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3장 개항기 상업 발달과 대외 무역
  • 4. 대외 무역의 전개와 국내 산업의 변화
  • 국내 산업 구조의 변화
오성

국제 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국내 산업에도 많은 구조적 변화가 일어났다. 미곡, 콩 같은 수출 농산물은 해외, 특히 일본의 수요가 계속 증가하면서 상품 생산이 확대되어 갔다. 미곡 생산을 위한 노동력을 좀 더 집약적으로 투입하는가 하면, 버려두었던 토지의 개간이 촉진되기도 하였다. 반면 에 면제품을 비롯한 각종 공산품이 대량 수입되자 국내 수공업계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개항 이래 농산물의 수출이 신장되어 1900년에 미곡은 총생산량의 4%에 가까운 46만 석이, 콩은 총생산량의 20%에 가까운 39만 석이 수출되었다. 해외의 미곡과 콩의 수요 확대는 정부의 화폐 남발과 결부되어 곡물 가격의 폭등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면 강화 지방에서는 벼 한 석의 시세가 1883년에는 10냥이었으나 1894년에 57냥, 1904년에는 295냥으로 폭등하였다. 반면에 수입 관련 품목의 가격은 정체 현상을 보여 미곡·콩·면제품에 대한 교역 조건은 1890년경 이래 개선되는 추세였다.182) 이헌창, 앞의 책, 1999, pp.250∼251 ; 오두환, 『한국 근대화폐사 연구』, 한국연구원, 1991, pp.18∼26.

외국의 면제품과 담배 등이 수입되면서 면화와 담배 등의 생산도 감소하였다. 그리하여 면화 재배와 직물 제조에 투입되던 노동력을 이제 다른 부문으로 옮기는 현상이 일어났다.183) “Korean Domestic Trade", The Korea Review 5, 1905. 11. 종래에는 면작하던 곳이 대거 콩을 경작하는 토지로 전환되기도 하였다. 1877년 14만여 정보에 달하였던 면화 재배 면적이 1897년에는 8만 정보로, 1906년에는 3만 정보로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184) 이헌창, 앞의 책, 1999, p.252. 미곡, 콩 등 농산물의 해외 수요 증가와 가격 등귀는 그 상품 생산을 발전시키기는 하였지만 곡물을 중심으로 한 농업 생산의 단순화를 낳기도 하였다.

한편 수출 수요가 곡물 시장의 확대를 주도하였지만 식민지화 전에는 곡물 무역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았다. 1910년대 초 농작물의 연평균 수출액은 1,115만 원으로 총생산액의 4%에 약간 못 미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미곡은 생산액의 4할 정도가 상품화되고 농작물의 상품화 가능 잉여 중 절반을 차지하였는데, 그 가운데 10% 정도가 수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콩은 생산액의 30∼40% 정도가 상품화되고,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이 수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85) 이헌창, 앞의 책, p.253.

면제품의 대량 수입으로 국내 면업은 상당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면제품은 청일 전쟁 직전에는 총소비량의 20% 정도가 수입되었으나, 가내 수공 업 형태의 토착 면토인 토포 산업은 아직 심대한 타격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청일 전쟁 이후 토포처럼 질기면서도 가격이 저렴한 일본제 백목면(白木棉)과 시팅(sheeting)이 수입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방적 공정에서 기계제 제품에 비하여 생산성이 크게 뒤떨어졌기 때문에 면작 농민의 대응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고, 전통적인 가내 수공업적 면제품 생산은 점차 위축되어 갔다. 이 밖에 양조업, 야철 수공업, 제지업, 유기 수공업 등의 분야도 수입품의 증가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결국 농업 생산물은 증가하였지만 생산 구조면에서는 곡물을 중심으로 한 단순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외국 공산품의 대량 수입에 따라 전통적인 가내 수공업이 급격하게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이러한 현상은 국내 경제를 확충하는 방향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세계 시장이 요구한 국제 분업 구조에 피동적으로 종속되면서 이루어졌던 까닭에 산업 구조의 왜곡을 낳게 되었다.186) 이헌창, 앞의 책,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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