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3장 광대, 자유로운 예술을 위한 길에 서서
  • 2. 광대 집단의 존재와 역사를 알아보며
  • 광대 집단들을 소개하며
  • 경기 이남의 화랑이 집단
손태도

경기 이남의 화랑이 집단은 실제로 오늘날까지도 ‘화랭이’로 불려지듯 기원은 멀리 신라 화랑에까지 올라갈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경기 이남의 세습 무당 집안의 남자들로 관과 민간에서 연희를 할 때는 재인 혹은 광대, 악기 연주를 할 때는 잽이 혹은 고인, 굿판에서 굿을 주도할 때는 화랑 혹은 양중이라 불리는데, 이들의 대표 명칭은 ‘광대’ 혹은 ‘화랑이’라 할 만하다.

이렇게 광대 역할을 하고 악기 연주도 할 수 있으며 무속과 같은 우리나라 고유 신앙을 담당하는 화랑이 집단이 신라 화랑에까지 올라갈 수 있는 여지는, 신라의 팔관회를 고려가 계승하였다고 말한 기록에서 먼저 파악할 수 있다.

태조 원년(918) 11월에 유사가 말하기를, “전주(前主)는 매해 중동(仲冬)에 크게 팔관회를 설하여 복을 빌었사오니 그 제도를 따르소서.” 하니 …… 또 채붕 둘을 맺었는데 각각 높이가 다섯 길이 넘고, 백희가무를 앞 에서 보였는데 그 사선악부(四仙樂府)와 용(龍), 봉(鳳), 상(象), 마(馬), 거(車), 선(船)은 모두 신라의 고사(故事)였다.190)『고려사』 권69, 지23, 예11.

신라의 팔관회는 고려로 이어졌으며, 팔관회 때에 이루어진 산대희의 가무백희를 담당한 집단은 ‘사선악부’, 곧 신라 화랑 계통의 사람들이었다. 사선은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祥) 등 신라시대에 산수 간(山水間)을 노닐며 풍류를 즐긴 대표적인 화랑들로서,191)강원도에는 오늘날에도 ‘영랑호(永郞湖)’, ‘사선대(四仙臺)’ 등 이들 네 명의 화랑들과 관계되는 유적들이 남아 있다. 사선악부는 이들 사선 계통에서 나온 가무백희를 담당하고 있던 부서였다.

팔관회는 고려 태조가 훈요 10조에서,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까닭이요, 팔관은 천령(天靈), 오악(五嶽), 명산대천(名山大川), 용신(龍神)을 섬기는 까닭이다.”192)『고려사』 권2, 세가2, 태조 26년. 라고 하였듯, 고대의 우리 민족 고유 신앙에 근거한 우리 고유의 신들을 섬기는 행사인 면이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팔관회와 사선 계통, 곧 선랑의 전통은 고려시대 동안 중국 쪽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화풍(華風)의 경향에 맞서는 국풍(國風) 쪽 요소로 거듭 확인되었다.

전 민관어사 이지백(李知白)이 다른 나라의 이상한 법을 따르지 말고 앞의 임금들이 실시하였던 연등·팔관·선랑 등의 일을 행하여 국가를 보존하자고 주장하자, 성종이 그의 의견을 존중하였다. 이와 같은 이지백의 주장은 성종이 화풍을 즐겨 따르는 것을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193)『고려사』 권94, 열전7, 서희(徐熙). 1168년(의종 22) 3월에는 신령(新令)을 반포하여 선풍(仙風)을 좇아 높이도록 하였다. “옛날 신라에는 선풍이 크게 행해져서 하늘이 기뻐하고 백성이 모두 편안하였다.”194)『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 22년 3월 무자. 라고 하며, 옛날 풍속 그대로 집행하여 사람과 하늘이 모두 기뻐하게 할 것을 내세운 것이다.

팔관회에서 선랑의 가무백희는 원래 우리 민족 고유의 신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종교적 행위였다. 그러나 고려시대로 접어들어 불교와 유교를 중시하는 중세 사회 문화가 좀 더 광범위하게 자리 잡아 나가자, 고대 신앙적 요소는 약화되어 종교적 행위로서의 가무백희도 원래의 성격을 잃어버 리게 되었다. 마침내 화풍을 즐겨하던 성종 때에는 이를 ‘잡기(雜技)’라고 여길 정도에 이르렀다. 곧 “팔관회의 잡기를 상도(常道)에 벗어나며 번거롭고 요란한 것으로 여겨 모두 그만두게 하였다.”195)『고려사』 권3, 세가3, 성종 원년 11월. 라고 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팔관회의 가무백희는 점차 광대 놀이화되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불교와 유교가 점차 통치자의 신앙이나 이념으로 자리 잡아 가면서 팔관회 등으로 표현된 우리 민족의 고유 신앙은 무속이란 이름으로 오히려 민간의 서민들을 중심으로 한 신앙 행위로 변모하게 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 팔관회의 가무백희에 동원되기도 하고 민간에서는 무속 영역에도 남아 있던 신라 화랑 계통의 사람들은, 신라 이래 가무백희와 이와 관련된 악기 연주의 소양이 있었기에 고려 말 호적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모두 악공으로 호적에 올려지게 된다.

호구(戶口)를 조사하여 호적을 작성하는 것은 재상들이 건의하고 전하가 비준한 것이며 이 일은 제가 중국에 가 있었을 때에 제기되었습니다. 그리고 맹인과 무당의 자식을 전부 모아서 악공을 시키는 것은 전의시(典儀寺)에서 전하의 명령을 받들고 실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호적이 없고 남의 이름을 쓰는 자들은 호적이 자기에게 불편하다고 원망하면서 이것이 제가 한 짓이라고 합니다. 맹인과 무당들은 그 제의가 저에게서 나온 것으로 간주하고 저를 저주하고 있습니다.196)『고려사』 권119, 열전32, 정도전(鄭道傳).

그리고 이것은 1429년(세종 11) “봉상시와 아악서의 악공은 제사 하나에 쓰이는 인원이 모두 149명이요, 함께 합하여 제사하면 298명이 소용된다. 이 앞서 무녀의 자질(子姪)과 양인(良人)의 정리(丁吏) 등으로 이에 속하게 하였으나, 원래 정원이 겨우 200명으로 오히려 98명이 부족하니 …… 구례(舊禮)에 의하여 무녀의 자질과 놀고 지내는 양민들로 나이 13세 이상 20세 이하 되는 자를 선택하되, 서울 30명, 충청도 30명, 전라도 35명, 경상도 40명, 강원도 15명으로 하자.”197)『세종실록』 권43, 세종 11년 3월 무진. 는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

이미 고려 중기에 악공의 세습 제도가 마련되었고, 악공이 광대의 역할도 겸하였기 때문에 악공 집단을 사실상 광대 집단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고려 말에 무당 집안의 남자들이 악공으로 호적에 올라가게 됨으로써 이들 무부(巫夫)이면서 악공·광대가 되는 경기 이남의 화랑이 집단은 이후 더욱 분명한 광대 집단이 된 것이다.

1930년대에 경기도 창재 도청안(京畿道唱才都廳案, 1836), 도내 고금 나례산주 선생안(道內古今儺禮山主先生案, 나주 신청(神廳), 1865) 등 국가의 산대희와 관련 있는 문서들을 무부 집단에서 가지고 있었다.198)赤松智城·秋葉隆, 심우성 옮김, 앞의 책, 281쪽, 279쪽. 무부와 광대의 관계에 대해 그들 스스로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기고 있다.

이종만의 말에 의하면, 재인청은 광대청·화랑청으로도 칭하며, 경기·충청·전라 세 도의 각 군에 존재하는데, 각 도에 도청(都廳)이 있고, 그 장을 대방(大房)이라 칭한다. 대방 아래 도산주(都山主) 두 명이 있고, 좌도 도산주·우도 도산주로 칭하며, 한 도를 좌우로 나눈 곳을 관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 계원은 단골집, 즉 세습 무가만으로 한정되어 있고, 오로지 무악(巫樂)을 반주하는 화랑, 거꾸로 서서 줄넘기 등의 곡예를 연기하며 동시에 무악 연주자이기도 한 재인, 가무를 하는 예인도 있고, 무악(巫樂)을 하는 광대가 포함된다.199)赤松智城·秋葉隆, 심우성 옮김, 앞의 책, 283∼284쪽.

그래서 1950년대 연구자들은 “이 무부가 창부(倡夫)로서 화랑·재인·공인(工人)·광대 등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각기 능한 바에 따라 민속 예술에 참가함으로써 받은 칭호이니, …… 이네들이 근본에 있어 무부이며 또 우인(優人)인 까닭이다.”200)김동욱, 『한국 가요의 연구』, 을유 문화사, 1961, 294쪽. 라는 말들을 하게 되었다.

이렇듯 경기 이남에서는 무부가 악공과 광대의 역을 하게 되었다. 그리 고 이들 경기 이남의 광대 집단인 세습무 집안의 남자들인 화랑이 집단은, 멀리로는 신라 화랑에서 유래해 고려 말에 무부가 악공이 되는 과정을 통해 제도적으로 좀 더 분명히 악공·광대 집단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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