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3장 광대, 자유로운 예술을 위한 길에 서서
  • 1. 광대 집단을 향해 가며
손태도

조선시대 말까지도 우리나라는 신분 사회였기에, 사회의 여러 생활양식은 대체로 그 담당 신분 집단들에 의해 유지·확보되었다. 민속 연희를 하는 광대도 마찬가지이다. ‘광대’라는 하나의 신분 집단이 있었다. 이러한 광대 집단이야말로 공식적 민속 예능 집단으로 우리나라 민속 예능사의 중심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통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서의 이른바 ‘광대 집단’의 존재와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근래에 와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종래 알려진 광대 집단으로는 경기 이남의 화랑이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경기 이남 세습무(世襲巫) 집안의 남자들로, 평소에는 무업(巫業)에 종사하다 관청의 행사에 악공(樂工)과 광대로 동원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1930년대 조사에서 이들이 관청에 악공과 광대의 역을 담당하는 문서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아울러 그들이 한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들 집단 후손 중의 상당수가 여전히 악기 연주, 판소리, 줄타기 등 이른바 전통 사회 광대 집단의 예능을 전승하고 있다. 이들이 바로 경기 이남의 광대 집단이었던 것이다.

한편, 근래에는 이에 더 나아가 경기 이북의 광대 집단인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이 알려져 전통 사회의 광대 집단에 대한 연구가 더욱 본격화되었다. 오늘날 무속은 대체로 한강을 경계로 경기 이북의 강신무권(降神巫圈)과 경기 이남의 세습무권(世襲巫圈)으로 구분되는데, 경기 이북은 무속 면에서 강신무권이어서 기본적으로 경기 이남의 세습무 집안의 남자들인 화랑이 집단이 없다. 그러므로 경기 이북에도 광대 집단이 있었다면, 이들은 경기 이남의 화랑이 집단과는 다른 계통이다.

그러나 경기 이남의 광대 집단인 화랑이 집단은 근대 무렵에도 일정한 흥행력을 지녔던 판소리에까지 나아갔다. 악기 연주에서도 전래의 기능 음악인 삼현육각(三絃六角)을 넘어 예술 음악인 산조(散調)를 만들어 내면서 근대 이후에도 판소리나 판소리 계통의 공연물인 창극(唱劇)을 중심으로 독립된 공연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이에 반해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은 근대 이후에는 흥행 면에서 일정한 한계가 있었던 배뱅이굿, 병신타령 등 재담소리 수준에 머물렀다. 악기 연주에서도 삼현육각 정도에 머물러 근대 이후에는 그들만의 공연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근대에 들어 급속히 사라진 것이다.

근래에 들어 경기 이북의 재인촌에 살았던 한 사람을 조사할 수 있어서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와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경기 이남의 화랑이 집단은 기본적으로 무부(巫夫)인데 비해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은 무속과는 기본적으로 관계가 없다. 종래 경기 이남의 화랑이 집단이 무부·악공·광대였기에 악공·광대 집단은 기본적으로 무속과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무속과 관계없는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이 알려졌으므로, 무부·악공·광대라는 종래의 시각은 경기 이남의 화랑이 집단과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의 공통점인 악공·광대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경우 악공에 더욱더 주목하여야 한다. 이들 경기 이남의 화랑이 집단과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이 광대이기 이전에 기본적으로 악기 연주를 익히는 악공이란 것을 통해서 도 알 수 있듯 악공이 광대의 역을 겸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악공이 광대의 역도 겸하는 『대명률(大明律)』(1374, 1389)에도 있는 중국의 제도를 우리나라에서 따른 것이다. 사실상 관에서 악공은 항상 필요하지만 광대는 일이 있을 때에만 필요하기에, 중국에서 악공 집단이 광대 집단의 역할도 겸하게 하였듯, 우리나라에서도 이 제도를 받아들여 광대 집단을 따로 두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악공에 초점을 맞출 때, 광대 집단에 대한 좀 더 제도적인 접근이 가능해진다. 악공은 관청에서 항상 필요한 집단이었기에, 이미 고려 중기에 악공의 아들은 악공이 되는 악공 집단의 세습 제도를 마련하였다. 악공을 하나의 특수 신분 집단으로 삼아 기능을 전승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악공이 광대의 역을 겸하게 하였다면, 사실상 집단 면에서는 악공 집단이 광대 집단이기도 하기에, 고려 중기에 마련된 악공 집단의 세습 제도를 광대 집단에도 적용하여, 적어도 광대 집단도 고려 중기에 이미 하나의 특수 신분 집단이 되어 내려오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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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게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서의 광대 집단이 우리나라에서 성립된 것은 신라 진흥왕 이래의 팔관회, 고려의 팔관회, 연등회 같은 이른바 수백 명 이상의 광대가 동원되는 산대희(山臺戲) 같은 대규모 행사가 정기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이다. 관에서는 이러한 행사들을 문제 없이 원만하게 치르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동원되는 광대들보다 이러한 행사를 공식적으로 담당하는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서의 광대 집단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서의 광대 집단인 경기 이남의 화랑이 집단과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이 성립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조사와 연구로 볼 때, 경기 이남의 화랑이 집단은 신라 화랑 계통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우리 민족 고유의 신들을 섬겨 왔던 신라와 고려의 팔관회의 가무백희(歌舞百戲)를 담당하고 민간에서는 우리 민족의 고유 신앙인 무속 영역에서도 활동하다가, 고려 말 무당 집안의 남자들이 모두 악공으로 호적에 올라가는 과정을 통해 경기 이남의 악공 집단, 곧 광대 집단이 되었다.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은 고려 중기 기생의 아들들이 악공이 되고 이 악공이 광대의 역도 겸하는 과정에서 경기 이북의 광대 집단이 되었다.

이렇게 전통 사회에서 관의 행사에 공식적으로 동원되는, 하나의 공식적인 예능 집단으로서의 광대 집단 사람들은, 국가적 행사로서의 중앙의 산대희를 비롯한 궁궐의 나례희(儺禮戲), 지방의 산대희, 지방 관아의 나례희, 과거 급제자의 행사 같은 관청의 행사들에 공식적으로 동원되었고, 민간에서도 이들은 여전히 공식적 연예 집단으로 활동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전기 불교의 탄압으로 사찰 계통에서 나온 떠돌이 집단인 사당패 외에는 민간에 뚜렷한 연예 집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광대 집단을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 유지시킨 가장 중요한 문화적 기반이었던 국가적 행사로서의 중앙의 산대희가 조선시대 말까지도 공식적으로 유지됨으로써, 광대 집단도 하나의 신분으로 그때까지 유지 되었다. 근대 무렵까지도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서의 광대 집단이 공식적으로 유지된 것이다. 그러다 신분 제도가 철폐된 1894년 갑오개혁 때에 와서야 비로소 이들 광대 집단은 ‘창우(倡優)’, 곧 ‘광대’ 신분에서 공식적으로 해방되었다. 그러나 전통 사회 대부분의 천민이 그랬듯이 광대 집단 사람들도 기본적으로 토지를 가질 수 없어서 오직 민속 예능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갑오개혁 후 광대 신분에서 해방되었지만 그들은 대부분 여전히 전래의 민속 예능 계통의 일에 종사하였다. 그들 후손의 상당수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통 사회 광대 집단의 예능이었던 각종 기악(器樂) 연주, 고사 소리·통속 민요·판소리 등의 소리, 줄타기·땅재주 등의 기예, 전문적 농악 등을 이어 나가고 있다. 전통 사회 광대 집단의 문화사적 의의는 현재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 전통 사회의 민속 예능을 공식적으로 담당해 온 이들 광대 집단이야말로, 우리나라의 공식적 민속 예능 집단이고, 우리나라 민속 예능사의 중심 집단이었다. 또한, 오늘날 전승되는 각종 기악 연주, 판소리, 가면극, 인형극, 줄타기, 전문적 농악 등 우리나라의 주요한 민속 예능은 대부분 이들 광대 집단에 의해 성립·유지·발전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글에서는 먼저 우리나라 광대 집단의 존재와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고, 이어 현재 광대 집단으로 알려진 경기 이남의 화랑이 집단과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을 소개함으로써 광대 집단의 존재를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중앙의 산대희와 나례희, 지방의 산대희와 나례희, 과거 급제자의 행사, 민간의 축제, 일반 연회 등 주요한 활동 공간에서 광대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다룸으로써 광대들의 전반적인 활동상들을 제시하도록 한다. 이러한 공간들은 광대들이 지속적으로 활동한 곳이기에 광대들의 여러 활동상을 제시하기에 적절한 공간들이 되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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