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4장 떠돌이 예인들이 남긴 예술과 삶의 지문
  • 2. 유랑 예인의 존재 양태, 연희와 매춘
  • 다양한 패거리들
  • 얘기장사
주강현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반의 서울의 갖가지 서민들의 모습을 스케치한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의 『추재집(秋齋集)』에는 전기수(傳奇叟)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전기수는 동대문 밖에 살고 있다. 언문(諺文) 소설책을 잘 읽는데 이를테면 숙향전(淑香傳)·소대성전(蘇大成傳)·심청전(沈淸傳)·설인귀전(薛仁貴傳) 같은 것들이다. 읽는 장소를 매달 초하루는 제일교 아래, 초이틀은 제이교 아래, 그리고 초사흘은 배오개에, 초나흘은 교동 입구, 초닷새는 대사동 입구에 앉아서, 그리고 초엿새는 종각 앞에 앉아서, 이렇게 올라갔다가 다음 초이레부터는 도로 내려온다. 이처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고 또 올라갔다 내려오고 하여 한 달을 마친다. 다음 달에도 또 그렇게 하였다. 워낙 재미있게 읽기 때문에 청중들은 겹겹이 담을 쌓는다. 그는 읽다가 가장 간절하여 매우 들을 만한 대목에 이르러 문득 읽기를 멈춘다. 청중은 하회(下回)가 궁금해서 다투어 돈을 던진다. 이것을 일컬어 요전법(邀錢法)이라 한다.

아녀자는 슬픔에 젖어 눈물을 뿌리지만

영웅의 승패는 결단키 어렵도다

읽다가 그치는 곳 ‘요전법’이다

인정의 묘한 데라 하회가 궁금하지321)조수삼(趙秀三), 『추재집(秋齋集)』 권7, 기이(紀異), 전기수(傳奇叟).

전기수가 특별히 한양의 인물로서 조수삼의 기록에 등장하였으나, 전국 곳곳에는 이야기 품을 팔면서 떠돌던 이야기꾼들이 존재하였다. 1인의 이야기 구연자(口演者)와 1∼3인의 잽이가 당대 인기 소설을 읽어주는 ‘1인극’을 놀았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이야기해 주는 전문적인 직업 강담사(講談師)가 존재하였고, 우리 경우에는 이들 이야기꾼이 판소리의 서사 구조를 짜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도 하였다. 눈으로 소설을 읽는 현대와 다르게, 일종의 노랫가락으로 소리를 읽어 내던 시절의 풍경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