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3장 개항기 상업 발달과 대외 무역
  • 4. 대외 무역의 전개와 국내 산업의 변화
  • 외국과의 통상 조약 체결 및 관세
오성

조선이 일본과 체결한 통상 조약에는 관세가 규정되지 않았다. 조선이 관세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던 상황 속에서 일본은 무관세 협정을 체결한 것이었다. 조선은 일본과 통상 조약을 체결한 후에야 비로소 관세 제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이후 관세 주권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164) 김경태, 「불평등 조약 개정 교섭의 전개」, 『한국사연구』 11, 한국사연구회, 1975. 조선은 무관세 조약으로 인해 일본인에게 관세를 징수할 수 없게 되자, 조선인에게는 관세를 부과하기로 정하고 부산 두모진(豆毛鎭)에 세관을 설치하였다. 1878년 8월부터 부산을 거치는 화물에 통과세를 징수하는 동시에 조선인에게는 교역 물품에 대한 검열도 시행하였다. 그러나 곧 이은 일본의 거센 항의와 청나라의 동조로 조선의 관세 징수책은 일시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국제법적 국제 질서와 근대적 통상 관계의 지식을 알게 된 조선 정부는 일본과 통상 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교섭에 매진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1882년 5월에 체결된 조미 수호 통상 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에서 미국이 조선의 관세 주권을 인정함에 따라 일정한 결과를 얻게 되었다. 일본도 무관세 입장에서 물러나 1883년 7월 조일 통상 장정(朝日通商章程)을 체결 하고 관세에 관한 사항을 분명히 규정하였다. 새로운 조일 통상 장정은 조선의 관세 주권을 인정하면서 과세 표준을 명시하였다. 특히 해관장(海關長)이 수출입자가 신고한 가격을 합당하지 않다고 인정할 경우에는 해관 감정인의 감정 가격에 따라 납세토록 한다는 규정을 두었다. 이 조항은 관세권의 행사가 조선에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관세를 완납한 후 수입품을 조선 각처로 수송할 경우에는 운송세, 비개항지 통과세 등 일체의 세를 부과하지 않는다고 명시하여 사실상 조선의 세권을 제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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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 통상 장정 기념 연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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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곡물 수출 금지에 대한 규정을 명시하였다. 조선 정부가 잠정적으로 곡물 수출을 금지하고자 할 때는 1개월 전에 지방관이 일본 영사관에 통지해야 하며 금지하는 시기를 각 항구에 거주하는 일본인에게 알려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아울러 여타 국가들이 부여받는 권리 특혜에 일본도 이를 균점할 수 있다는 최혜국(最惠國) 조항을 삽입하였다. 1876년 국제 통상상 유례가 없는 무관세 조약을 맺은 일본은 1883년 통상 장정에서 비로소 한국의 관세 주권을 인정하였지만 조선 정부의 세권을 상당 부분 제한하였을 뿐만 아니라 최혜국 조항을 획득함으로써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였다.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은 최초로 관세에 대한 규정을 둔 조약이었다. 대체로 수입품에는 10%, 수출품에는 5%의 관세 부과가 제정되었다. 이는 일본이 1858년에 구미 열강과 체결한 통상 조약에서 정한 관세율보다 다소 높은 것이었다. 미국이 관세 규정 면에서 다소 양보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미국은 한일 간의 조약과 달리 최혜국 조관(條款)을 첨가하여 향후 타국이 통상상의 이권을 획득하였을 때 이를 균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미국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한 후 서구 열강은 조선과의 통교에 적극 관심을 기울였다.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영국이었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했던 영국은 조선과의 통상이 설사 자국에 큰 이익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 1876년부터 조선과의 통상 교섭에 나섰던 영국은 미국에 이어 1882년 조영 수호 통상 조약(朝英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고, 이듬해 이를 개정하여 새로운 조영 수호 통상 조약을 맺었다.

조영 조약의 체결로 영국은 많은 이권을 얻게 되었다. 조계 설정권뿐 아니라 조계 관리를 조선이 부담한다는 준칙까지 정하였다. 또한 영국은 조계 이외의 장소에서도 4km 이내에서는 외국인이 토지 및 가옥을 임차하거나 구매할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하였으며, 그 밖에 공장을 건설하고 제조업을 영위할 권리도 획득하였다. 또한 영국은 이미 개항된 부산, 인천, 원산, 그리고 개항이 예정되었던 양화진 이외에도 서울을 개시장으로 할 것에 동의를 얻었으며, 각종 수출입 화물을 조선 내지로 운송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그 밖에 치외법권(治外法權)은 물론 영국인 주택이나 영국 선박에 대한 조선 관리의 출입 제한, 영국 해군 필수품의 무세 통관 등 각종 특권을 규정하였다.165) 박말희, 「서양 제국과의 개국 조약」, 『한국외교사』 Ⅰ, 집문당, 1993.

한편 청나라도 임오군란을 계기로 합법적인 종속 관계를 공고히 하고자 1882년 9월 조선과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였다.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에 포함된 규정은 상대국 개항장에 각 기 상무관(商務館)을 주둔시킨다는 것, 조선에서 중국이 치외법권을 갖는다는 것, 중국 상선의 조선 개항장 출입이나 호혜적인 근해 어업을 허용한다는 것, 식량 및 용수 공급을 위한 어선의 해안 정박을 허용한다는 것 등 청나라의 일방적인 특권을 명문화한 것이다.166) 김종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 대하여」, 『역사학보』 32, 역사학회, 1966.

이 조약에서 청나라가 획득한 많은 특권 가운데 특히 중요한 내용은 청나라 상인이 서울에 거주하면서 무역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이 조약을 통해 개항장 이외에 서울 및 양화진을 개시하게 하였고, 내륙 통상 및 비개항지에 거주하면서 영업할 수 있는 권리를 명문화하였다. 또 육로를 통한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율을 종가(從價) 5%로 정하였다. 베이징(北京)에서 교역 허가를 받은 조선 상민과 조선의 양화진·서울에서 점포나 창고의 설치 허가를 받은 청나라 상인 이외에는 각종 화물을 비개항지에 운송하고 점포를 설치하여 판매할 수 없다는 규정을 두어 청나라 상인은 서울에 거주하며 무역할 수 있는 배타적 독점권을 부여받았다. 관세율은 홍삼의 수출에 한하여 15%의 종가세를 부과하고 그 밖의 수출입 상품에는 5%의 종가세를 부과하기로 명시하였다.

이상과 같은 외국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체계가 성립되자 조선은 국내 산업을 육성하기는커녕 국내 시장조차 보호하기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 제국주의적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되면서 기왕의 조선 국내 시장은 보호 장치를 갖추지 못한 채 열강에 개방되었고, 조선은 외국 자본주의의 거센 물결에 종속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167)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하원호, 『한국 근대경제사 연구』, 신서원, 199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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