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4장 떠돌이 예인들이 남긴 예술과 삶의 지문
  • 2. 유랑 예인의 존재 양태, 연희와 매춘
  • 꽃값과 호모 섹슈얼의 원조
주강현

[꽃값과 호모 섹슈얼의 원조]327)이 글은 주강현,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1, 한겨레신문사, 1996을 참고 정리하였다.

사당패나 남사당패는 우리나라 성의 역사에서도 빠뜨릴 수 없는 존재이다. 최근까지 기예를 이어온 그들의 후예들이 쉬쉬하는 탓에 면모가 잘 드러나질 않지만, 매춘의 역사나 남색(男色)의 역사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사당패는 연희를 팔아서 먹고살았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가진 것이 몸뚱어리밖에 없는 천민 신분으로서 ‘팔 것’은 모두 팔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육체였다. 해우채란 말은 거기서 생겨났다. 송석하는 「사당고(社堂考)」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사당은 표면상 박도(博徒) 및 하층 계급 남자들의 주석에서 가무를 하여 흥을 돋우는 것이지만 기실은 그들을 상대로 매춘을 하는 것이며, 매춘부 중에서도 최하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들 사당은 거사라 칭하는 남자와 부부 관계를 맺고 의복·화장품, 기타 일체를 거사로부터 지급받는 대신에 표객(嫖客)으로부터 받는 해우채는 몽땅 거사의 소득이 된다. 즉 사당배파라는 한 단체를 조직함에 있어 그 기업자이며 통솔자를 모갑(某甲)이라고 하고 그 모갑이 조직한 단체에 각지로부터 사당 거사의 일보가 동참하여 그 일군이 되어 마을에서 마을로 절에서 절로 유랑의 여행을 하면서 마을 의 광장이나 절의 근처에서 노래와 춤을 추면 그곳을 보고 표객은 모갑에게 한 사당을 지정하여 하룻밤 지내기를 청한다. 이때 표객으로부터 사당에서 준 해우채는 그대로 거사에게 돌아가고 또 거사는 얼마간을 모갑에게 주는 것이다. 사당과 거사와의 일상생활은 상식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기괴한 것이어서 마을을 돌아다닐 때에는 거사는 사당을 등에 업고 다니며 대단히 소중이 다루며 세수 일체도 거사가 한다. 그리고 표객이 없을 때에는 동침하지만 객이 있으면 표면상으로는 흔연히 내첩(乃妾)을 내어 놓지 않으면 안 될 규칙이며, 말하자면 어버이 겸 하인의 관(觀)이 있다.328)송석하(宋錫夏),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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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거사와 한량
사당 거사와 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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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우채란 오늘날 매매춘에서 여자에게 주는 화대(花代, 꽃값)에 해당되는 말인데, ‘치마를 벗는다’는 해의채(解衣債)에서 비롯되었다. 거사는 사당을 업고 데려다 주고 일이 끝나면 다시 업고 왔다. 공존공생의 삶 속에서, 흡사 오늘날의 창녀촌에서 기둥서방과 창녀가 그러하듯이 거사는 사당의 보호자이자 판매자였다. 이학규(李學逵, 1770∼1835)가 지은 한시 ‘걸사행(乞士行)’에서는 18세기 말의 사당들 모습과 아울러 유랑하면서 몸을 파는 여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동당 동당 동당

호남 퇴기 해서 창녀

한 불당에

내 사당 네 사당 무어 다투랴

아무데고 인산인해 이룬 곳에

엉큼하게 손 집어넣어 치마 속 더듬는다

너는 일전에

몸을 허락하는 계집이요

나는 팔도에

거친 데 없는 한량이란다

아침엔 김 서방 저녁엔 박 서방

물결치는 대로 바람부는 대로

일반 보시 술 한 잔 국 한 사발329)이학규(李學逵), 『낙하생집(洛下生集)』 18책, 습유(拾遺), 「걸사행(乞士行)」.

“장사치들은 머릿기름 냄새에 눈 깜작이고 침 흘리며 돈 물 쓰듯 하고 빈털터리 되는구나”라고 읊었으나, 뭇 사내들에게 몸 파는 대가가 고작 ‘술 한 잔, 국 한 사발’이라는 데서 몸을 던져 생계를 연명해야 하였던 사당의 비참한 현실이 그려진다. 양주 별산대놀이 애사당 북놀이에도 이런 노래가 전해지고 있다.330)이 노래는 애사당 자탄가(自歎歌)라고도 한다. 양주 별산대놀이의 자탄가에 안성 청룡으로 사당질 가자는 말이 나오고 있음은 그만큼 안성의 사당질이 유명하였다는 증거이다.

한산 세모시로 잔주름 곱게곱게 잡아 입고

안성 청룡으로 사당질 가세

이 내 손은 문고린가 이놈도 잡고 저놈도 잡네

이 내 손은 술잔인가 이놈도 빨고 저놈도 빠네

이 내 배는 나룻배인가 이놈도 타고 저놈도 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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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별산대놀이
양주 별산대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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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능화는 1927년에 쓴 『조선 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서, “여사당의 묘기가 절정에 이르게 됐을 때, 청중이 동전을 물고 ‘돈, 돈’ 소리를 내면 여사당이 가서 입으로 돈을 받으며 입 맞추는데 또한 묘기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50년 전(대략 1875년) 본인이 어렸을 때, 직접 괴산에서 보았다.”라고까지 구체적으로 시간·장소를 증언하고 있다.

한편, 남사당패는 남색(男色) 사회였다. 그들은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면 파트너를 정하였다. 개인적으로 기량을 전수받는 교육 체계에서 파트너십은 중요하였다. 암동모와 수동모로 정해진 파트너십은 쉽게 남색으로 이어졌다. 심지어 남사당은 농촌으로 공연을 나갔다가 경제적 여건 때문에 여성을 맞아들이기 어려운 머슴 등 하층민의 남색 대상이 되어 주기도 하였으니, 그들의 성 행위를 계간(鷄姦)이라 불렀다. 지금으로 치면 ‘호모 섹슈얼’이었다.

그들의 남색 행위는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필연적이기도 하였다. 양반이나 돈 있는 층은 기생첩을 옆에 끼고 살 정도였지만, 머슴 같은 하층민들은 그렇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억눌린 성적 배출구로 기능하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반반한 암동모를 탐내는 한량에게 빌려 주고 해우채를 챙 기기도 하였다. 또한, 평상시에는 남사당들 스스로의 성적인 문제를 남색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수동모와 암동모가 그것이다. 수동모는 가열 이상이며, 암동모는 삐리들이 감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삐리는 전원이 암동모 구실을 하였다. 가열은 살판, 어름, 버나 등의 기예를 익힌 예인이며, 삐리는 이들에게 기예를 배우는 사람들이다. 하나의 원칙이 있었으니, 꼭두쇠일망정 암동모를 하나 이상은 차지할 수 없었고, 삐리의 수효가 전체의 반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전원이 짝을 지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이 같은 행동 양태는 그들이 유랑 예인 집단이라는 독특한 집단적 속성과 천민이라는 계급적·사회적 속성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영화 ‘패왕별희(覇王別姬)’에서 드러나듯이 ‘경극패(京劇牌)’에게도 있었던 남성 예인 집단만의 독특한 성 문화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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