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3장 광대, 자유로운 예술을 위한 길에 서서
  • 3. 광대들의 활동을 돌아보며
  • 민간의 축제
  • 정초 집돌이
손태도

지금부터 30∼40년 전만 하더라도 정초가 되면 농악대가 집집을 돌며 ‘매구’ 혹은 ‘지신밟기’라는 의식들을 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정초의 집돌이는 오늘날에는 대개 마을 주민들이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원래는 광대 집단 사람들이 많이 참가하였다.

중국에서 전래된 연말 나례 의식은 고려 때에 1040(정종 6년)에는 궁궐에서 행해졌고, 1286(충렬왕 21년)에는 “민간의 나(儺)를 금지하였다.”라고 하고 있어 이때에는 이미 민간에서도 연말 나례 의식들이 상당할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말까지도 대부분의 지방 관아에서는 광대 집단 사람들에 의한 ‘매귀(埋鬼)’라는 연말 나례 의식이 이루어졌다.

고려 성종이 전국을 8목(牧)으로 나누고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한 이래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중앙 집권 국가였다. 그래서 고려시대 이래 지방 관아의 방식은 대체로 궁궐의 방식을 따랐다. 그렇다면 고려 정종 때 이미 궁궐의 나례 의식이 이루어졌다면, 이 무렵 지방 관아에서도 이와 비슷한 나례 의식이 이루어졌을 것임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말까지도 행해진 지방 관아의 나례 의식은 고려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시대부터 섣달 그믐날 지방 관아에서 나례 의식을 한 광대들이, 정초가 되면 섣달 그믐날 지방 관아에서의 나례 의식의 연장으로 민간에서도 집집을 돌며 나례 의식류의 행사를 하였을 것이다.

오늘날 정초 집돌이의 전국적 명칭은 ‘매구’ 혹은 ‘지신밟기’인데 이의 정확한 명칭은 ‘매귀(埋鬼)’라 할 수 있다.276)김일출, 앞의 글, 황해도 봉산(매귀, 섣달그믐, 봉산 관아) ; 문화재 관리국, 『한국 민속 종합 조사 보고서』, 1969∼1982의 전남 여천군 거문도(매굿), 경남 창녕군 대합면 십이리(매귀), 충북(풍장·풍물·매구·굿), 강원도 강릉시 홍제동(매구, 꽹가리) ; 정병호, 『농악』, 열화당, 1988의 경북 금릉군 개녕면 광천동(매구), 전남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매굿), 전북 임실군 강진면 필봉리(매구, 섣달 그믐날 밤), 전남 여천군 화양면 백초리(매굿). 섣달 그믐날 연말 나례 의식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정초 집돌이는 우리 민족이 정초에 가지는 신년 길운(吉運) 신앙에 중국에서 유래한 벽사적 나례 의식이 결합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나례란 것이 잡귀와 잡신들이 무서워 할 가면을 쓰고 타악기를 두들기는 것이기에, 가면을 쓰는 것에서 농악의 잡색이 나올 수 있고, 타악기를 두들기는 것에서 농악의 치배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처럼 꽹가리, 징, 북, 장고 등의 타악기를 제대로 울리고, 양반, 각시, 포수 등으로 분장한 잡색이 등장하는 정초 집돌이의 구체적 모습은 고려시대 이래 해마다 지방 관아에서 섣달 그믐날 저녁에 ‘매귀’라는 연말 나례 의식을 한 광대 집단 사람들이 정초에는 민간의 집들을 돌며 나례 의식류의 행사 를 한 것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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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임실 필봉 농악
전북 임실 필봉 농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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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 그믐날 지방 관아에서 나례 의식을 한 광대들이 정초에도 민간을 돌며 나례 의식류의 행사를 한 것은 경제적 목적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집을 다 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 재력 있는 사람의 집을 찾아가 대문, 마당, 부엌, 장독대, 뒷간, 곳간, 우물, 외양간 등을 돌며 잡귀와 잡신을 몰아내기도 하고 축원하는 말도 하며 나례 의식류의 행사를 한 뒤, 마지막으로 그 집의 최고신이라 할 수 있는 성주신을 모시고 한 해 그 집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성주 고삿소리를 길게 하면 그 집에서는 쌀, 돈 같은 일정한 재물로 보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기 이남을 비롯한 논농사 지역에서는 모심기나 김매기를 위한 마을 단위의 두레 조직이 있었고 이러한 두레 집단에서도 농악을 치기 때문에, 광대들에 의한 정초 민간에서의 ‘매귀’를 일반 농민들도 흉내내어 지금에 이른 것이 오늘날 흔히 알려진 일반 마을 사람들의 정초 집돌이가 아닌가 한다. 그렇지만 일반 마을 사람들의 정초 집돌이도 본디 섣달 그믐 날 지방 관아에서 나례 의식을 한 광대들이 정초에 민간을 돌며 연말 나례 의식류의 행사를 한 것에서 나온 것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정초 집돌이도 원래는 광대 집단 사람들이 하였던 것은 다음의 증언들이 잘 말해 준다.

황규언 :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까장 사둔 삼고 결혼을 해버린게 넘하고 양인으로는 안 해. 동간들까장 하제 그전에는. 그것이 개화가 되가지고 상놈 양반이 없거든. 시국이 배껴가지고. 그전에는 지그들까장 동간이라고 해. 동간은 하대받는다 그 말이여. 예전에는 전부 동간들이 쳤지. 양인들이 별로 안 쳤거든.277)고창 문화원, 『고창의 마을굿』 1-면담 자료집-, 도서 출판 기획, 2000, 39쪽.

황규언 : 그들 패들은 다 기맥히게 쳐. 즈그 패들은 만나면은 모른 것을 물어보면 제대로 갈쳐 주고 그랬어. 다 그것(농악)으로 벌어먹는 놈들이라 우리 일반하고는 틀버.278)고창 문화원, 앞의 책, 318쪽.

앞의 증언을 한 사람은 현재 고창 농악 상쇠로 있는 황규언(1920∼2007)이다. 오늘날에는 고창 지역 일대에는 무계(巫系) 출신으로 농악을 치는 사람이 없지만, 30∼40년 전만 하더라도 농악을 제대로 친 사람은 대부분 광대 집안사람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전문적으로 농악을 쳤던 광대 집단의 농악 가락이 일반 마을 사람들에게 전수되는 것은 다음의 증언이 잘 말해 준다.

이명훈(고창 동리 국악당 농악 강사) : 이 동네 상쇠는 누구였어요? 옛날에.

이중섭(1935∼?, 고창군 공음면 두암 거주 농악 명인) : 그 옛날에는 저그, 그때는 당골이라고도 하고 재인이라고도 허고 그런 양반이 있잖아. 이 마을에 살았거든. 성대 씨여, 김성대.

이명훈 : 그분이 꽹가리 잘 치셨어요?

이중섭 : 참 기맥히게 쳤어. 방성근 씨도 여그와서 다 배와갔고 갔네. 그 양반한테. 굿이 여가 억셨어.279)고창 문화원, 앞의 책, 272쪽.

마을마다 당골 무녀가 있었고 그러한 당골 무녀 집안의 남자인 무부가 있었기에, 한 마을의 농악도 이들 무부의 주도와 교육 속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전북 고창의 농악인들을 전반적으로 만나 면담 조사한 이명훈도, “고창 농악이 어디서 나왔느냐?”란 필자의 물음에, “재인들에게서 나왔다.”고 단언하였다.280)일시 : 2000. 5. 1. 장소 : 전북 고창 ‘동리 국악당’

한편 1991∼1992년에 실시한 전라도 우도 농악의 중심지인 정읍의 농악 명인들에 대한 조사에서는, 25명의 명인들 중 쇠꾼과 장고잽이 13명, 새납(태평소) 1명, 잡색 3명 등 모두 17명의 명인들이 무계(巫系) 출신이었음을 보고하고 있다.281)김익두 외 편, 『정읍의 민속 예능』, 전북 대학교 박물관, 1992, 41∼56쪽. 1960년대까지도 왕성하게 이루어진 이 지역 농악에서 그때까지도 여전히 광대 집단 계통 사람들이 농악을 주도한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정초 집돌이는 대개 마을 주민들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광대 집단 사람들에 의한 정초 집돌이는 ‘신청(神廳) 농악’이라고 하여 원래 무부들만 하였다는 전남 영광 농악 정도에만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정초 집돌이도 본래 광대 집단 사람들이 하였다는 것은 경기 이북의 경우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황해도 연백 평야 이북 쪽에는 모내기나 김매기를 할 때 마을 단위의 두레 문화가 없었고, 이에 따라 두레에 수반되는 두레 농악도 없었다. 마을 단위의 농악패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경기 이북 지역의 정초 집돌이는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경기 이북의 광대 집단인 재인촌 사람들이 도맡아 하였다.

그들은 정초(正初)에 서낭대를 들고 집집이 다니며 성주 고사(城主告祀)를 지냈다. …… 성주 고사에는 소리 광대가 삼현육각 반주에 성주풀이를 하였다.282)이보형 조사 ; 문화재 관리국, 『전국 민속 종합 조사 보고서』 황해·평안남북도편, 1980, 261쪽.

김영택에 의하면 정월 초사흘부터 보름까지 재인들이 네댓 발 되는 참대나무에 종이꽃인 ‘서래화’ 등으로 장식한 서낭대를 만들어 앞세우고, 호적을 불고 꽹가리, 장고, 북, 징 등을 두드리며 일반인들의 대문 앞에다 세우고, “재장님 집에 서낭님 모셨습니다.” 하고 만세받이식으로 “아황 임금 만세야! 잠시나 잠깐 놀고 가세.” 식의 노래를 선창과 후렴 받기로 부른 뒤, 축원 덕담을 하고 마지막에는 열두 달 횡수막이 노래를 부른다 하였다. …… 이렇게 서낭대를 세우고 고사를 지내 주면, 쌀이나 계란을 내주고, 잠방이, 적삼 등 입던 옷도 서낭대에 걸어 주곤 했다 한다. 이렇게 옷을 걸어 주는 것은 액막이 의식과 관계된다고 한다.283)손태도, 앞의 책, 133쪽.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은 무속 집단과 기본적으로 관계가 없으므로 종교적 집단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정초에 민간에서 농악을 치며 종교적 의식인 집돌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매년 연말이면 지방 관아에 들어가서 구나를 한 집단이라는 이유밖에 없다. 원래 민간의 정초 집돌이는 지방 관아의 섣달 그믐날의 구나 의식의 연장선상에서 나왔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경기 이북의 광대 집단은 판소리나 산조 등과 같은, 근대에도 이어지는 예술 등을 갖지 못해 근대 이후 이러한 예술들을 성립시킨 경기 이남의 광대 집단보다 일찍 민속 예술사에서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도 정초 집돌이에 있어서는 오히려 경기 이남의 광대 집단보다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그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경기 이남에는 광대 집단의 정초 집돌이를 흉내 낼 수 있는 마을 주민 중심의 두레 농악이 있었지만, 경기 이북에는 그러한 마을 주민 중심의 농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대가 되어도 한동안 경기 이북 지방에서는 재인촌 사람들에 의한 집돌이가 유지되었고, 경기 이남 지방에서는 광대 집단이 하던 집돌이들은 거의 사라지고, 이와 일정한 관계에 있는 마을 주민들의 집돌이만 남게 된 것이다.

이렇듯 전통 사회까지만 하더라도 정초 집돌이도 광대 집단의 주요한 활동 공간의 하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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