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4장 떠돌이 예인들이 남긴 예술과 삶의 지문
  • 2. 유랑 예인의 존재 양태, 연희와 매춘
  • 감로탱화에 펼쳐진 유랑 예인의 다양한 레퍼토리
주강현

우리는 조선 후기가 민간 예술의 전성기였다고 들어왔다. 구체적인 증거로 판소리, 탈춤, 민화 따위를 꼽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랑 예인 집단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보면, 가히 연예 예술의 ‘르네상스’였음을 알 수 있다.

『흥부전』의 놀부가 박 타는 대목에서 사당, 거사, 각설이패, 초란이패 따위가 쏟아져 나온다. 『변강쇠전』에서는 장승을 베어다 불을 땐 이유로 장승 동티가 나자 옹녀가 초라니패 따위를 불러 시신을 떼어 내려 한다. 이같이 조선 후기를 풍미한 판소리에서 유랑 예인 집단이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이들 예인이 시대적 총아였다는 증거가 된다.

유랑 예인 집단의 레퍼토리에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방울던지기 따위의 요술에서부터 고려시대의 꼭두각시극까지 전승되는 모든 ‘기예’가 종합되었다. 대략적으로는 풍물, 법고춤, 줄타기, 땅재주, 얼른(요술), 죽방울치기, 비나리, 삼현육각, 판소리, 민요창, 버나 따위를 망라하였다. 물론 집단마다 특성에 따라 주력으로 삼는 레퍼토리가 달랐다. 오늘날로 치면 사물놀이, 서커스, 요술, 비나리, (고사반), 노래, 춤, 악기 연주 등에서 특 정한 한두 가지 ‘주종목’이 있었다. 오늘날 덤블링을 하면서 재주넘기와 노래·춤·악기 연주를 곁들이는 ‘만능 가수’를 보면 영락없이 조선시대의 유랑 예인을 보는 듯하다.

유랑 예인의 활동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은 앞에서 언급된 문인들의 시들이다. 그러나 시각적으로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가장 결정적인 자료는 감로탱화에 반영된 예인들의 여러 놀이 모습이다. 그림들을 통하여 하나하나 분석해 본다면, 유랑 예인들의 레퍼토리가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비슷비슷한 레퍼토리라고 하더라도 시기에 따라서 일정한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18세기 그림에는 장대를 세우고 그 장대 끝에 올라가서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장면이 다수 확인되는 반면 19세기 그림에는 오늘날 볼 수 있는 줄타기가 주로 그려져 있다. 또한, 18세기에는 등장하지 않던 탈꾼이 19세기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남사당 덧뵈기류의 탈놀이가 이 시기에 본격 도입된 것이 아닌가 하는 유추를 하게 한다. 물론 이 같은 추측은 잠정적인 것으로 앞의 문인들의 시에서 등장하는 모습들과 연관 지어 분석해야 할 것이다. 연대순으로 감로탱화에 나타나는 유랑 예인들의 레퍼토리를 분석해 본다.

1724년(경종 2)에 그린 직지사 감로탱을 보면 남녀 악사가 젓대, 장고 등을 연주하는 가운데 여자 하나가 앉아서 춤을 추고 있고 남자 하나는 물구나무서기, 다른 남자 하나는 부채춤을 추고 있다. 남녀가 어우러지고 있다. 남녀유별(男女有別)이 엄격할 것만 같은 조선 후기에 남녀가 어우러져 춤과 노래를 하며 떠돌던 풍경의 일단을 보여 준다. 이 그림에는 줄타기가 없다. 그렇다고 하여 이 시대에 줄타기가 없었던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치악산 구룡사 감로탱이 잘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동국 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727년(영조 3)에 그린 치악산 구룡사 감로탱을 보면 시끌시끌한 분위기 속에서 사내가 장대를 타고 있다. 사내 하나는 장대를 기어오르고, 다른 사내는 두 발을 꼬아서 장대 끝에 매 달고 재주를 부린다. 화공은 악사만 그렸을 뿐 주변에 같이 있었을 법한 여자 예인들은 그리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확대보기
선암사 감로탱 세부
선암사 감로탱 세부
팝업창 닫기

1728년(영조 4)에 그린 쌍계사 감로탱을 보면 높은 장대 끝에는 용두 장식이 있으며, 그 위에 무동(舞童)이 올라 춤을 추고 있다. 악사 셋이 연주하고 있는 가운데 둘은 물구나무를 서고 있고, 여자 하나는 앉아서 춤을 추고 있다. 무동의 존재는 무동이 예인 집단에 공급되고 있던 당시의 시스템을 말해 준다. 즉, 무동의 부모들이 유랑 예인이었거나, 아니면 무동이 일반 유랑민들 가운데서 공급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일제 강점기까지 이어지던 유랑 예인 가족 관계사의 일단이 18세기에도 비슷하게 존재하였음을 말해 주는 그림이다.

1730년(영조 6)에 그린 신흥사 감로탱에는 장대 끝에서 사내가 물구나무를 서고 있고 악사들과 춤꾼, 재주꾼이 보인다. 남녀가 어우러져 춤을 추고 있다.

1736년(영조 12)에 그린 선암사 감로탱을 보면 사내 하나가 장대의 줄을 잡고 있고 다른 사내는 장대 끝에서 물구나무를 서고 있다. 그런데 장대 밑에서 방울을 던지는 사내가 있다. 여러 개의 방울을 번갈아 가면서 잽싸게 던지는 묘기를 보여 주고 있다. 유랑 예인의 주요 레퍼토리 안에 이와 같은 ‘재주 보여 주기’가 포함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원광 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1750년(영조 26)에 그린 감로탱을 보면 유랑 예인들이 흥겨운 놀이판을 벌이고 있다. 바둑 두는 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아귀(餓鬼)들 틈에 유랑 예인들이 그려 져 있다. 인간사 복잡다단한 사건 속에서 예인들이 춤추고 물구나무서기하고 악기를 연주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장면과 가장 환락적인 장면을 대비시키는 것으로 보아 유랑 예인들의 연희가 당대에 가장 화려하였던 것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처음으로 탈꾼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전에 없던 탈꾼들이 감로탱에 등장하고 있음은 유랑 예인 집단의 새로운 레퍼토리로 탈이 도입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1790년(정조 14)에 그린 용주사 감로탱을 보면 사내가 장대의 겹줄에 매달려 젓대를 불고 있고, 그 아래에는 춤꾼이 탈을 썼다. 탈이 본격적으로 유랑 예인 집단의 레퍼토리에 수용된 상태를 말해 준다. 그런데 놀이패 옆에 창우괴뢰(唱優傀儡)라고 써있다. 감로탱에 묘사된 유랑 예인들의 존재란 이처럼 단순하지가 않음을 알려 준다. 창우라는 존재와 겹치기도 하고, 꼭두극패와 일치하기도 하는 것이다. 줄타는 재주꾼들 아래에 탈꾼이 보이는 것도 이제는 전형적인 모습이 되었다.

확대보기
호암 미술관 소장 감로탱 세부
호암 미술관 소장 감로탱 세부
팝업창 닫기

18세기 말에 그린 호암 미술관 소장 감로탱을 보면 포장 안에서 꼭두극이 펼쳐지고 있다. 홍동지로 짐작되는 두 개의 목각 인형이 얼굴을 들이미는 것으로 보아 포장 형식의 꼭두각시극이 그림으로 확인되는 매우 드문 경우이다. 장대 끝에서 젓대를 불고 있고 그 아래서 사내 하나가 방울을 던지며 재주를 선보이고 있다. 사무신녀(師巫神女)라 명한 무녀가 지전춤을 추는 것으로 보아 유랑 예인 집단과 무당패의 일정한 연관성을 말해 준다.

확대보기
수국사 감로탱 세부
수국사 감로탱 세부
팝업창 닫기

1801년(순조 1)에 그린 백천사(白泉寺) 운대암(雲臺庵) 감로탱을 보면 줄을 튕겨 놓고 그 위를 갓을 쓴 사내가 건너가고 있다. 그 이전의 줄타기가 긴 장대를 세우고 장대 끝이나 줄 위에서 매달려 줄을 타는 방식이었다면 양쪽에 버팀목을 세우고 줄을 가로질러서 타는 새로운 줄타기가 선보이고 있다. 그 이전 시기에도 이 같은 줄타기가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적어도 1700년대의 감로탱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같은 줄타기는 20세기까지 이어져서 오늘날에도 우리가 볼 수 있다. 탈을 쓴 사내 둘이 춤을 추고 있거나, 사무신녀라 명기된 무녀가 춤을 추고 있고 여무들이 반주를 맡는 것도 당시에 보편적인 풍경이었을 것이다.

프랑스 기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1832년(순조 32)에 그린 수국사(守國寺) 감로탱을 보면 줄의 형식이 오늘날의 것과 흡사하게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줄 위를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기어가는 재주를 선보이는 것으로 보아 줄에서 노는 다양한 방식의 레퍼토리가 개발되었음 직하다. 한편으로 줄의 버팀목을 기어오르는 재주도 그대로 전승 되었으며, 탈을 쓰고 있음이 주목된다. 탈은 원숭이탈로 짐작된다. 방울던지기 재주꾼이 줄 아래서 놀고 있다.

확대보기
흥국사 감로탱 세부
흥국사 감로탱 세부
팝업창 닫기

1868년(고종 5)에 그린 수락산 흥국사 감로탱을 보면 줄이 외줄이 아니라 쌍줄이다. 줄타기 재주와 방울던지기 재주, 탈꾼과 사당들의 춤이 어우러지고 있다. 사당녀들이 본격적으로 춤을 추면서 연희를 파는 모습이 연출되고 있다.

1887년(고종 24)에 그린 경국사 감로탱을 보면 소고 치는 거사들과 춤추는 사당녀들이 한판 걸지게 놀고 있다. 탈과 줄타기가 없는 대신에 연신 흥을 돋우면서 집단 가무로 판을 이끌어 가는 맨 얼굴의 예인들에게서 놀이적 원초성이 감지된다.

1898년(고종 35)에 그린 삼각산 청룡사 감로탱을 보면 쌍줄 위에서는 물구나무서기, 줄 밑에서 방울던지기, 그리고 춤추는 여자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19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놀이판 모습 그대로이다.

확대보기
경국사 감로탱 세부
경국사 감로탱 세부
팝업창 닫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