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4장 떠돌이 예인들이 남긴 예술과 삶의 지문
  • 1. 불교와 유랑 예인, 비승비속의 세계
  • 조선 후기, 유랑 예인의 질적 양적 팽창
주강현

임진왜란 이후 거사의 무리는 이전과 크게 다른 양상을 보이며 사회 문제로 대두하였다. 이전 시기와는 달리 이들의 무리가 본격적으로 유랑을 하고 있고 갑자기 수가 불어나고, 흉적(凶賊)의 무리와 같이 취급된다. 유민(遊民)이 불어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의 사회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전기에 환속 승려를 중심으로 형성된 거사배에 이들 유민 가운데 일부가 합세하면서 조선 후기에 거사의 무리가 대폭 불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지은 한시 ‘유민의 원성(流民怨)’을 보면, 서리 내리고 눈발 날리는 초겨울에 충청도 해변을 여행하는데 진종일 오가는 사람들 태반이 유민이라는 대목으로 시작된다. 밤낮으로 일하였건만 수 재(水災)와 한발(旱魃)이 겹치고 고을 아전이 날마다 문전에 와서 부세(賦稅)를 바치라 닦달하고 젖먹이 아이까지도 한정(閒丁)의 대장에 올리는 현실이었다.

아내를 끌고 어린 자식 안고

동서로 남북으로 떠돌아

어디 간들 낙원이 있으랴!

열흘에 세 끼 겨우 얻어먹는 판에

이와 같은 준엄한 현실은 유민을 양산하였다. 또한, 본디부터 유랑하던 거사들은 호적도 없고 부역도 아니 하고, 조세도 부담하지 아니하였으니, 1785년(정조 9)에는 거사배 모역 동참 사건도 일으켰다. 1785년 11월 함경도 단천에서 거사가 체포되고, 12차례 추국(推鞫)을 열어 심문한 이 사건은 실각한 시파(時派)가 집권한 벽파(僻派)에게 도전하다가 사전에 발각된 사건인 듯하다. 거사들이 이들의 당파 싸움에 이용된 것인지, 아니면 거사들의 자발적이고 민중적인 저항 의지가 작용한 것인지는 자못 의심이 가는 문제이지만 불만 세력화한 거사들의 동향을 잘 알려 주고 있다.

거사들은 신분상으로 승적도 없고 호적도 없었다. 거사의 분포는 전국에 흩어져 있되, 특히 중앙의 행정 통치력이 적게 미치는 곳, 절이 있는 산 아래, 상업이 발달한 곳, 천민들이 많이 사는 곳에 모여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여 산다고는 하나 그들은 끊임없이 유랑하고 있었다. 따라서 거사들은 전국적인 정보망을 지니고 있었으며, 세상 물정에 대해서도 밝았다. 사회 하층으로서 어려운 가운데도 종교적 신념은 잃지 않고 있었으며, 나름대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대를 이어 거사로 살아 나갔다. 물론 가족을 거느리거나 집단적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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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판 놀음
사당판 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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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는 아무나 원하는 때에 거사가 되는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들은 스승 밑에서 일정한 배움의 과정을 거쳤다. 구걸을 다녔으며(行乞), 점술(占術)과 기도(祈禱)에 능하였다. 거사들의 사주(四柱)·관상(觀相)·손금·척점(擲占)·신사(神祀) 등에 관한 언급도 빈번히 나온다. 교통이 불편하였던 당시에 전국을 유랑하면서 행상(行商)도 하였다. 또한, “남녀가 한 곳에 뒤섞이어 징과 북을 울리며 안 하는 짓이 없다.”거나, “기괴한 형상으로 많이 모여서 두루 돌면서 징을 울리고 북을 치며 춤추어 뛴다.”라는 기록을 자주 보게 된다. 이른바 거사배라고 불리던 이들 무리가 유랑 예인 집단으로 굳어지면서 이들의 명칭도 사당패로 바뀌었다. 불교적 요소가 강하던 거사배란 명칭에서 연희를 파는 떠돌이 예입 진단의 성격이 강해진 사당패란 이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거사배가 사당패로 이름이 바뀐 것은 거사의 기능(행상 등)이 약화되고 사당의 기능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며, 또 사람들이 거사보다 사당을 더 요구하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조선 후기에 생긴 변화 양상이다. 즉 조선 후기에 이르면 본디 사당이었던 여사당 말고도 남 사당이 등장하게 되며, 이로써 사당이란 남녀를 구분하여 총칭하는 명칭이 된다.

사당들은 완벽한 재인 집단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18세기 초반에 그린 봉사도(奉使圖)의 제7폭에 중국 사신을 위한 재인 잡희(才人雜戲)가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에 재주넘기·줄타기 등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러므로 이미 1700년대 초반에는 줄타기·재주넘기 같은 재인패가 국가적으로 공인된 공연 판에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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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도 제7폭 세부
봉사도 제7폭 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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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규(李學逵, 1770∼?)가 지은 한시 ‘걸사행(乞士行)’에는 동가숙서가식(東家食西家宿) 봉놋방이나 주막·장터 등으로 바람 부나 눈이 오나 삼한 천지에 집도 절도 없는 신세로 ‘나무아미타불’하면서 떠돌던 거지 행색의 걸사들이 등장한다. 두말할 것 없이 걸사는 거사이다. 굳이 거사라 하지 않고 걸사라 하였음은 그 사람들이 ‘구걸하는 거지’에 다름이 아니었다는 뜻도 된다. 여자들은 ‘아침엔 김 서방, 저녁엔 박 서방’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일반 보시로 술 한 잔·국 한 잔에 몸을 팔기도 하였다. 그리고 “동당 동당 동당 시주댁전에 양식을 구걸”하며 축원하면서 시주를 받았다. 매춘과 불교, 도저히 양립할 수 없었을 것만 같은 현실이 일상적으로 보편화한 것이다.

통영반자에 서 말 곡식 담고

가운데 대전 열 닢을 얹었으니

상평통보 네 글자 뚜렷하다

축수를 남산만큼 하리이다

남시주님 여시주님 부자되고 건강하소

강이천(姜彛天, 1769∼1801)은312)화가로 이름 높은 강세황의 손자. 어린 시절 천재로 알려졌으나 1801년 신유사옥 때에 고문으로 죽었다. 이 시는 10대 때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임형택 편, 『이조시대 서사시』(하), 창작과 비평사, 1992, 302∼307쪽 재인용). 106수 7언 절구 형식으로 서울의 세태 풍속을 노래한 한경사(漢京詞) 중 ‘남문 밖에서 산대놀이를 구경하고(南城觀戲子)’에서 산대희(山臺戲)를 관람한 느낌을 전하고 있다. 중국 사신을 접대하였던 산대희 전통이 끊기고 민간으로 흘러들어간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기기묘묘한 놀이와 꼭두각시, 탈춤과 아울러 그 안에 만석중놀이·철괴무(鐵拐舞) 같은 연희도 엿보인다. 여기에도 예외 없이 거사와 사당이 등장하고 있어 당대의 민간 산대희 전통 속에도 거사와 사당이 빠질 수 없었음을 알려 준다.

거사와 사당이 나오는데

몹시 늙고 병든 몸

거사는 떨어진 패랭이 쓰고

사당은 남루한 치마 걸치고

이옥(李鈺, 1760∼1812)은 경남도 삼가현(三嘉縣, 지금의 경남 합천 지역)에서 본 사당의 무리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313)이옥(李鈺), 『봉성문여(鳳城文餘)』, 1800. 이옥의 작품에 관하여는 김균태, 『이옥의 문학 이론과 작품 세계의 연구』, 창학사, 1991 참조.

서울 이남에 무당 같은데 무당이 아니고, 창우 같은데 창우도 아니고, 거지같은데 거지도 아닌 자들이 있는데, 무리 지어 다니며 음사(淫辭)를 떠들고 손에는 부채를 들고 놀이판을 만나면 놀고, 남의 집 문을 다니면서 노래하여 남의 옷과 밥을 얻어 내는데 방언(方言)으로 사당이라 한다. 그 우두머리를 거사라 일컫는데 거사는 소고를 치면서 염불을 한다. 사당은 가무(歌舞)만 전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희롱하고 남자를 유혹하는 일에 능하여 대낮에 사람이 모인 곳에서 입술을 빨고 손을 잡아 온갖 계교로 돈을 긁어낸다.

‘거지 같은데 거지도 아닌 자’라는 표현은 이들이 비록 거지는 아니지만 거지 이상으로 떠도는 처지였음을 말해 준다. ‘음사를 떠들고’란 대목은 불교에 의지하여 점도 치던 모습을 빗대는 듯하다.

그리하여 사당의 잔존된 양태는 일제 강점기까지 잔영을 깊숙이 드리우게 되는 것이다. 즉, 일제 강점기에 노천명의 시 ‘남사당’을 보면 그 당시까지만 해도 흔적이나마 전해지고 있던 남사당패 풍경을 그릴 수 있다.

나는 얼굴에 분(紛)칠을 하고

삼단 같이 머리를 땋아 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香丹)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람프불을 돋운 포장(布帳) 속에선

내 남성(男聲)이 십분(十分) 굴욕되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여기서 조라치(詔羅赤)는 절간에서 청소 따위의 궂은일을 하는 남자를 이름하며, 시로 보아 남사당패를 뜻하는 것이니 남사당과 사찰과의 관계를 노천명도 놓치지 않았는가 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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