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3장 개항기 상업 발달과 대외 무역
  • 4. 대외 무역의 전개와 국내 산업의 변화
  • 열강의 무역 경쟁
오성

1876년 강화도 조약부터 1883년까지 조선의 무역은 일본에 의한 ‘무역 독점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무역 규모가 급격하게 팽창하여 수출과 수입 모두 14배 가량 증가하였다. 1877년과 1880년을 제외하고 조선은 수출입 이 많이 증가한 가운데 모두 출초(出超) 현상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무역 규모의 증가는 주로 일본과의 무역이 증가함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었다.168) 최유길, 「韓國の貿易動向 1877∼1911」, 『アジア經濟』 15-1, 1974.

하지만 조선이 각국과 통상 장정을 체결하자 일본은 더 이상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하기 어려웠다. 특히 1882년 임오군란과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의 체결을 계기로 청나라는 조선에서의 정치적 영향력 확보와 함께 조선과의 무역도 비중을 높이려 하였다. 이후 청일 양국은 치열한 무역 경쟁을 벌였다. 이 시기에 무역 규모는 계속 팽창하여 수출은 약 6배, 수입은 약 4배 증가하였다. 수출 증가폭이 더 컸으나 조선은 출초 현상을 기록함으로써 무역 적자가 누적되었다.169) 최유길, 위의 글.

특히 수입 무역에서는 청나라가 조선에서의 정치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급격하게 성장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청나라는 조선의 주 수입품의 하나였던 옥양목(玉洋木)의 중계 무역을 장악하면서 일본을 압박하였다. 옥양목의 수입 물량 가운데 일본 상인이 중계한 것은 1886년에 10% 미만이었다가 1888년에 가서는 2% 이하로 떨어져 청일 전쟁 직전의 서양 물품 중계 무역권은 청나라 상인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청나라 상인이 중계 무역권을 장악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었다. 청나라 상인은 자본력과 상업 수완이 탁월하고 일본 상인에 비해 신용도가 높았다. 또 청나라 상인은 상하이라는 동아시아의 무역 중심항을 보유하고 있었다.170) 古田和子, 「日淸戰爭での日鮮貿易」, 『上海ネツトウ-クと近代東アジア』, 東京大學出版會, 2000. 또한 이 무렵 조선 내에서 우세하였던 청국의 정치적 위세가 자국 상인의 활동을 후원하였던 것도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덧붙여 말하면 청나라 상인은 조선 내에서의 통상 활동에 있어 저렴한 숙소를 이용하는 등 영업 활동에 최소의 비용을 투입하는 경향을 보였다. 반면에 일본 상인은 상대적으로 영업에 소요되는 비용이 많아 청나라 상인이 더욱 많은 영업 이익을 누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편 청나라 상인들의 중계 무역 독점에 따라 큰 타격을 입게 된 일본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하여 중계 무역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을 기 울였다. 1882년 이전까지 일본에서 수입된 물품 가운데 일본 제품은 겨우 10% 정도였다. 하지만 1883년 이후에는 50% 내외로 상승하였고 1890년부터는 80% 이상을 차지하였다. 청나라 상인에게 서양 물품의 중계 무역권을 빼앗긴 일본 상인들이 일본 제품의 수출 비중을 크게 늘려 중계 무역에서 생긴 열세를 만회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노력은 자국의 산업화로 이어졌고, 결국은 조선을 자국의 공산품 판매 시장으로 만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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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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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 이후 조선 무역의 추이를 보면 수출입 면에서 대략 3배가량 증가하였다. 이 시기에는 1903년까지 수출 증가폭이 더 컸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출초 현상을 계속 기록하였다.171) 최유길, 앞의 글.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무역 시장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청일 전쟁의 패배 이후 청나라 상인은 일시적으로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그 결과 1895년 조선의 수입 중에서 청나라가 차지하는 비율은 26.21%로 감소하였다가 1896년 이후 다시 높아져 1898년에는 전체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거의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일본과 대등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청나라 상인은 이 시기까지 여전히 옥양목의 중계 무역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옥양목은 안정적으로 수입되었다. 청나라 비단뿐만 아니라 청나라 마포의 수입도 꾸준히 증가하였다. 이러한 청나라 상인의 영향력은 러일 전쟁이 발발한 1904년 이후에 급격히 약화되었다.

한편 개항장을 통한 수출이 금지되었던 홍삼은 청일 전쟁 직후인 1895년부터 개항장을 통한 수출이 가능해졌으며, 청나라 상인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육로를 통한 홍삼 수출도 계속되었다. 그 결과 조선의 수출 무역 시장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율이 떨어진 반면 청나라가 차지하는 비율은 크게 증가하였다.

조선과의 무역에서 청나라가 차지하던 비중은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계기로 크게 바뀌었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확보한 일본은 이를 바탕으로 산업화·공업화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나가면서 제국주의 국가로 전화되어 갔다. 청일 전쟁 이후 조선 시장에서 차지하는 일본제 면제품의 비중도 현격히 증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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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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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을 보호국화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였고 경제적으로도 조선 경제를 지배해 나갔다. 그러나 조선은 대외 무역 면에서 보면 일본 이외 여러 나라와의 무역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었다.

수출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율은 변하지 않았으나 수입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율은 크게 떨어졌다. 중국도 수출입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모두 떨어졌다. 이와 같은 원인은 서양을 비롯한 기타 국가의 비율이 증대한 데에 있었다.

러일 전쟁 이후에도 고급 면제품 시장은 영국이 일본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172) 송규진, 『일제하의 조선무역 연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01. 미국도 수입에서 6∼10%를 점하고 있었다. 또한 러시아를 비롯한 기타 국가가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이는 초기 일부 국가에 편중되었던 시장 구조와는 달리 조선의 무역 시장이 다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비록 일시적인 현상이라 하더라도 조선 무역계의 구도가 일단 재편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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