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4장 근현대 서울의 상권과 상품 유통
  • 3. 전통 시장의 변화와 백화점의 등장
  • 남문 안장에서 남대문 시장으로
김세민

남대문 시장은 조선 말까지 ‘남문(南門) 안장’, ‘신창(新倉) 안장’으로 불렸는데, 이는 선혜청(宣惠廳) 창고가 있던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 남대문 안 시전 주변에는 가가(假家)와 상점들이 어지럽게 자리하고 있어 교통 문제가 유발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1896년(고종 22) 박정양(朴定陽) 내각은 교통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성 내 도로의 폭을 규정하는 건’을 공포하고 남대문로를 정비하였다. 이때 시전은 물론 남대문 밖에 있던 칠패까지 선혜청 안으로 옮긴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911년 12월에는 남대문 시장에 큰 화재가 일어나 시장의 상당 부분이 불타버렸다. 당시 상인들이 스스로 건물을 복구할 형편이 못되자, 1912년 조선 농업 주식회사(朝鮮農業株式會社)에서 남대문 시장의 경영 허가를 받아 근대적 모습의 시장을 형성하였다. 조선 농업 주식회사는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내부대신이었던 송병준(宋秉畯)이 1905년 9월에 설립한 농업, 부동산 회사였다. 주식회사란 명칭뿐이고 장남인 송종(宋種)을 사장으로, 차남을 전무로 앉힌 일종의 가족 회사였다.

남대문 시장은 1921년 10월 12일과 12월 14일 다시 두 차례의 대화재가 발생하여 시장이 전소되었다. 조선 농업 주식회사는 화재가 난 이듬해인 1922년 남대문 시장 1,070평에 연와조(煉瓦造)의 점포 139호, 170평의 야채 시장을 건축하겠다고 경기도 지사에게 신청하여 허가를 받았으나,231) 『동아일보』 1922년 9월 15일자. 재건축 비용 조달이 여의치 않아 남대문 시장의 경영권은 중앙 물산 주식회사(中央物産株式會社)로 넘어갔다.

중앙 물산 주식회사는 남대문 시장을 경영하려고 설립된 일본인 회사였다. 남대문 시장의 경영권을 넘겨받은 중앙 물산 주식회사는 1922년 7월에 공사를 시작해서 12월까지 140여 개의 점포를 벽돌 건물로 완공하였다. 원래 중앙 물산 주식회사는 시장 조합원들에게 점포세를 올리겠다는 조건으로 건축을 시작하였지만, 기존에 6원 30전씩이던 월세를 33원 50전으로 대폭 올려 받으려 하였기 때문에 상인들은 분개하여 월세를 내려 달라는 진정서를 경기도와 경성부에 제출하는 등 강하게 반발하였다.232) 『동아일보』 1922년 12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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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곡물 시장
남대문 곡물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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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929년에 이르러 중앙 물산 주식회사는 남대문 시장 일대의 토지를 불하받기 위해 토지 불하 운동을 결정하였다.233) 『동아일보』 1929년 12월 1일자. 이에 따라 1931년 조선 총독부는 국유지였던 남대문 시장 2,600여 평을 시가보다 10% 정도 싸게 중 앙 물산 주식회사에 불하하였다. 이로써 남대문 시장이 국유지에서 민유지로 변경되자 중앙 물산 주식회사는 곧바로 세금을 인상하였다. 이에 상인들이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중앙 물산 주식회사의 일방적 시장 운영에 불만을 품은 남대문 시장 상인들은 시장 연합회를 조직하여 집단적으로 대응하고자 하였다. 1933년 12월 26일 남대문 시장의 조선인 상인 24명이 발기하고 115명의 상인이 참석한 가운데 시내 식도원(食道園)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남대문 시장 상인 연합회를 창립하였다.234) 『동아일보』 1933년 12월 28일자.

1936년 3월에 이르러 일본인들은 남대문 시장의 명칭을 중앙 물산 시장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나 이 시장에서 장사하는 조선 상인이나 소비자들은 여전히 남대문 시장이라 불렀다. 또한 남대문 시장은 1937년 3월 24일자로 허가 기간이 만료되었다. 일제는 남대문 시장의 시장 허가 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대신 새로운 중앙 도매 시장 건설 계획을 구상하였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한 남대문 시장 상인들은 대책을 수립하는 동시에 중앙 도매 시장이 들어설 염천교 부근에 적당한 후보지를 잡아 달라고 진정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235) 『동아일보』 1938년 1월 30일자. 그러나 남대문 시장은 시장 허가 기한이 만료된 1937년 3월 24일 이후에도 계속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남대문 시장을 대신하는 중앙 도매 시장이 아직 건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일제는 중앙 도매 시장 건설을 계속 연기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만주 사변, 중일 전쟁으로 자금과 물자가 부족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앙 도매 시장은 1939년 4월 1일 문을 열었으나, 남대문 시장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소매 시장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236)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007, pp.18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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