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3장 광대, 자유로운 예술을 위한 길에 서서
  • 3. 광대들의 활동을 돌아보며
  • 과거 급제자의 행사
  • 문희연
손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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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도문희연도(東都聞喜宴圖)
동도문희연도(東都聞喜宴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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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 의식, 은영연, 유가 등의 공식 행사가 끝나면 급제자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면 우선 사당문을 열고 조상에게 그 사실을 고하고 산소에도 가 그곳에 있는 조상에게 급제 사실을 알렸다. 그러한 의식들을 홍패·백패 고사(白牌告祠), 소분(掃墳)이라 하는데, 여기에도 광대들이 동 원되었다. 광대들이 고삿소리도 부르고, 산소에서까지도 줄타기 등의 재주를 한 것이다. 과거 급제가 전통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나를 새삼 알 수 있다.

그러한 사정이 다음과 같은 한성준의 증언에 나타나 있다.

8, 9세 때부터는 과거가 있어서 홍패 사령·백패 사령이 나서 고사당 차례와 묘소(墓所) 소분에는 사면옥조(四面玉調)와 소리 춤이 있고, 산소에서 줄 치고 재주도 넘었는데, 그런 곳에 춤추러 가는 일이 많았습니다.266)한성준, 앞의 글, 127쪽.

홍패·백패 고사, 소분이 끝나면 급제자의 집에서는 문희연(聞喜宴) 혹은 도문연(到門宴)이란 축하 잔치가 며칠이고 열렸다. 광대들도 이러한 문희연에서 며칠씩이고 놀이를 벌였다. 유가에서부터 문희연에 이르기까지의 과거 급제자의 행사를 판소리 명창 정정렬(丁貞烈, 1876∼1938)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노래하는 이들이 세월이 조은 는 갑오(甲午) 이전입니다. 갑오년의 봄 과거(科擧)지 과거가 계속햇고 그 후에는 과거가 업서젓스나 우리는 그가 제일 조앗습니다.

과거에 급제를 하면 압헤다 금의 화동(錦衣花童)을 세우고 긴 행렬을 지어 유가하는 법이엇섯는데 창부(唱夫)들이 금의 화동 노릇을 하엿답니다. 집에 도라가서는 도문 잔치를 베풀고 몃칠식 잔채를 계속하엿슴으로 으레히 잔채가 게속하는 날지 노래를 불넛습니다. 그리고 창부가 먼저 사당문을 열고 사당 잔채부터 시작하엿는데 그 닭에 창부의 대접도 상당하엿고 잔채가 난 뒤에는 사례도 썩 후하엿습니다. …… 과거가 업서진 뒤에는 우리에게도 화려한 노름은 업섯으나267)『매일신보』 1937년 5월 5일자.

과거 급제자와 관계된 광대들의 놀음이 광대들에게는 가장 ‘화려한 놀음’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과거 제도가 있었던 갑오년 이전의 때를 광대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다음 증언에도 반복된다.

우리의 전성시대는 아모래도 갑오 이전으로 그는 노래군의 생활도 훨씬 안정되엇섯고 윗사람들의 총애(寵愛)도 만히 바덧습니다.268)『매일신보』 1937년 5월 4일자. 판소리 명창 김창룡(1872∼1943)의 회고.

그것을 말씀하면 과거는 다 없었던 때이라, 어떤 때는 굿중패·남사당·모래굿패에 섞여서 다니고, 당굿에 다가서 춤추고 어른의 생신 때에도 가서 놀고 동서부정(東西不定)으로 다녔던 것입니다.269)장사훈 편저, 앞의 책, 131쪽.

1894년은 갑오개혁으로 신분 해방이 이루어져 사실상 광대들이 ‘광대’라는 천민 신분에서 해방된 뜻 깊은 해였다. 그런데도 광대들이 오히려 갑오 이전의 때를 그리워하는 것은 갑오년까지만 하더라도 광대들의 활동 공간이 나름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광대들이 전통적으로 활동한 공간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과거 급제자의 행사였다. 공식적으로는 광대들에게 중앙의 산대희가 가장 중요하였지만 이 행사는 가끔씩 열리는 것이었고, 조선 후기의 경우에도 기량이 아주 뛰어난 600명 정도의 광대만 동원되었다. 그러나 급제자의 서울에서의 유가를 위해 1,000여 명 이상의 악공과 광대가 필요하고 이러한 행사가 지방에까지 연장되어 전국 각지에서 열리던 과거 관련 행사들이야말로 대부분의 광대들에게 가장 중요한 활동 공간이었을 것이다.

과거 급제자의 집에서 열리는 문희연은 성격상 과거가 시작된 때부터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급제자를 위한 잔치인 궁궐의 은영연과 지방 관아의 영친의에서부터 광대들이 동원되었기에, 문희연에서도 광대들이 동원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 등과(登科)한 사람은 반드시 창우로써 즐거움을 삼는다.270)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僿說)』 권5 하, 인사(人事).

나라의 풍속에 등과하면 반드시 창우를 부른다.271)송만재, 관우희(1843).

조선시대 문희연에 대한 대표적 자료는 송만재의 ‘관우희’라 할 수 있다. 1843년(헌종 9) 아들이 소과인 진사에 입격하였으나 집이 가난하여 관례대로 광대를 불러 한바탕 놀음을 벌이지 못하여 대신 50수의 ‘관우희’란 한시를 지어 이를 대신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당시 문희연의 대표적 모습을 그려 보고 있다.

‘관우희’에서의 광대 놀음은 ‘영산(靈山)’, ‘판소리’, ‘줄타기’, ‘땅재주’ 등 크게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산은 판소리를 부르기 전에 광대들이 으레 불렀던 판소리 이전의 대표적 광대소리의 하나인데, 오늘날에는 판소리 단가로 전승되는 노래이다. ‘관우희’를 보면 문희연에서 오늘날에도 전승되는 진국명산, 관동팔경(關東八景) 등의 판소리 단가들이 불리고 있다.

(3수)

넓은 마당에 꽃잎들 져서 흩날리는데 / 花下空庭飜似海

한 가닥 장고 소리 봄바람을 멈추는 듯 / 一聲腰鼓立春風

목청을 가다듬어 뽑아 보는 ‘영산(靈山)’ / 調喉弄起靈山相

‘진국명산 만장봉’이라. / 鎭國名山萬丈峰

(4수)

태평한 우리 성군(聖君) 길이 만만세 / 聖主昇平萬萬歲

태평 시절 요순시대 그려를 본다 / 康衢煙月畵虞唐

하도(河圖)272)중국 복희씨 때 황하에서 용마(龍馬)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그림으로, 『주역(周易)』의 근원이 된다.가 나오고 봉황새 모이니 / 河圖之出鳳凰集

남산과 한양에도 그러하도다 / 應在南山漢水陽

(6수)

관동팔경 주워 섬김 좋고 좋을시고 / 關東八景好俳鋪

경치 따른 소리들마다 한 폭의 그림 / 逐境聲聲一畵圖

그리고 중앙의 산대희에서 왕조 송도나 군주 송도의 노래로 불리었을 신재효 사설본에 있는 대관강산, 역대가, 역려가, 고금가 등과 같은 노래들도 이런 ‘영산’이란 노래로 많이 불렸을 것이다.

판소리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춘향가, 적벽가, 흥부가, 강릉 매화 타령, 변강쇠 타령, 무숙이 타령, 심청가, 배비장 타령, 옹고집 타령, 가짜 신선 타령, 수궁가, 장끼 타령 등 이른바 열두 마당이 한 편의 시로 차례로 소개되고 있다.

(9수) : 춘향가

금슬(錦瑟)의 번화함은 『회진기(會眞記)』를 떠올리는데 / 錦瑟繁華憶會眞

광한루에 수의사또 당도하였다 / 廣寒樓到繡衣人

도련님 그 전 다짐 어기지 않아 / 情郞不負名佳節

옥에 갇힌 춘향 살려 내었네 / 鎖裏幽香暗返春

(10수) : 적벽가

가을비에 화용도(華容道)로 도망친 조조(曹操) / 秋雨華容走阿瞞

관우는 청룡도 잡고 말에서 볼 뿐 / 髥公一馬把刀看

군졸 앞서 비는 꼴 정녕 여우라 / 軍前搖尾眞狐媚

우습구나, 간웅들 모골이 오싹 / 可笑奸雄骨欲寒

이러한 열두 마당 중 골계 일변도로 재담소리적 성격이 강한 이른바 실전(失傳) 7가는 오늘날 전승이 끊어졌고, 춘향가, 적벽가, 흥부가, 심청가, 수궁가 등 이른바 전승 5가는 오늘날에도 불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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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줄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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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타기와 땅재주는 광대들이 오랫동안 전승해 온 기예들이니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문희연에서 문제 삼을 만한 것이 판소리 공연이다. 판소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754년에 지은 만화본 춘향가이다. 만화(晩華) 유진한(柳振漢, 1711∼1791)이 1753년 전라도 남원에서 판소리 춘향가를 듣고 이듬해 200구의 한시로 이를 적은 것이다. 이 만화본 춘향가는 춘향가로도 가장 오래된 자료이고, 판소리 자체로도 가장 오래된 자료다. 그래서 오늘날 판소리의 성립 연대를 따질 때 이를 기준 삼아 17∼18세기로 잡고 있다. 그런데 문희연은 고려시대부터 이미 시작되었으므로 판소리 이전에는 광대들이 어떤 공연을 하였을까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그러한 공연물로 우선 다음과 같은 화극을 들 수 있다.

이귀(李貴)는 유생 때부터 상소문을 쓰기를 좋아하였다. 그 첩에 노래를 하는 이가 있었는데, 노래를 할 때마다 반드시 ‘오날이야 오날이야’하고 하는 노래를 불렀다. 이귀가, “너의 오날이야 라는 노래 그만 둘 때도 되었는데…… ”라고 하자 그 첩이, “나으리의 ‘성황성공’(誠惶誠恐)은 어떻구요.”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평생토록 말수가 적었고, 잘 웃지를 않았다. 창우들의 잡희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포복절도(抱腹絶倒)를 해도 청음공은 여전히 이를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어떤 집에 과거 급제자가 있어 문희연을 베풀었는데, 그 때 우인(優人) 박남이란 자가 헌희(獻戲)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그 집에서 박남에게 말하기를, “오늘 청음 상공께서 반드시 이 잔치에 오실 것이다. 네가 아주 우스운 일을 꾸며내어 청음공을 한 번이라도 웃게 할 수 있다면 마땅히 후한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청음이 잔치에 참석하자 박남은 잡희를 펼쳤는데, 청음은 전혀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박남은 종이 한 장을 상소문처럼 말아서는 두 손으로 받들고는 천천히 걸어 나가서, “생원 이귀가 바친 상소이옵니다.” 하고는 이어 꿇어앉아서는 종이를 펼치고 읽기를, “생원 신(臣) 이(李)는 성황성공(誠惶誠恐) 돈수돈수(頓首頓首)…… ”라고 하였다. 만좌(滿座)가 모두 포복절도하였고, 청음 또한 부지불식간에 실소(失笑)하고 말았다는 것이다.273)이이명(李頤命), 『소재집(疏齋集)』 권6, 잡저(雜著), 「만록(漫錄)」.

이귀는 유생 때부터 상소문 올리기를 좋아하여 이것이 당대에는 이야깃거리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한 문희연에서 광대가 이를 흉내 내어 평소 웃지 않았던 김상헌(1570∼1652)으로 하여금 웃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광대가 간단한 말과 흉내 내기로 하는 화극을 한 것이다.

이익(李瀷, 1680∼1763)도 당대의 문희연에서는 광대가 ‘유자(儒者) 놀이’와 같은 화극 공연을 한 것을 말하고 있다.

지금 등과(登科)한 사람은 반드시 창우로써 즐거움을 삼는다. 창우는 으레 ‘유자 놀이’란 것을 하는데, 찢어진 옷에 망가진 갓을 쓰고 황당한 말들로 억지로 웃게 하며 온갖 추태를 보여 잔치의 흥을 돋우는 것으로 삼는다.274)이익, 『성호사설』 권5 하, 인사.

1694년(숙종 20) 궁궐의 연말 나례희가 이루어질 때까지만 하더라도, 임금을 주 관객으로 하여 한 명의 광대가 중심이 되어 궐 밖의 여러 일을 간단한 말과 흉내 내기로 보여 주는 화극은 광대의 중요한 공연물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문희연과 같은 민간의 잔치에서도 화극을 그들의 주요한 공연물의 하나로 삼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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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객재담(歌客才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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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843년(헌종 9)에 지은 ‘관우희’에서는 화극이 보이지 않고 판소리가 가장 중요한 공연물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판소리가 성립된 이후 에 화극은 급격히 쇠퇴하여 ‘관우희’를 지을 무렵에는 종래의 그 자리를 판소리에 내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화극은 간단한 말과 흉내 내기로 이루어지기에 예술적으로 그렇게 수준 높은 공연물이 아니다. 그렇지만 1694년까지만 하더라도 화극이 중시되는 궁궐의 나례희가 있었기에,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화극이 광대의 주요한 공연물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궁궐의 나례희가 폐지된 1694년 이후부터 화극은 더 이상 광대의 주요 공연물이 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광대들의 주 전공의 하나가 노래인 만큼 혼자서 하는 화극에 노래를 삽입하면 이른바 ‘재담소리’라 할 만한 공연물이 성립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담소리가 문학적으로나 음악적으로 좀 더 발전하면 역시 혼자서 부르는 판소리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광대들이 문희연에서 주로 펼친 공연물은 대체로 1700년 무렵까지는 화극이 되었고, 이후 1700∼1750년에는 재담소리였으며, 1750년 이후에는 판소리였을 것이다.

이중 재담소리는 재담소리에서 판소리로 넘어가지 못하고 재담소리 수준에 머물렀던 경기 이북의 광대 집단인 재인촌 사람들의 배뱅이굿, 장대장네굿, 병신 타령, 변강쇠 타령,275)판소리 변강쇠 타령과는 다소 다르다. 장끼 타령 등에서 그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후기 공연 문화의 성숙으로 종래의 일회적이고 즉흥적이며 골계 일변도의 재담소리를 넘어 좀 더 지속적으로 향유할 만한 공연물이 요구되자, 경기 이남의 광대 집단은 이러한 재담소리를 넘어 무당 서사시라 할 수 있는 서사 무가(敍事巫歌)의 방식을 받아들여 광대 서사시라 할 수 있는 판소리로 넘어갔다. 경기 이남의 화랑이 집단은 무속 집단으로 무녀와 함께 그러한 서사 무가 문화를 오랫동안 공유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속과는 관계가 없던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은 재담소리 수준에 계속 머물러 근대 무렵까지도 그러한 재담소리들을 부른 것이다.

한편 오늘날 판소리 열두 마당 중 실전 7가로 알려진 배비장 타령, 옹고집 타령, 장끼 타령, 강릉 매화 타령, 무숙이 타령, 가짜 신선 타령, 변강쇠 타령을 통해서도 판소리 이전에 이러한 재담소리가 존재하였음을 일정하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전 7가의 공통점은 줄거리 자체가 모두 우스운 내용이고, 주인공도 풍자나 해학의 대상으로 오로지 부정적 인물이기만 해서, 재담소리적 성격이 강하고 어떤 면으로는 이 작품들을 모두 재담소리라 볼 만한 여지가 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장끼 타령과 같은 경우는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이 판소리라고 여기지 않고 그냥 그들의 재담소리의 하나로 오늘날까지 전승해 왔다. 초기의 판소리사는 이러한 재담소리 혹은 재담소리적 성격이 강한 작품들을 탈락시키며, 줄거리 자체가 단순한 우스운 내용이 아니고 주인공도 부정적 요소 외에 긍정적 요소도 지니고 있어, 이른바 광대 서사시로 민족 서사시가 될 만한 작품들, 곧 전승 5가만 남기는 식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성격상 상·하층이 모두 참가하고 후한 대접 속에 며칠이고 밤을 새우며 놀이를 벌일 수 있는 문희연이야말로, 광대들의 주된 공연물을 화극에서 재담소리로 발전시키고 더 나아가 문학적으로나 음악적으로 수준 높은 예술인 판소리를 성립·발전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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