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6권 장시에서 마트까지 근현대 시장 경제의 변천
  • 제4장 근현대 서울의 상권과 상품 유통
  • 3. 전통 시장의 변화와 백화점의 등장
  • 조선인 상인들이 경영한 동대문 시장
김세민

일제 강점기 동대문 시장은 남대문 시장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동대문 시장도 남대문 시장과 마찬가지로 황 토현(黃土峴)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도로 개수 사업이 이루어지면서 기존의 이현 시장을 정비한 것으로 보인다.

동대문 시장은 1905년 7월 동대문 시장 관리를 위한 광장 주식회사(廣壯株式會社)가 예지동(禮智洞) 4번지에 설립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명칭도 처음에는 동부 이현의 예지동에 세워졌다 하여 ‘배우개장’이라고 부르다가 광장 주식회사가 설립된 1905년경에는 동대문 시장, 또는 ‘광장 시장’으로도 불렸다. 광장 주식회사는 고종의 측근이었던 김종한(金宗漢), 종로 상인 박승직(朴承稷), 거상 홍충현(洪忠鉉) 등이 설립하였으며, 설립 목적은 동대문 시장의 경영뿐만 아니라 토지 가옥의 매매와 금전 대부업이었다.

김종한은 1894년 갑오개혁 당시 도승지로 발탁된 개화파 인물로 내부 협판, 궁내부 협판, 군국기무처 개혁 위원 등을 지낸 고관이면서도 이재(理財)에 밝아 각종의 기업을 경영하는 등 부를 축적하였다. 한성은행을 비롯하여 여러 은행의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10년 이후에는 조선 권업 주식회사(朝鮮勸業株式會社), 조선 무역 주식회사(朝鮮貿易株式會社) 등 여러 기업체에 이사로도 참여하였다. 국권 상실 이후 일제에게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237)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003, pp.532∼533.

광장 주식회사 설립 당시 사장은 김종한이 맡고 있었지만, 실제 운영은 상인 출신인 홍충현 등이 담당하고 있었다. 1912년에 시장의 운영과 이익 배분을 둘러싸고 사장단과 실제 운영자들 두 세력 사이의 알력이 표면화되었으며, 결국 광장 주식회사의 운영권은 상인 출신 자본주였던 박승직, 김한규(金漢奎) 등이 장악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1931년 4월에는 동대문 시장의 상인 100여 명이 광장 주식회사를 상대로 점포 임대료 인하를 요구하였으며, 광장 주식회사는 중역 회의를 거쳐 임대료를 인하해 주었다. 그러나 광장 주식회사가 처음부터 순순히 임대료 인하에 응하였던 것은 아닌 듯하다. 당시 상인 대표인 함태영(咸太永)이 임 대료를 인하하지 않으면 임대료 불납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주장한 데 대해, 광장 주식회사 사장 김한규는 “지금의 임대료는 16년 전에 정한 것으로 호경기 때에도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결코 비싼 것은 아니며, 또 상인들이 타협적으로 나와도 생각해 볼 일인데 명령적으로 요구하는 데에 분개한다고 하여 상인들의 요구를 듣지 않기로 하였다.”는238) 『동아일보』 1931년 4월 3일자. 내용의 신문 기사가 저간의 사정을 말해 준다. 1936년 2월 당시 동대문 시장의 점포 임대료는 점포 1칸에 매월 2원에서 4원 50전이었다.

확대보기
동대문 상설 시장
동대문 상설 시장
팝업창 닫기

그래도 조선인 회사인 광장 주식회사가 부지와 점포를 소유하고 있던 동대문 시장은 일본인 경영자와 상인들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많았던 남대문 시장보다 비교적 순조롭게 운영되었다. 광장 주식회사는 주주들이 운영, 관리하였고, 거래 품목별로 상인 조합을 결성하도록 하였으며, 조합원의 자격만 갖추면 누구나 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었다. 따라서 끝까지 광장 주식회사가 경영권을 갖고 있었으므로 민족 시장으로서의 명목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37년에 이르자 동대문 시장도 남대문 시장과 마찬가지로 허가 기간 만료와 이를 대신할 중앙 도매 시장의 출현에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중앙 도매 시장의 설치 계획이 구체화되면서 동대문 시장을 경영하는 광장 주식회사에서는 그에 대한 대비로 인접한 금촌 양행(今村洋行)의 부지와 건축물을 매수하고, 시장 내 시설의 확충과 건물의 개축에 착수하였다. 더불어 동대문 시장도 다른 시장과 같은 자격과 권리를 가지고 중앙 도매 시장에 참여할 계획을 세웠다.

동대문 시장은 1939년 4월 1일 중앙 도매 시장이 개점한 이후에도 소매 시장으로 계속 존속하였다. 원래 소매 시장의 기능이 강하였던 동대문 시장은 도매 시장 기능이 강하였던 남대문 시장보다 충격을 그리 크게 받지는 않았지만 상권의 축소는 불가피하였다.239)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007, pp.183∼184.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