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4장 불교 조각의 제작과 후원
  • 3. 후원자의 신분층과 시주 목적의 변화
  • 통일신라시대
정은우

통일신라시대는 이전의 전통을 수용하고 활발한 대외 교섭 아래 유입되는 새로운 문화를 발전시켜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시기이다. 불교 신앙은 국가적인 호응 아래 더욱 발전하여 보편화되었으며, 특히 나라의 평안을 염원하는 호국 불교적인 성격을 띠면서 왕실과 귀족들의 후원하에 크게 성행하였다.

이에 건국 초기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호국적인 불사가 왕실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삼국을 통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679년(문무왕 19)에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을 띠고 사천왕사를 창건하였다. 죽은 뒤에도 용이 되어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염원은 682년(신문왕 2)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건립하는 배경이 되었다.131)문무왕대 불교 미술과 그 후원자에 대해서는 Kim Lena, Buddhist Sculpture of Korea, Hollym, 2007, pp. 63∼72 참조. 즉, 건국 초기 불사의 목적은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있었으며 가장 큰 후원자는 왕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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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산사 미륵보살 입상
감산사 미륵보살 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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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산사 아미타불 입상
감산사 아미타불 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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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차원에서의 불사 가운데는 부모나 친족의 극락왕생을 비는, 개인적인 소박한 바람을 기원하는 시주도 있었다. 이는 불교의 내세 신앙과 더불어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에서 비롯된 불사였다. 경주 낭산의 동쪽 기슭에 있는 구황동 황복사지에서는 3층 석탑의 사리함 속에서 두 구의 순금제 불상이 발견되었다. 사리함의 뚜껑 안쪽에는 692년(효소왕 1) 신문왕의 부인 신목 태후와 아들 효소왕이 선왕을 위해 탑을 세우고 두 분이 돌아가시자 706년(성덕왕 5) 이들을 위해 성덕왕이 다시 불사리와 다라니경, 아미타상을 넣었다는 기록이 적혀 있었다.132)김리나, 『한국 고대 불교 조각사 연구』, 일조각, 1989, 172∼174쪽. 성덕왕의 효심을 볼 수 있는 내용으로 죽은 뒤의 세계와 연결된 아미타불 조성과 그 신앙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719년(성덕왕 18)에 조성된 감산사(甘山寺)의 석조 미륵보살 입상과 석조 아미타여래 입상 역시 성덕왕 때 집사성 시랑(侍郞)을 지냈던 김지성(金志誠, 652∼?)이 감산사를 짓고 부모를 위해 제작한 불상이다.

이러한 시주 형태는 왕실이나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성행한 보편적인 모습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의 영토였던 충남 연기 지역에서 발견된 여러 구의 비상(碑像)에는 명문이 적혀 있다. 명문에는 이 상이 아미타불이며 내말(乃末)과 대사(大舍)를 포함한 신라의 관 직명, 달솔(達率)과 같은 백제의 관직, 전씨(全氏)·진모씨(眞牟氏) 등의 백제 성씨 등이 적혀 있어 이 지역에 계속 살고 있던 백제계 유민들이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상을 제작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모든 비상이 아미타정토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어 도상적인 옆면으로 미루어 보면 죽은 뒤의 명복을 비는 정토 세계와 관련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국가적인 차원보다는 집단이나 개인의 명복을 빌기 위한 소박한 바람에서 만든 작품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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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석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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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 국가와 귀족 차원에서의 불사와 후원자의 백미는 석굴암과 불국사(佛國寺)의 창건이다. 석굴암은 경덕왕(742∼764) 때 집사를 지낸 김대성(金大城)이 발원하여 751년(경덕왕 10) 불국사와 함께 공사를 시작하였고, 그가 죽은 774년(혜공왕 10)에도 완성하지 못해 나라에서 완성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잘 알려진 내용이다. 또한, 이 두 사찰의 창건 목적은 전생과 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와 불국사를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즉,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 경조(慶祖)를 위해 석불사를, 현세의 부모 김문량(金文亮)을 위해 불국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신라 김씨 가문에 의한 왕실 불사의 한 예로,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이 국가적인 개념과 결부되어 나타난 것임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왕실이나 귀족층에 의한 중앙 중심의 불사만이 아니라 지방에서도 대찰(大刹)을 조영하였다. 이는 화엄종의 대가였던 의상(義湘)이라든지 정토 신앙의 대중적인 전파를 가져 온 원효(元曉)의 활약 때문이다. 그리고 태현(太賢)과 진표(眞表) 등은 불교 신앙의 보편성에 기인하면서 민중 속에서 실천적 성격의 불교로 전환하였던 대표적인 승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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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안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도피안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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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안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조상기 탁본
도피안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조상기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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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후반 의상은 영주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였는데, 이를 시발점으로 8세기에도 지방 대찰의 건립은 계속 이어져 전주 금산사(金山寺)와 구례 화엄사(華嚴寺) 등이 조영된다. 이는 불교 신앙의 토착화에 기인한 것이지만 불교 신앙이 왕실 중심의 신앙에서 벗어나 지방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후원자 세력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특히, 9세기에는 중앙 정권의 약화와 더불어 지방에서 호족들이 등장하면서 정치 세력이 분산되고, 지방 호족 세력이 중심 세력으로 부상하면서 경주에서 지역으로 중심지가 바뀌게 된다. 이 시기에는 사상계에도 변화가 있어 821년(헌덕왕 13) 귀국한 도의(道義)를 필두로 중국에 유학하였던 승려들이 돌아오면서 선종(禪宗)이 유행하게 되고, 이들은 지방 곳곳에 선종 사찰을 세웠다. 관념적이고 학문적인 성격이 강한 화엄종과 달리 현실적이고 실천적 성격 이 강하였던 선종은 급변하는 정치적 변화에 대처하고 극복하는 데 필요한 성격과 더불어 왕실, 귀족, 지방 호족 그리고 민중 다수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원인이 되었다.

선종계 승려들은 지방 호족들의 후원뿐만 아니라 왕실 세력과도 관련되는데, 이 시기 국사를 지낸 현욱(玄昱), 무염(無染), 수철(秀澈), 행적(行寂), 심희(審希), 개청(開淸) 등은 모두 선종계 승려였던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민중을 중심으로 한 결사적 성격도 눈에 띄는 특징으로 865년(경문왕 5)에 제작된 강원도 철원의 도피안사 철조 여래 좌상에 새긴 명문에는 거사 1,500여 명이 결연하여 그 굳은 뜻을 남기고자 제작하였다고 하였다. 단순히 불교 신앙을 결연하기 위해 남자 신도 1,500명이 결사하였다는 옆면에서 놀라운 신앙심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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