장의 발달과 도시의 거상들
  • 도시 거상의 활동
  • 인천항의 거상
오성

인천항의 대표적 상인은 1898년 당시 외동(外洞)에 살고 있던 서상집(徐相集, 1842∼1896)이었다. 그는 상인이면서도 정계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고, 관직에까지 올랐다. 대구 서씨인 그는 인천의 거상, 부상, 호상으로 불 릴 만큼 인천항의 상업계를 대표할 만한 상인이었다. 1898년 당시 45세였던 그는 세평에 걸맞은 가옥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호적 대장을 보면 그가 소유하고 있던 가옥은 와가 56간에 초가 6간으로 도합 62간인 가옥 한 채와 초가 12간의 공가(空家) 등 모두 74간이었는데, 외동에서 제일 큰 규모였다.

서상집은 1894년 7월 27일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발족할 당시 총재 김홍집(金弘集), 부총재 박정양(朴定陽) 등과 더불어 18인의 회의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물론 그가 군국기무처의 핵심 인물이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상인인 그가 부호군(副護軍)으로서 군기처 회의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상집이 어떻게 군기처 회의원이 될 수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는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유길준과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군기무처 발족 당시 유길준 역시 외무 참의(外務參議)로 회의원이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혹시 유길준의 천거 내지 추천이 작용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만약 추측대로라면 유길준이 서상집을 끌어들인 까닭은 상업계나 재계 인사의 포섭과 이를 통한 정치 자금 조달 등에 목적을 두었던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서상집이 특히 관심을 두어 벌였던 사업은 선박을 이용한 해운이나 무역이었다. 1896년 11월 월미도 남쪽의 장탄지(張灘地)에 선박 조선소(船舶造船所)와 창고, 그리고 선박의 수보소(修補所)의 개설을 추진하기도 하였고, 1899년 7월에는 미국 금광 회사 소유의 기선을 비롯한 세 척의 선박을 고용하여 해운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모은 자산을 토지의 매입에도 투입하였던 것 같다. 1896년 1월 각국의 조계(租界)에 편입된 토지를 보면 서상집 소유의 답(畓) 5두락(斗落)과 전 1경(頃)이 들어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뿐 아니라 1902년 3월 15일 인천항 외축현에 있던 전답 5,630평을 일본 거류지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적지 않은 토지를 무엇 때문에 일본에 기증하였 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해운이나 무역 활동을 통하여 축적한 자본 가운데 일부를 상당한 규모의 토지 매입에 투입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상업계와 정계를 넘나들던 그는 1902년 7월 5일 인천항의 감리(監理)가 된다. 그의 감리 임명은 당시 인천 사회에서 천만 뜻밖의 일로 받아들일 만큼 파격적인 인사였다. 서상집이 어떻게 해서 인천항의 감리가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짐작해 볼 수 있는 단초는 있다. 그와 가까웠던 유길준은 1902년 당시 일본에 망명 중이었다. 일본에서 유길준은 황제를 시해하고 의친왕을 옹립한 다음 망명자 중심의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려는 거사를 꾸미고 있었다. 여기에는 일본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청년 장교들도 관여되어 있었다. 유길준은 거사에 소요되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평소에 가까운 관계라고 여기고 있던 서상집에게 인편을 통하여 계획을 설명하고 공작금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서상집은 이 사실을 즉각 인천 감리 하상기(河相驥)에게 밀고하였고, 이어 하상기의 지시에 따라 서상규를 유길준에게 보내 거사 계획을 확인하게 하였다. 서상규는 인천으로 돌아와 서상집에게 모든 사실을 고하였고, 이로써 유길준의 거사 계획은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1902년 6월에는 유길준과 접선하였던 국내의 일당이 체포되기에 이르렀다.148) 유길준의 쿠데타 기도 사건에 대해서는 윤병희, 『유길준 연구』, 국학자료원, 1998, 보론(補論)이 참고된다.

서상집이 인천항 감리로 임명된 것은 이 일이 있은 직후인 7월 5일이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미루어 보면 서상집의 감리 임명은 유길준의 거사를 미리 막은 공로에 대한 포상일 가능성이 높다. 감리로 임명된 지 불과 40여 일 만인 8월 17일에 해임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 후 그의 활동이나 행적 가운데 뚜렷한 것은 별로 나타나지 않지만, 그의 부는 상당 기간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광복 전의 어느 시기엔가 그의 부력에도 일정한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149) 오성, 앞의 책, 국학자료원, 1998, pp.37∼42.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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