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4장 떠돌이 예인들이 남긴 예술과 삶의 지문
  • 1. 불교와 유랑 예인, 비승비속의 세계
  • 불교의 몰락과 승려 집단의 비승비속화
주강현

예인의 역사는 유사무서(有史無書)의 역사이다. ‘역사는 있으되 기록은 없는’ 역사인지라 드문드문 간헐적인 자료는 보이나 전일적(專一的)으로 연결되는 통사적 연대기(年代記) 서술은 거의 불가하다. 역사적인 불연속성으로 인하여 사건사나 여타 제도사 등보다 일목요연한 연대기적 서술이 쉽지 않다. 특히나 떠돌아다니면서 연희를 팔던 유랑 예인들은 그네들의 존재고(存在苦)만큼이나 저열하고 천한 존재인지라 역사 서술에서 논외였다. 이와 같은 제한성이 뚜렷한 데도 적어도 조선시대부터는 유랑 예인에 관한 어느 정도의 체계적인 서술이 가능할 것이다. 감로탱화(甘露幀畫)에서 그네들의 모습을 다수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그림이 지니는 명증성(明證性)으로 인하여 대단히 소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20세기 초반까지 그네들이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들은 남사당 후예들의 구전을 통하여 채보(採譜)된 바 있다. 유사무서의 역사답게 제한적인 문헌, 구전, 그림, 심지어 20세기의 사진 자료 등 다양한 사료를 통하여 유랑 예인의 실체에 조금은 가깝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인 불연속성을 보여 준다고는 해도 어느 시대에나 예인들은 존재하였고, 떠돌이 예인도 있었을 법하다. 적어도 고대 사회의 여러 기록이나 고구려 고분 벽화 등에 예인들의 모습이 선보이고 있다. 『삼국사기』 「악지(樂志)」302)『삼국사기(三國史記)』 권32, 잡지(雜志), 제일락(第一樂).에 전하는 오기(五伎), 곧 금환(金丸)·월전(月顚)·대면(大面)·속독(束毒)·산예(狻猊)의 다섯 재주, 고구려 수산리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재주꾼, 후대로 내려와 고려시대의 괴뢰패(꼭두패), 양수척(楊水尺), 또한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춤꾼, 악공 등이 바로 그 원조이다. 이들 공연 양식들은 한반도에서 자생한 것도 있겠지만 서역(西域)이나 중국에서 들여와 다시금 변화·발전시킨 것도 다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창우(倡優), 기생(妓生), 무당(巫堂), 판소리꾼, 심지어 마을의 ‘아마추어’적인 탈춤꾼, 풍물꾼도 포함된다. 특히 소학지희(笑謔之戲)라는 말을 낳게 한 창우가 중요하다.

확대보기
수산리 고분의 곡예도(曲藝圖)
수산리 고분의 곡예도(曲藝圖)
팝업창 닫기

그러나 조선 후기에 봇물 터지듯 생겨난 유랑 예인 집단처럼 조직적 결집력과 전문성을 아우르면서 서민 대중을 직접 상대하였던 민중적인 연예인 집단은 드물었다.303)이러한 대목에서 고려시대와 삼국시대 유랑 예인의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료의 제한과 아울러 조선시대 명증 가능한 유랑 예인의 실체에 접근한다는 측면에서 이 글에서는 조선시대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왜 조선 후기에서야 이런 유랑 예인 집단이 급증하였으며, 그 이전에는 그 같은 집단들이 없었을까? 아무래도 사당패가 가장 오래된 집단이니 사당패를 추적해보면 그 해답이 나올 성싶다. 사당패의 원래 명칭은 거사패였다. 언제, 어느 시기에, 어떤 이유로 명칭이 바뀌었을까.

고려가 불교 중심 국가였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국초에 이미 태조가 마련한 훈요 10조의 제1·2조에 불교는 진호국가(鎭護國家)와 산천비보(山川裨補)의 교(敎)임을 천명하여 후세의 국왕이나 왕실 또는 귀족들이 적극 적으로 불교를 비호할 것을 당부한 바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원 경제의 불필요한 확대 과정, 승려의 부패 등이 고려 사회 자체를 뒤흔드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동하게 된다. 이에 따라 고려 말부터 거세게 일기 시작한 신유학파의 배불(排佛)·척불(斥佛) 기세는 왕조가 바뀌자 여지없이 국론으로 결정되었다. 이미 고려 말부터 승려들의 행동을 제한하는 척불이나 배불론이 가시화된 귀결이다.

확대보기
사당패
사당패
팝업창 닫기

정도전(鄭道傳, 1337∼1398)의 『불씨잡변(佛氏雜辯)』을 위시하여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은 조선 왕조의 국시가 되었다. 물론 이성계나 세조를 비롯한 왕가 내에서는 불교를 돈독히 경배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 취향이나 궁궐의 아녀자들 몫이었을 뿐, 공식적 국론은 숭유억불의 ‘단일 노선’이었다. 불교는 조선 왕조 500여 년간 일관되게 유교 문화와 대비된 ‘비주류 문화’로 존속하였다. 그러나 비주류적 속성은 결과론적으로 민중과 친화하는 반대급부도 낳았다.

태종은 1402년(태종 2) 서울 밖 70개 사찰을 제외한 모든 사찰의 논과 밭을 군자(軍資)에 소속시키고, 사찰 노비를 나누어서 기관에 분속시켰다. 1406년(태종 6)에는 전국에 242개 사찰만 존속시키고 토지와 노비를 국가에서 몰수하였으며, 나머지 사찰은 폐사시켰다. 11개 종단을 7개로 통폐합하였으며, ‘승려 주민 등록 제도’인 도첩제(度牒制)를 엄격히 시행하였다. 세종은 1424년(세종 6)에 아예 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총남종(摠南宗)을 합쳐서 선종으로, 화엄종(華嚴宗)·자은종(慈恩宗)·중신종(中神宗)·시흥종(始興宗)을 합쳐서 교종으로 삼아 선교 양종(禪敎兩宗) 체제로 축소·정리하였다. 사찰 36개소, 토지 7,950결, 승려 3,770명으로 한정시켰으며, 승려의 성문 출입을 금하였다. 세종의 척불을 아홉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사사(寺社)의 노비와 승려들이 상전(相傳)하는 법손(法孫)의 노비를 속공(屬公)함

2. 7종을 선교 양종으로 폐합함

3. 사원의 수를 대폭 줄임

4. 내불당(內佛堂)을 폐함

5. 도성 내에 흥천사(興天寺)와 흥덕사(興德寺)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철폐하여 속공함

6. 철폐된 절의 불상과 종성(鐘聲)을 녹여서 병기로 만듦

7. 불사의 설행을 줄여서 비용을 절약함

8. 승도들이 함부로 도성 내에 출입하는 것을 금함

9. 도승제(度僧制)를 엄하게 하고 특히 연소자의 출가를 금함304)정극인(丁克仁), 『불우헌집(不憂軒集)』 권2, 「태학청주요승행호소(太學淸誅妖僧行乎疏)」 ; 이재창, 『한국 불교 사원 경제 연구』, 불교 시대사, 1993.

심지어 성종은 한양 내의 비구니 사찰을 없애고 궁방(宮房)의 노비로 삼았다. 삼각산의 사찰을 모두 없앴으며 도첩이 없는 승려는 모두 군역(軍役)에 징집하였다. 승려를 환속시켜 결혼을 시키거나 관노(官奴)로 삼았고, 사찰의 토지는 모두 관부(官府)로 귀속시켰다. 중종은 그때까지 명맥을 유 지하던 승과(僧科)를 완전히 폐지하였으며, 유생들에 의한 다양한 훼불(毁佛)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다. 승려들의 도성 출입은 완전히 금지되었으며 이는 사원으로 하여금 도시를 벗어나 산중으로 은둔케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기왕에 산중의 사찰 이외에도 저잣거리에 나와 있던 사찰들이 대거 산으로 후퇴하였다. 세조 때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쓴 단편 소설집 『금오신화(金鰲新話)』의 만복사저포기(萬福寺摴蒲記)에는 당대의 절집 풍경이 “이때에 절은 이미 허물어져서 승려들은 한편 구석에 있는 집에 살고 있었고, 법당 앞에는 다만 거칠어진 행랑(行廊)만이 쓸쓸히 남아 있었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확대보기
김시습 초상
김시습 초상
팝업창 닫기

승려들은 산중으로 내쫓김을 당하면서도 산성(山城)을 쌓는 데 동원되었으며, 잡역(雜役)을 도맡아 하여 관가(官家)와 유자(儒者)들에게 종이, 기름, 짚신 등을 만들어 바쳐야 하였다. 절에 가해지는 여러 가지의 억압과 착취는 필설로 다할 수 없을 지경이었으며, 곳곳에 승려 없는 빈 절이 속출하였다. 그래서 민간에서 ‘빈대절’이라고 하여 빈대 때문에 절이 망하였다는 사례가 많음은 단순히 빈대가 아니라 이들 착취를 암시하는 은유법일 수도 있다. 가령 양반들이 반나절 절집에 놀러 오게 되면, 승려들은 무려 3일간이나 적지 않은 희생을 당한다는 풍자까지 등장하고 있다.305)정약용(丁若鏞), 『목민심서(牧民心書)』 권2, 율기(律己). ‘빈대로 망한 절집’ 이야기는 그 당시 절의 위상이 어떠하였는지를 웅변해 주고 있다.306)빈대가 들끓어 절을 옮겼다거나 폐사되었다는 이른바 빈대절터는 수도 없이 많다. 화재 사건이라거나 여타 물리적인 조건으로 말미암아 폐사된 경우가 많을 터인데도 하필 빈대를 주범으로 주목한다. 해석하건대 이 빈대를 불교에 박해를 가하는 어떤 세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방에서 사찰의 기와를 벗겨 가고 스님을 토목 공사에 동원하고 갖은 행패를 부려서 절이 존속하지 못하도록 한 사례가 숱하거니와 그러한 세력을 빗대어 빈대라고 이름붙인 것이 아닌지. ‘빈대 붙는다.’라는 속어를 연상할 일이다. 막상 그대로 노골적으로 이유를 들이댈 수가 없으니 빈대 때문에 폐사되었다는 식으로 수사법을 쓴 것 같다.

사실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하였다고 해도 엄밀한 의미에서 승려는 천민이 아니었다. 즉, 승려와 노비는 엄연히 구별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승려의 사회적 지위는 여지없이 몰락하여 승려들은 양 민인 동시에 천민이요, 천민인 동시에 양민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신분이면서 양반이나 아전들에게 천민 이하의 박대를 받았다.

그리하여 1895년(고종 32)에 공식적으로 도성 출입이 허가될 때까지 승려들은 통행의 자유조차 마련되지 못하였다. 1895년 4월에 고종은 승니(僧尼)의 서울 입성 금지를 완화하라 명하였는데, 이보다 앞서 일본 일련종(日連宗)의 중 사노 젠레이(佐野前勵)가 우리나라에 와서 내각 총리 대신 김홍집(金弘集)에게 해제를 청하여 김홍집이 왕에게 아뢰어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일제의 침략기에 이르러서야 일본 승려의 부탁으로 겨우 도성 출입이 허가된 것이다. 도성에 절집이 들어서는 것은 1910년 4월, 여러 절의 승려들이 서울 북부 박동(礡洞, 지금의 수송동)에 각황사(覺皇寺)를 지었는데, 이것이 성내에 들어와 포교한 시초일 것이다.307)이능화, 『조선 불교 통사』, 신문관, 1918. 이와 같은 악조건에서 수많은 승려가 방랑을 거듭하였으며, 절에서 밀려나와 저잣거리를 방황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