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4장 떠돌이 예인들이 남긴 예술과 삶의 지문
  • 3. 유랑 예인의 근거지, 장시와 사당골
  • 바우덕이의 경우
주강현

꽃다운 나이 21세.331)바우덕이의 정확한 생몰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안성 고을의 이름난 여사당 바우덕이가 젊디젊은 나이에 죽었다. 미색이 아름다워 양귀비를 능가한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던 그녀였지만 죽음의 신만은 뿌리칠 수 없었는가 보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 하였던가. 남편 이모는 그때 나이 마흔두 살이었는데 제 계집의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청룡리 개울 숲에서 바우덕이를 화장해 뿌리고는 미친 듯이 남사당에만 몰두하였다고 한다.332)안성군지 편찬 위원회, 『안성군지』, 안성군, 1990, 541쪽. “이런 민담도 적어두지 않으면 얼마 안 가서 망실되기 쉬어서 여기에 적어둔다.”라고 하였다.

뭇 남자치고 바우덕이 한번 만나는 게 소원 아닌 자가 없었다. 사내들은 바우덕이 치마만 펄럭이는 모습을 보아도 오금이 저려 잠을 못 이루었다. 바우덕이가 안성장에 나서면 시끌벅적한 시장은 돌연 침묵으로 빠져드는 듯하였으며 사내들은 바우덕이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감상하면서 엽전을 비 오듯 뿌려 댔다. 요행히 거래가 성사되어 그녀와 잠깐의 사랑이라도 나누게 되면, 그 한량 끼 많은 사내는 일약 ‘영웅’이 되어 세간의 술판을 압도하였다. 그녀의 직업이 단순히 놀이만 파는 것이 아니라 몸까지 파는 것이었으니 안성만 해도 그녀와 ‘구멍 동서’가 즐비하였다. 그래서 안성 장터에서 생겨났음 직한 다음과 같은 노래가 근 100여 년을 뛰어넘어 오늘에까지 전해지는 것이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를 가네333)인물이 출중하고 사연이 많으면 이본(異本)이 없을 수 없다. 비슷한 내용이지만 다음과 같은 노래도 전한다. “놀러 가세 놀러 가세 바우덕이 집으로 놀러가세 돈 나온다 돈 나온다 바우덕이는 소고만 잡아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에 날리며 떠나를 가네.”

이상의 바우덕이 노래에는 몇 가지 진실이 담겨 있다. 첫째, 바우덕이가 주로 활동한 공간이 안성이라는 점이며, 둘째, 바우덕이가 주로 머문 공간이 안성 청룡사(靑龍寺)이고, 셋째 바우덕이의 주 레퍼토리가 소고와 줄타기이고, 넷째, 바우덕이의 주업이 연희 외에 ‘치마 벗기’라는 사실 등이다.

즉 ‘안성-청룡사-연희 활동-매매춘’이 바우덕이 이력서의 전부이다. 안성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던 인물이며, 청룡사가 그녀가 의탁하였던 절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녀는 주로 줄타기와 소고춤을 선보였던 것 같으며, 치마가 상징하는 매춘을 하였고, 거기에는 당연히 돈이 뒤따랐다. 그러나 바람을 날리며 떠나가듯이 늘 떠돌 수밖에 없던 유랑 예인이었다.

전설은 계속된다. 바우덕이는 일명 개다리패의 중심인물로 김암덕(金岩德)이란 한자 이름을 풀어낸 이름이며, 안성 청룡사를 거점으로 1900년 초까지 활동하였던 것 같다. 1900년 초까지 활동하였다는 근거는 예인들의 입을 통하여 전해지는 유랑 예인의 계보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이 역시 구전된 ‘전설’에 기초한 것이다.

그의 남편 역시 남사당이었다. 함께 떠돌면서 한솥밥 먹고 커 나가다가 나이가 차면 서로서로 꿰차고 살림 내서 애 낳고 살아가는 것이 여사당과 남사당의 ‘운명’이었다. 바우덕이는 십대부터 인기를 끌었으나 겨우 21세를 넘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놀이판에서 너무 몸을 혹사시켰던 탓일까. 당대의 평균 사망 연령이 낮은데다가 떠돌이 예인들은 더욱 낮았으리라. 충분한 휴식, 넉넉한 먹을거리, 안온한 잠자리 등과 당초 거리가 있었던 예인들이었으니 병도 잦았으리라.

바우덕이가 죽을 당시, 그의 남편은 나이 마흔두 살의 장년. 떠꺼머리 숫총각으로 20년 세월을 보내다가 느지막이 얻은 부인이었다. 어린 아내가 죽자 그는 매일같이 바우덕이와 놀던 바위에 올랐다. 사람들은 아내 때문에 실성하였다고 하면서 끌끌 혀를 찼다. 그는 바위에 올라 나발을 불고 장구를 치거나, 때로는 노래를 불렀고 울기도 하였다. 몇 년을 그렇게 하다가 어느 날 그 역시 홀연히 사라졌다.

청룡리에 나팔바위, 또는 울바위·덩뚱바위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는데 약 200여 년 전 이 모(李某)라는 사람이 매일 같이 그 바위에 올라서서 나발을 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바위 이름도 바우덕이의 남편 이 모가 바우덕이를 여위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생시에 자주 가서 놀던 그 바위에 올라가 나발도 불고 장구도 치고 울기도 해서 후세 사람들이 그 바위를 나팔바위·덩뚱바위, 또는 울바위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렇게 되면 그 연대가 120여 년 전의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334)안성군지 편찬 위원회, 『안성군지』, 안성군, 1990, 541쪽.

‘120년 전’이라는 근거 역시 하나의 전설일 뿐이다. 남편이 마흔두 살이었다는 것도 근거 없이 민중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온 말이다. 나이 차가 많았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어여쁜 젊은 아내가 죽으면 누구나 실 성 지경까지 이르는 것은 당연지사. 안성 사람들은 이들 연인을 기념하면서 전설의 기념비적 증거물을 남겨 두었다. 사람들은 그가 올라섰던 바위를 나발을 불었던 바위라는 뜻으로 바위 전설을 남겼으며, 전설의 역사적 증거물로 바위는 지금도 말없이 그 당시를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또 하나의 결정적 증거로 앞에 예를 든 노랫가락을 남겼다. 바우덕이는 100여 년 전에 이 세상을 떠났으나 사람들이 그를 빗대어 지은 노래만큼은 지금도 안성 땅에 전해지는 중이다.

이상과 같은 구술된 노래, 혹은 지역 전설에 담겨 있는 내용이야말로 당대 민중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최고의 진실이 아닐까. 그 누가 문헌적 근거 없음을 들먹이며 기록에 남지 아니한 민중의 생활사를 하대할 수 있으랴. 그러나 이쯤에서 우리는 지역사, 혹은 인물사를 서술함에서 문헌 기록이 전무한 것에 비통을 금치 못한다. 앞에 언급된 그야말로 소설 같은 이야기들은 구전에 입각한 재구성인지라 우리들이 통념으로 알고 있는 바우덕이에 관한 생각에서 어긋남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유사무서의 역사’라 하더라도 구전이 그 역사적 진실을 획득하려면, 좀 더 당대 현실의 이러저러한 문제들과 결부되어야 하고 가능한 범위에서 ‘입증’될 수 있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하리라. 매우 어려운 일이기는 하나, 그러한 과제가 당대의 우리들에게 남았다. 바우덕이를 주인공으로 소설 쓰듯 만한다면, 그이의 진실은 끝내 밝혀낼 수 없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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