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4장 떠돌이 예인들이 남긴 예술과 삶의 지문
  • 2. 유랑 예인의 존재 양태, 연희와 매춘
  • 다양한 패거리들
  • 중매구패
주강현

걸립패와 관계 깊은 패로 중매구패가 있다.319)경남 남해 화방사(花芳寺) 소속의 걸립패가 놀던 탈놀이 이름인데, 그들의 대표적 연희였던 때문인지 그들 걸립패를 말할 때 그대로 중매구로 통한다고 하였다(심우성, 앞의 책, 21쪽). 1980년대까지 전승되었던 4패거리의 걸립패(자신들은 建立牌라 함)를 보더라도 사찰과 직접 간접으로 연관을 맺지 않는 행중(行中, 패거리)은 없었다. 글자 그대로 중이 매구를 치는 패거리이다. 이들은 사찰의 보수·창건 등을 명목으로 풍물 등의 기예를 보이고 불경(천수경) 등을 읊어 주고는 그 대가로 곡식과 금전 등을 거두어들였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중매구를 보면서 ‘승희(僧戲)를 구경함’이란 한시를 남겼다.320)이덕무(李德懋),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1, 관승희(觀僧戲).

중의 무리 십 수 명이 깃발을 들고 북을 둥둥 울리며

때때로 마을 안에 들어와 입으로 염불을 외며

발 구르고 춤추면서 속인의 이목을 현혹시켜 미곡을 요구하니

족히 한 번의 웃음거리가 된다

시 한 수를 지었으니 대개 실상을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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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입장에서는 빈약한 재정을 마련하는 좋은 방식이었다. 사찰은 아예 사당패를 절로 불러들여서 걸립에 임하였다. 사당패를 직접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절에서는 절 자체에서 탁발(托鉢)을 내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탁발만 하고는 대대적인 불사 등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중매구패였다. 일종의 ‘기획 이벤트’였다. 절에서 매구패를 고용하여 신표(信標)를 주고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굿을 치게 하고 공양미를 걷는 방식이다. 가령, 경남 남해군 고현면의 화방사(花芳寺) 부근에는 아예 전문적인 중매구패가 존재하기도 하였다.

중매구패는 고사반(고사염불(告詞念佛))은 물 론이고 승무, 바라춤 같은 무용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이 같은 연희 활동을 매개로 사찰과 유랑 집단은 깊은 연관을 맺었다. 민중들은 어려운 법문(法問)보다도 이들의 문화 활동을 통하여 불교에 친화력을 느꼈다. ‘문화 포교’ 방식으로 원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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