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1장 기생의 삶과 생활
  • 5. 처지와 생활상
  • 기생의 옷차림 사치
우인수

기생 옷차림의 기본 구조는 일반 부녀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다만, 옷감의 질, 화려한 색상, 호화로운 장신구, 남성의 눈길을 끌 수 있는 옷 입는 방법 등에서 차이가 있었다.94)기생의 옷차림에 대한 내용은 조효순, 『한국 복식 풍속사 연구』, 일지사, 1988, 240∼264쪽을 참고하였다.

기생의 옷차림은 천민으로서는 누릴 수 없는 사치스러움이 어느 정도 허용된 특수한 경우였다. 세종대에 기생의 머리 장신구에 금은의 사용을 금지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95)『세종실록』 권3, 세종 1년 1월 계축. 기생의 옷감으로 사라능단(紗羅綾緞)의 사용을 금지하자는 주장도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96)『세종실록』 권94, 세종 23년 11월 신해. 여러 가지 복식 금제(禁制)에서 기생들은 예외적인 존재에 속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놓은 비단옷에 가죽신, 금은으로 만든 장신구와 노리개의 착용까지 가능하게 됨으로써 전체적으로 볼 때 양반 부녀와 같은 옷차림이 허용되었다. 기생의 호사스런 옷차림에 대해서 조선 사회는 매우 관대하였던 셈이다. 다만, 양반 부녀와의 구별을 위해 겹치마의 사용은 금지되어 있 었고, 입는 방법도 양반 부녀가 치마를 왼쪽으로 여미었던 데 비해 기생은 오른쪽으로 여미었으며, 말을 탈 때에 말군(襪裙)을 입지 않는 것이 달랐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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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생들은 치마 속에 속옷을 여러 겹 끼워 입어 겉으로 드러나는 치마선을 풍성하게 보이도록 함으로써 둔부를 크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땅에 끌릴 정도로 길고 폭이 넓은 치마폭을 뒤에서 앞으로 가슴까지 치켜 올린 후 허리띠를 매어 의도적으로 속바지가 보이게끔 입었다. 반면에 저고리 길이가 매우 짧고 소매 길이가 좁아 흰 치마허리가 드러날 뿐만 아니라 겨드랑이의 살까지도 보일 정도로 입어 성적 매력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외출할 때에도 쓰개치마 대신에 짧은 천의를 착용하여 얼굴을 드러내었다.

기생들의 사치스러운 복식과 옷 입는 방식은 차츰 일반 부녀자에게까지 퍼져 나갔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점잖은 이들의 걱정을 샀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다음과 같이 일반 부녀자들의 기생 복식 모방을 개탄하였다.

지금 세상의 부녀자들의 옷은 저고리는 너무 짧고 좁으며, 치마는 너무 길고 넓으니 의복이 요사스럽다. …… 새로 생긴 옷을 시험 삼아 입어 보았더니 소매에 팔을 꿰기가 어려웠고, 한번 팔을 구부리면 솔기가 터졌으며 심한 경우에는 간신히 입고 나서 조금 있으면 팔에 혈기가 통하지 않아 살이 부풀어 벗기가 어려웠다. …… 복장에서 유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창기들의 아양 떠는 자태에서 생긴 것인데, 세속 남자들은 자태에 매혹되어 요사스러움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처첩에게 권하여 그것을 본받게 함으로써 서로 전하여 익히게 한다. 아! 오늘날의 예법이 닦이지 않아 규중(閨中) 부인이 기생의 복장을 하도다.97)이덕무(李德懋),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30, 사소절(士小節) 6, 부의(婦儀).

남성을 의식한 기생들의 복식 사치는 당시 민간의 옷차림 유행을 선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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